밥도 든든히 먹었겠다, 다시 루트번 폴 헛(Routeburn falls hut)을 향해 떠납니다. 표지판 왈, 앞으로 1시간 30분이 더 걸릴거라네요. 루트번 트램핑은 양 방향에서 올라올 수 있기 때문에, 간혹 맞은 편에서 저와 반대 코스로 트램핑을 하는 등산객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진 속에 보이는 두 명도 제가 가야할 길에서 내려오는 중이네요. 이 곳부터 루트번 폴 헛까지는 제법 오르막입니다.  

 

 

참, 비록 트램핑 초반에 무게가 나가는 과일이 몇 개 든 비닐 봉다리를 묶고 다니긴 했지만 제 배낭은 매우 단촐하게 꾸려져 있습니다. 같은 팀 중에는 제일 작은 배낭을 메었더군요. 비교해보니 거의 day walker들과 비슷한 수준이더라고요. 대신 김원장이 좀 고생을 했겠죠 ^^;

 

입고 있는 옷 외에 침낭, 에어 베개, 등산용 방석(일명 레저 쿠션) 2개씩, 보온용 폴라텍 상의와 내복, 여벌로 마련한 등산 양말 한 켤레씩 더, 세면 도구와 스포츠타올, 쌍안경과 여분의 카메라 밧데리, 작은 코펠 2개와 기타 부식거리(쌀, 라면, 김, 통조림, 육포 따위의 비상식, 과일), 랜턴과 라이터 등을 넣어 가져갔고요, 물통은 750 ml 짜리던가 작은 물통 두 개를 준비했습니다. 트램핑 중 물이 모자라는 일은 없었고요. 돌아와서 확인해보니 알차게도 먹었더군요. 처음 준비할 때는 음식물이 좀 많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먹게 됩니다 ^^; 준비하실 때 넉넉히 준비해가시는 편이 오르막에 조금 힘이 들더라도 더욱 트램핑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트램핑 중에는 먹거리를 살 곳이 전혀 없으니까요. 잘 먹고 다닌 덕에 여정 내내 가방이 조금씩 조금씩 가벼워지더니만 마지막에 이르러선 거의 털레털레 멘 듯 안 멘 듯 했답니다.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서 길을 가로 막았습니다. 아래로 통과하려는 제 모습이고요, 이런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은근 이런 일이 또 있기를 기대했는데 이 곳 딱 한 곳 뿐이더군요.

 

 

 

루트번 밸리(Routeburn valley)를 오른편에 둔 채 계속하여 오릅니다. 간간히 루트번 플랫 헛이 있는 루트번 밸리의 모습이 보이다 안 보이다 하면서 멋진 경관을 선사합니다. 오~ 아까 점심 먹었던 곳이다~ 반갑게 아는 척도 해보고요.

 

 

루트번 트램핑 코스는 워낙 잘 정비되어 있기 때문에 단 둘이 트램핑을 떠난다고 하여도 크게 걱정할 바가 없습니다. 저희 생각으로는 저희가 어쩌다 오늘 중에 산장에 못 도착하는 일이 생기면, 밤에 헬기라도 띄워 아예 저희 이름을 확성기에 대고 크게 불러댈 것만 같더군요. 그만큼 등록이 생활화(?)되어 있는 곳이라 혹시 만에 하나 조난을 당하는 불상사가 생긴다 하더라도 이 곳에서만큼은 이들이 자신있게 내세우는 대로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찾아올 것만 같더라고요. 본의 아니게 파키스탄의 그것과 계속 비교되는 코스였답니다.

 

전체 구간에 있어 미끄러질만한하다 경고한 곳도 루트번 플랫 헛과 루트번 폴 헛 사이에 있는 이 곳 한 곳 뿐입니다. 몇 년 전에 큰 비가 내린 뒤 길이 좀 무너져 내린 구간인데, 미리 안내하기를 위험하다 생각이 들면 건너지 말아라 운운하여 좀 긴장하였으나 막상 도착해보니 역시나 전혀 안 무서운 구간이었습니다(파키스탄에서 내공이 쌓인건지 ^^;). 이 구간은 돌이 굴러 떨어질수도 있으니 멈추지 말고 계속 걸으라고 했던 것 같은데 김원장도 저도 잠시 멈춰섰네요. 이 곳에서 바라보는 루트번 밸리의 경관도 아주 훌륭하거든요.

 

 

루트번 폴 헛은 이름 그대로 루트번 폭포 옆, 루트번 밸리가 멋지게 내려다 보이는 백만불 짜리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워낙 처음부터 천천히 걸었던지라 표지판 예상 시간 대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1시간 10분 만에 올라왔네요. 또한 이 곳은 부시 라인(bush line)의 끝 선상에 있는지라 이 곳 이상부터는 알파인 지대(alpine area)랍니다. 눈을 들어 위쪽을 바라보니 말처럼 야트막하게 자라는 놈들만 좀 보이고 더 이상 커다란 나무 숲의 모습은 찾을 수 없습니다. 방금 전까지는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울창한 숲 속 터널을 통과했었는데 말이죠.   

 

 

루트번 폴 헛에 오니 저희 같은 개별 트레커들을 위한 산장과 가이드 동반 팀을 위한 산장이 따로 한 채씩 있습니다. 당연히 많은 돈을 지불한, 조금 더 위편에 자리한 가이드 팀 산장이 겉보기에도 훨씬 좋아 보입니다. 루트번 밸리가 내려다 보이는 커다란 통유리 창을 가지고 있거든요. 가이드 동반 팀에 신청을 해서 트램핑을 하게 되면 일정내 세 끼 식사가(소문에 의하면 시원한 맥주까지 준다는.. 진짜라면 심히 부러운 일인데 말이죠 ^^;) 포함되기 때문에 간식을 제외한 주 먹거리를 운반할 필요가 없어 짐의 무게를 많이 덜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요(다만 제 개인적으로는 삼시 세끼 양식을 먹는 것 보다 입에 맞는 한식이 훨씬 힘이 날 듯 싶지만요), 트레킹 후 뜨거운 물에 샤워까지 할 수 있다네요.

  

 

 

루트번 폴 헛에는 2개의 벙크룸(bunkroom)에 각각 24개씩, 총 48개의 침상이 2층으로 열을 지어 한 칸에 4자리씩 있으며 캠프 사이트(campsite)는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희는 글레노키 쉘터에서 오전 출발한 팀 중에는 거의 마지막이었지만, 오후 팀을 비롯, 반대편 맥켄지 헛(Mackenzie hut)에서 넘어와 오늘 이 곳에 묵어야 하는 팀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관계로 침상에의 여유가 충분했던지라 원하는 자리를 골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2층 침대 하나를 둘이 쓰려고 했는데, 이 곳 사람들 키가 워낙 커서인지, 2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타기도 좀 버겁더군요 -_-; 그래서 결국 나란히 1층을 썼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다 시원한 루트번 폭포의 모습입니다.  

 

 

벙크룸 바로 앞의 복도 겸 전망대에서는 보시는 것과 같은 전경이 펼쳐지는 덕에 해가 저물어가자 여러 명이 앞 다투어 - 놀랍게도 예까지 삼각대까지 들고 온 사람이 있었다는 - 노을 사진을 찍느라 바쁩니다. 

 

 

<산장에서는 모두들 무거운 등산화를 밖에 벗어둔 채 맨발로 다니는 분위기 ^^> 

 

 

산장에서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 무척 기대를 했는데, 우와~ 시설이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물론 이 산장이 루트번 트램핑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4개의 산장 중 가장 최신식(그래도 벌써 지어진지 꽤 된)이라고는 하지만요. 사진은 부엌겸 식당으로 사용하는 건물의 내부 모습입니다. 가스레인지는 성냥이나 라이터로 점화를 하여 쓸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저녁 메뉴는 사천요리 짜파게티. 매운 맛이 가미된 짜장 라면입니다. 하루의 등산을 마친 뒤 먹는, 그것도 뉴질랜드 깊은 산 속에서 먹는 짜장면의 맛이 어땠을지 다들 짐작하시죠? (저도 남들처럼 짜장이 어쩐지 더 맛있게 들려요. 자장은 좀 허여멀건한 느낌이죠?)

 

<꼬들꼬들하게 제대로 먹겠다는 집념으로 -_-; 여러 번 라면가락을 들었다 놨다 하는 김원장>

 

한 쪽에선 라면을 끓이고(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손이 안 보이는 김원장 ^^ ㅋ) 다른 한 쪽에선 물을 끓이는 중(이후 식혀서 다음 여정을 준비해 둡니다)입니다. 라면이야 워낙 집에서도 김원장 담당이지만 - 제가 끓이면 맛이 없다는 -_-; - 여행 나오니 라면은 기본이고 설겆이도 하고 쌀도 씻어 불려놓고 ^^; 아주~ 편하고 좋습니다.

 

 

부엌의 바로 반 아래층인 식당의 모습입니다. 오늘 루트번 폴 헛 숙박객들의 반 이상은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지만 - 생각보다 뉴질랜드 현지인들도 꽤 오더군요. 아니, 이게 오히려 당연한 일인가요? - 나머지 반은 완전 다국적군이었습니다. 앞서 밝혔듯 동양인은 저희 말고 저희 또래로 보이는 일본인 커플이 한 쌍 더 있었고요, 나머지는 모두 백인이었습니다(이상하게 뉴질랜드에서 흑인 보기는 어려웠어요). 다만 사용하는 말들은 가지각색 ^^;

 

혹시나하여 다녀간 한국분이 계실까 방명록을 뒤져보니 올 시즌엔 저희 이외 한 팀만이 먼저 루트번을 오셨다 가셨네요(물론 방명록을 작성하신 분들 중에서). 벽면에 붙어 있는 저 커다란 천에는 지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수 많은 나라의 크리스마스 인삿말이 적혀 있었는데요, 이후 나타난 산장지기(hut warden) 존(John)이 저 글들이 다 어느 나라 언어인지 모두 맞추면 커다란 초컬릿을 상품으로 주겠다고 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말이죠 ^^;

 

맨 꼭대기에 한글이 있습니다. ^0^

 

<루트번 폭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라고 쓰여져 있네요. 글씨체를 보아하니 한국분께서 쓰신 것 같은데 어느 분께서 이리 멋지게 써놓고 떠나셨을까요?

 

참, 산장지기는 오후 7시 30분 경 식당에 나타나 모든 사람들을 모아놓고 인사와 산장 소개,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다음 날 날씨 예보, 다음 코스에 대한 설명 및 주의 사항 등을 상세히 알려줍니다. 그리고는 hut ticket을 걷어 인원 체크를 하지요. 워낙 뉴질랜드식 영어가 우리가 배우는 미국식 영어와 듣기에도 많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제 수준이야 찬 밥 더운 밥 그런 걸 가릴만한 처지도 못 되니 크게 상관할 바 아니었습니다. 덕분에 반 정도는 알아 듣고 반은 그냥 내 버리는.. 그런 시간이었고요, 존이 워낙 웃기는 터라 남들이 웃을 때 매번 함께 웃을 수 없는 것이 좀 안타까왔지만 -_-; 뭐... 여행 중 영어 공부 좀 해야겠다, 하는 결심이 어디 한 두 번이었어야 말이죠... 매번 여행 중 결심으로 끝나고 만다는. 

 

 

말 통하는 사람들끼리 앉아 각기 준비해 온 음식을 먹으며 한가로이 하루의 일정을 차분히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져 옵니다. 원래 본인들 사는 나라들이 다양한 만큼 정체를 알 수 없는 각 국의 고유 음식을 꺼내 차려 놓고 먹는 분들도 많아 코도 자연스레 벌렁거리게 되고요. 식당 가득 각 나라의 음식 냄새가 섞여 묘~한 분위기가 풍기는 포근한 공간입니다(짜장 냄새도 한 독특하겠죠?).

 

 

산장의 화장실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요즘 우리나라 유명 산을 찾으면 우리나라에도 등산로 초입이나 혹은 중간에도 화장실이 있지요. 그렇지만 이 곳처럼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되는 곳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우선 채광이 잘 되어 따로 조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고요, 바닥이며 변기며 어찌나 깔끔하던지... 화장실 고유의 냄새도 안 납니다. ^^; 물론 관리도 열심히 하겠지만 사용하는 사람들의 협조가 없다면 이렇게까지 유지하기가 불가능해 보이더군요. 우리나라도... 곧 이룰 수 있겠죠? (지난 일요일, 이 곳을 떠올리며 집 근처 산에 다녀왔는데 역시나 우울했다는 ^^;) 

 

 

아까 말씀드렸던 벙크룸의 모습입니다.

 

 

저희가 나란히 차지한 1층 침대고요, 키가 큰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서인지 저희에게는 발을 아무리 뻗어대도 여유있는 공간 배치가 좋았습니다. 이제 잘 시간이 다가오네요~ 내일을 기대하며 good night~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