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번 트램핑(Routeburn tramping / trekking)의 첫 날입니다.

오늘의 일정은 퀸스타운을 출발, 글레노키(Glenorchy)를 경유하여 루트번 쉘터(shelter)까지 차를 타고 간 후 하차, 하차 지점에서 루트번 트램핑을 시작, 다시 루트번 플랫 헛(Routeburn flats hut)을 경유하여 루트번 폴 헛(Routeburn falls hut)에 이르는 것으로 끝납니다(상기 지도상 빨강 동그라미 코스).

 

 

보시는 것처럼 퀸스타운에서 글레노키까지는 와카티푸 호수변을 따라 달립니다. 뉴질랜드에서 만난 대부분의 호수들은 제 상상 속의 그것보다 훨씬 크더군요. 시시각각 변하는 와카티푸 호수의 멋진 모습을 감상하시려면 차량 진행 방향의 왼쪽에 앉는 편이 좋습니다. 

 

 

 

 

 

아침에 숙소까지 픽업을 오고, 잠시 사무실에 들러 사무실에서 직접 승차하는 승객을 몇 더 태우고 출발한 우리 버스의 모습입니다. 와카티푸 호수변을 달리면서 view point에서는 원하는대로 차를 세워주는 덕에 놓칠 뻔했던 버스의 모습도 한 장 건졌네요.

 

뉴질랜드에서의 첫 트램핑이자 2박 3일짜리여서 아침에 조금 긴장했었는데 막상 버스에 올라타보니 저희의 연령이 평균보다 한참 아래더군요. 저희 아래로 보이는 팀은 몇 안 되어서 긴장이 많이 풀렸습니다. ^^; 버스 안 김원장의 모습이 보이는 둥 마는 둥 하네요.

 

 

차는 글레노키 홀리데이 파크(Glenorchy Holiday Park) 앞에 잠시 정차합니다. 뜻밖에 이 곳에서 내리는 승객들도 꽤 많고, 이 곳에서 올라타는 승객들도 좀 있습니다.

 

http://www.glenorchyinfocentre.co.nz/park_001/park_001.html

 

글레노키는 퀸스타운에서 차로 불과 45분 거리에 있는 한적하고 아름다운(그리고 무척 작은 ^^) 마을입니다. 여행객 중에는 퀸스타운의 번잡함을 피해 부러 글레노키에 묵는 사람도 있다고 하네요. 차는 이 곳에서 순수하게 루트번으로 향하는 승객들만을 태우고 루트번 쉘터를 향해 다시 출발합니다. 

 

버스는 글레노키를 뒤로 하고 얼마간 약간의 비포장 도로를 달려 저희를 루트번 쉘터 앞에 부려놓습니다. 짜잔~ 드디어 이번 여행에 있어 가장 기대했던 루트번 트램핑의 시작입니다. 승객들 모두 차에서 내리자마자 샌드플라이 대비용 약물을 꺼내 바르고 뿌리고 문지르고 법석입니다. 그 모습에 깜빡 잊고 있던 저도 스틱을 꺼내어 노출된 부위 여기저기에 발라봅니다. 자, 그럼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나요?

 

<이런 구조물만 보면 저는 왜 매디슨카운티의 다리가 생각날까요?>

 

 

트랙 초입의 안내판입니다. 중간 경유지로 삼은 루트번 플랫 헛까지는 1.5~2.5시간,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루트번 폴 헛까지는 총 2.5~4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버스에서 함께 내린 승객들이 우르르, 끼리끼리 옆을 스쳐 지나 갑니다. 길을 양보하는 저희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아무도 빼놓지 않습니다. 다들 약간씩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이네요.

 

헛을 예약해 두긴 했지만 먼저 도착한 사람이 먼저 맘에 드는 침대를 차지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일까요? 일단의 무리가 서둘러 사라지자 조금 걱정이 되어 오네요. 뒤를 돌아보니 60대로 보이는 늙은 노부부 한 쌍만이 저희 뒤를 따를 뿐입니다.

  

 

글레노키 쉘터에서부터 루트번 플랫 헛까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입니다. 입산 인원을 제한하는 산이라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텐데도 불구하고 길은 무척이나 관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저 다리만 해도 지난 여름, 파키스탄 파수의 잊혀지지 않는 그 다리(http://blog.daum.net/worldtravel/8250356)와 비교하면 너무 차이가 납니다. 물론 뉴질랜드에는 뉴질랜드만의 매력이, 파키스탄에는 파키스탄만의 매력이 있어 단순 비교는 불가능하지만요.  

 

 

 

트램핑을 시작한지 몇 분 되지도 않아 갑자기 요정들의 나라에 불쑥 깊이 들어와버린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사람을 갑자기 감동시켜도 되는건지, 원.

 

 

 

루트번 폴 헛 아래의 부시 라인(bush line / tree line)으로는 거의 지의류 세상입니다. 보도 듣도 못한 각종 이끼류와 고사리류가 온 세상을 집어 삼킬 듯 무성합니다(뉴질랜드 관광청의 수많은 로고들 역시 여기에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나 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인다더니 트램핑 전에는 몰랐는데 이후에는 어딜 보나 그런 그림들이 많네요). 아마도 상상하기 어려운 옛날 옛적부터 이 모습 그대로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깊은 감흥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제 저 고사리 숲 너머로 벨로시 렙터만 눈을 반짝거리면 완벽한 그림이 될 것 같은데요 -_-; 

 

 

 

루트번 트램핑에서 만나는 계곡의 물은 대부분 먹어도 안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 제 눈으로 들여다봐도 먹어도 전혀 아무 문제 없을 것처럼 맑고 투명해 보입니다. 실제로 다른 등반객들은 수시로 물을 떠다 벌컥벌컥 시원스레 마시는 모습이었습니다만 저희는 괜히 몸을 사리느라 - 만에 하나라도 탈이 나는 날에는 이후 일정이 엉망이 될까봐 ^^; - 헛에서 한 번씩 팔팔 끓여 먹었습니다. 소심모드 ^^;

 

 

처음엔 헛 침대 쟁탈전이 다소 걱정되기도 했지만 다가오는 풍경 하나하나가 그대로 저희를 눌러 앉힙니다. 그래, 어차피 오늘은 4시간만 걸어가면 끝 아니더냐... 세월아 네월아 즐기는 김원장의 모습입니다.

 

 

 

 

 

 

루트번 플랫 헛이 가까와지면서 무성한 요정들의 신비로운 세계는 그 빛을 잃어가고 주변이 환해져 옵니다. 루트번 밸리(Routeburn valley)가 그 기운을 여기까지 뻗친 것이죠. 오늘의 목적지인 루트번 폴 헛을 가려면 루트번 플랫 헛 조금 못 미쳐 등장하는 오르막길을 타야 하지만 저희는 예정대로 루트번 플랫 헛까지 갔다가 되짚어 돌아오는 코스를 택합니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루트번 플랫 헛 구경을 하겠어요? 루트번 플랫 헛은 이름 그대로 루트번 밸리 바닥에 위치해 있습니다. 시작점부터 루트번 플랫 헛까지 어찌나 취해 걸었는지 6.5Km를 주파하는데 최대 소요시간이라는 2시간 30분이 걸렸습니다. ^^;

 

 

 

 

속이 시원해지는 루트번 밸리의 모습입니다. 

 

 

 

루트번 트램핑을 하고 싶은데 예약이 늦어져 개인적으로도, 가이드 동반으로도 모두 할 수 없다면 이번엔 Day walk를 한 번 시도해 보세요. 글레노키 방면에서 day walk를 시도한다면 바로 이 곳, 루트번 플랫 헛까지 당일 왕복하실 수 있습니다.

 

버스에서 함께 내린 승객들 중 동양인은 저희 말고 오직 한 커플 더 있었는데요(생김새로는 다소 중국인스러웠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일본인 커플이더군요), 그와는 달리 day walker들은 단연코 동양인들이 대부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day walk로 이 곳을 찾아왔다면 오히려 이 곳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와 미리 예약을 안 한 제 자신을 마구 학대하게 될런지도 모르겠어요. -_-; 

 

 

퀸스타운 숙소에서 체크 아웃을 하기 전에 밥을 지어 점심 도시락을 싸왔답니다. 저희 뿐만 아니라 다른 팀들, 그리고 day walker들 역시 루트번 밸리가 훤히 눈 앞에 펼쳐진 이 곳에서 도시락을 까먹는 모습입니다. 식어버린 밥에 찬이라고는 달랑 구운 김 뿐이었지만 역시 맛있었습니다. ^^ 이 순간 잼 바른 토스트만 질겅질겅 먹고 있으면 아무래도 뭔가 허전할 듯. 누가 뭐래도 한국인은 밥심 아닙니까!

 

<어째, 제 목소리가 심히 혀짧게 들립니다 -_-;>

 

 

나뭇가지에 살짝 가려진 루트번 플랫 헛의 모습입니다. 이 곳엔 20개의 침상(bunk)이 있으며 15개의 캠프 사이트(campsite)가 있습니다. 예, 맞습니다. 이 곳에서는 캠핑도 가능합니다(캠핑 역시 예약을 미리 해두어야 가능합니다). 다만 캠핑을 하려면 저희의 기본 짐에 더해 텐트와 버너 등까지 짊어지고 내내 걸어 다녀야 하는데다가 다음 헛인 루트번 폴 헛에는 캠프 사이트가 없기 때문에 다음 캠프 사이트가 있는 맥켄지 헛(Mackenzie hut)까지 하루만에 이동하려면 몸에 무리가 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캠핑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즐거움이 전염되어 옵니다. 그들에겐 제게 없는 생동감이 마구 묻어나는 것 같아요. 젊음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군요 ^^;
 

 

 

 

어느새 김원장이 식사의 흔적을 싸악, 치우고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네요(이 코스에는 쓰레기통이 없기 때문에 트램핑 중 발생하는 모든 쓰레기는 본인이 끝까지 운반하여야 합니다).

 

점심도 든든히 먹었겠다, 이제 루트번 폴 헛을 향해 다시 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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