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가파르밧...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에베레스트보다도 오히려 오르기 힘든 거친 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베이스캠프에 서서 바라보니 과연 저 꼭대기를 어떻게들 기어 올라가나 싶더군요. 거 왜, 등반대원들이 쓴 등정기를 보면 하나같이 매우 드라마틱하지 않습니까? 여정 내내 삶과 죽음이 너무나도 가까이에 붙어 있지요. 실제 낭가파르밧을 바로 눈 앞에 두고 그들의 등정기를 떠올리자니 그들의 거친 행로가 절로 오버래핑이 되면서 마음 한 편이 서늘해져옵니다. 

 

그런데...

 

등정대들은 저길 대체 왜 올라가는 걸까요? 진짜 진짜 고생도 그런 고생이 없을 것 같은데... (크으~ 이 뱁새의 생각이라니 -_-;)

 

 

베이스캠프, 그 이름답게 베이스로서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시야도 좋고, 초지도 넓으면서 지대도 평평하고, 음용이 가능한 맑고 차가운 물도 흐르고, 분위기 아늑하고...

 

당일치기로 베이스캠프까지 올랐다가 내려가는 팀은 저희 팀 말고도 앞선 두 팀이 더 있었지만, 저희처럼 오늘 하룻밤 베이스캠프에서 머무는 팀은 오직 저희 팀뿐이네요. 몇 안 되는 팀이지만 함께 있을 때는 서로 이야기도 나누고 망고니, 정어리 통조림, 유럽산 치즈에 사탕까지 먹을 것도 나누면서 즐겼지만, 촉박한 일정상 다시 하산길을 재촉해야 하는 그들과 마지막 배웅의 손을 흔들고 나니, 이제는 저희 곁에 고요함만이 남았습니다. 가끔 높은 음의 마못 울음소리만이 그 적막을 깨곤 하네요. 

 

 

본격적인 우리들만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김원장과 당나귀 아저씨가 힘을 합쳐 오늘 밤 저희 부부가 묵을 텐트를 설치하고 있습니다. 저도 옆에서 괜히 부산한 척, 이리저리 폴대를 들고 뛰어댕겨 봅니다.  

 

드디어 텐트 완성! 팔자 늘어진 김원장이 보입니다. 낭가파르밧 아래에서 아무나 오수를 즐길 순 없으니까요 ^^;

 

김원장이 텐트 하나 쳐두고 세상만사 다 끝낸 사람처럼 편안히 누워서 자신만의 시간을 누리는 동안, 근처 큰 바위 뒤에서 파키스탄 두 남자는 손놀림이 더욱 바빠집니다. 일단 저희가 묵을 텐트 설치부터 끝내주곤, 당신들이 묵을 텐트를 하나 더 설치하고요, 이어서 근처에 흩어져있는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아 모아 불을 지피기 시작합니다. 대체 마지막으로 텐트를 쳐본 것도 언제였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하물며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때고 있으려니... 이거이거, 캠핑 분위기 불끈 사는데요? ^^ 저도 나뭇가지를 몇 개 주어들고 그들만의 공간인 바위 뒤로 에헴, 하면서 고개를 쏘옥 내밀어 봅니다.

 

"제가 뭐 도와드릴 것 없어요?"

 

제가 나타나니 오히려 긴장하는군요 ^^;

 

 

 

이미 이 곳을 스쳐 지나간 많은 선배 트레커들에게 간이 부엌으로 애용되었을 것만 같은 자리네요. 주변에 널부러진 검게 그을린 돌들이 그간의 역사를 온 몸으로 말해줍니다. 

 

저는 이들이 이렇게 불까지 지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습니다. 처음 올라올 때 짐에 버너 같은 것이 안 보여서 그냥 하루 정도의 짧은 일정은 찬 음식으로 해결하나 보다, 상상했었죠. 어쨌거나 이들 덕분에 낭가파르밧 빙하수로 끓인 파키스탄식 밀크티부터 한 잔 얻어 마십니다. 안 그래도 맛난 이 밀크티가 오늘은 특히나 따뜻하고 특히나 달콤하네요. 

 

 

뜨거운 물이 없었다면 찬물에 40분은 걸려야 했을 즉석 비빔밥이, 뜨거운 물 덕분에 10분 만에 완성됩니다. 낭가파르밧에서 고추장까지 팍팍 뿌려 비벼 먹는 쇠고기 비빔밥 되겠습니다 ^^ 호강하죠?

 

집도 만들었겠다, 배도 부르겠다, 이제는 온전히 우리에게 주어진 귀한 시간을 즐기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를 닦으러 빙하천으로 내려왔습니다. 물은 정말이지 너무나 차가와서 손으로 떠올릴 때도 그렇지만 입에 물을 물고 몇 번 오물거리기가 괴로울 정도입니다. 살짝 최상류가 어디일까 거슬러 올라가보니 의외로 작은 웅덩이에서 샘이 퐁퐁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이 웅덩이를 파들어가면 낭가파르밧 어디메의 빙하 계곡과 연결되어 있겠지요.

 

아까 다른 팀의 가이드가 해두었던 것이 기억나서 우리도 가져온 살구니, 망고 따위의 과일들과 물통을 비닐에 잘 넣어 차가운 물에 퐁당 넣어두고 매듭 부분에 돌을 잘 괴어둡니다. 텐트와 제법 멀리 떨어진 자연 냉장고이긴 하지만 조만간 인공 냉장고 부럽지 않게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과일을 먹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함께요(그런데 생각보다 물살이 꽤나 센 편이라 몇 번이나 과일들이 제 자리에 잘 있는지, 떠내려가지는 않았는지 왔다갔다 해야만 했다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마찬가지로 자유시간을 한껏 누리고 있는 우리 당나귀입니다. 이미 사람에게 길들여진터라 우리가 웬만큼 가까이가도 좀처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눈에 안 보이는 선을 우리가 침범하면, 쳐다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도 얼른 몇 걸음 뒤로 물러섭니다. 그 행동이 예전 케냐에서 봤던 얼룩말떼 생각을 다시 나게 하네요. 

 

 

 

구름이 멋지게 피어오릅니다. 누가 뭘하라 시키는 것도 없고, 특별히 해야할 그 무엇도 없고... 나란히 누워 낭가파르밧 너머로 해가 그 자취를 서서히 감추어가는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봅니다. 

 

 

 

낭가파르밧이 워낙 높아서,

저무는 햇살이 산을 넘지 못합니다.

하늘은 절로 둘로 갈리우고...

 

 

 

ㅋㅋ 그러나 꼭 이런 장엄한 순간에, 분위기를 깨는 인간이 하나 있네요. -_-; 감히 제 발 사이에 낭가파르밧을 담았습니다.

 

 

이렇게 낭가파르밧과 온전히 시간을 함께 보내다보니 또 다시 지구가 돌고 있구나를 느끼게 됩니다. 지구는 하루 24시간, 1년 365일, 한 순간도 빠짐없이 돌고 있을텐데, 사실 그걸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살진 않죠... 김원장이 이번 여행을 하면서 간단한 일기를 썼는데 그 중 하루치를 소개해 볼까요?

 

"무엇을 위해 이리 분주한가?"

 

단 한 문장 짜리 일기랍니다. 날짜는 라카포시 트레킹 전날이네요. 아마도 라카포시 트레킹을 준비하면서 본의 아니게 부산해진 마음에 대한 자문인가 봅니다. 평소의 분주한 삶을 <놓으려> 온 여행인데도, 스스로 다시 분주함을 <움켜쥔> 몸과 마음을 느끼고 질책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문장이네요.

 

저도 지금 다시 가만히 자문해 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분주하게 살고 있는지...

 

 

저무는 태양이 마지막 힘을 다해 내뿜는 레이저 광선은 결국 대세를 이기지 못하고 점차 그 빛을 잃어갑니다. 해가 저물어가는데는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만 같더니, 해가 지자마자 어둠이 놀랄만큼 빠르게 그 빈 자리를 찾아 들었습니다. 그렇게 낭가파르밧에 어느새 밤이 내렸습니다.

 

Sadiq과 당나귀 주인 아저씨가 우리를 위해 모닥불을 만들어 피워 주셨습니다. 모두들 훨훨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말없이 각자의 생각에 잠겨있었죠. 단순히 붉다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많은 색이 어우러져가며 탄생과 소멸을 수없이 반복하던 불꽃, 잘 마른 나뭇가지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타면서 만들어내는 자작거리는 소리, 그리고 작게 쪼개져 하늘 위로 날아가다 결국 그 빛이 사그러지고 마는 불똥들...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자유자재로 흘러가는 가운데 어느 순간 조로아스터 교인들이 숭배했다는 꺼지지 않는 불에까지 생각이 미칩니다(어디에선가 그 지역이 유전 지대라서 불이 수이 안 꺼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 과연 이렇게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불에게는 숭배할 만큼 매력적인 면이 분명 있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요? 여느 캠프 화이어장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 당연히 제가 첫 주자였죠. 무얼 부를까 하다가 왠지 이럴 때면 꼭 불러야할 것 같은 <아리랑>을 먼저 한 곡조 뽑았습니다. 아리랑이, 이런 자리에서 부르면, 바이브레이션이 절로 들어가죠 ^^; 그 다음엔 우리 가이드인 Sadiq이 느릿느릿한 파키스탄 곡으로 한 곡 받았습니다. 다음엔 김원장 차례였는데... 선곡을 하느라 나름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이더니만... 

 

<들장미 소녀 캔디>를 부르더군요 -_-;

 

어쨌거나 캔디는 비록 내용은 슬플지언정 빠른 곡이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살아납니다(아무리 명곡이지만 김원장 혼자 캔디 노래를 완벽히 부르긴 다소 어려운 일이죠. 결국 뒤로 갈수록 저와 합창이 됩니다).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살리고살리고~ 순서대로하면 다음은 우리 당나귀 주인 아저씨셨는데.. 이 분, 아주 수줍음을 타십니다. 몇 번이나 우리가 권하고, 보다 못한 Sadiq이 이 노래를 불러봐라 추천까지 해 주는 것 같은데(빠르게 오가는 파키스탄어와 분위기로 미루어보아 나는 전통 노래를 모르니 부르지 않겠다, 그럼 유명한 펀잡 지방 유행가라도 불러라, 그건 한국인들이 더 모르지 않겠느냐, 뭐 어떠냐, 나도 파키스탄 노래를 부르지 않았냐, 뭐 그런 말들을 주고 받는 것 같습니다 ^^) 너무나 부끄러워하시며 손만 휘휘 내저으실 뿐입니다. 결국 아저씨 대신 Sadiq이 빠른 노래로 한 곡 더 부르고, 다시 제가 또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가사가 기억 안 나는 부분부분 제 맘대로 개사해 가며(이래서 노래방이 없어져야 할 듯 -_-;) 부르고, 또 Sadiq이 부르고 김원장이 부르고, 당나귀 아저씨는 또 사양하고...

 

알고보니 Sadiq은 상당히 노래를 잘하더군요. 비록 가사는 몰라도 노래를 잘 부르고 못 부르는 건 알 수 있잖아요? 노래 안 시켰음 무척 서운해할 뻔 했다니까요 ^^;

 

한참 돌아가며 베이스캠프 창공을 울리며 노래를 부르며 놀다 이제 그만 각자의 텐트로 돌아가 자기로 했습니다(끝내 당나귀 아저씨의 노래는 단 한 곡도 못 들었다지 뭡니까! 김원장 말이 태어나서 남들 앞에서 단 한 번도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지 않았겠냐고 합니다). 모닥불을 끄고 나니 순식간에 온기는 사라지고 차갑고 깊은 어둠 속에 갇혀 버리더군요. 어느새 이렇게까지 주변이 깜깜해진 걸까요? 

 

노래를 듣고 부르면서 고개를 한 번씩 젖힐 때마다 하늘의 별들도 그만큼 하나씩 더 생겨나던 모습이 생각나서 주변의 빛이 완전히 사라진 지금, 밤 하늘을 다시 올려다 보았습니다. 

 

아! 이런 별밭이라니... 잘잘한 별들이 까만 하늘에 한가득입니다. 하늘을 가르는 은하수도 오랜만이고 간간히 떨어지는 별똥별은 소원 빌기에 안성맞춤이네요.

 

행복합니다.   

 

어둠을 헤짚어 텐트 속으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와보니 무수한 별빛마저 투과되지 않는 이 안은 완전 칠흑같은 어둠 뿐입니다. 제 얼굴 가까이 손을 들어 올려 보지만 전혀 안 보이네요. 이렇게 완벽한 어둠이라니.

 

오늘밤 쉽사리 잠이 올 것 같지 않습니다. 

 

 

"...별빛 아래서 밤을 새워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잠들고 난 시간이면 또 하나의 신비로운 세계가 고독과 정적 속에서 눈을 뜬다는 사실을. 그럴 땐 샘물은 더 맑은 소리로 노래하고, 작은 불꽃들은 연못 위에서 춤추며 반짝인다. 산의 모든 정경들이 자유로이 오가고, 대지 속에서는 나무가 자라고 풀잎들이 돋아나는 소리 같은,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들이 들려온다..."

 

알퐁스 도데의 <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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