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카포시 베이스캠프인 타가파리가 해발 3,261m, 우리 숙소인 디란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미나핀이 해발 2,012m니까 계산은 간단합니다. 오늘 하루, 사뿐히 1,249m만 즈려 밟아 올라가주면 됩니다. -_-;

 

세.계.적.인 가이드북 Lonely Planet에서 상기 코스에 대해 2박 3일 일정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지난 밤 내내 가이드를 데려가네 마네, 1박 2일로 하네 마네, 하다가, 결국 예정대로 -_-; 가이드 없이 무박 당일치기를 하기로 합니다. 가이드북에서 2박 3일을 추천하지 않았어도, 방명록에서 가이드가 없어 길을 잘못 들었다 죽었다 살아났다는 글만 읽지 않았어도 마음이 덜 흔들렸을 텐데요.

 

지금 와 생각하면 마음이 더 흔들렸어야 했던 건 아닌지 다소 의심스럽기도 합니다만. -_-;

 

어쨌거나 타가파리를 향한 김원장의 마음은 변화가 없습니다. 일이 어찌 될 지 모르니 꼭두새벽부터 출발하기로 합니다. 5시에 알람을 맞춰놓고 밥을 지어 즉석 김치국에 말아서 한 그릇 훌훌 먹습니다. 저는 오늘의 산행에 다소 긴장한 탓에 밥맛이 영 없음을 느낍니다. 제가 밥맛을 잃다니.. 오늘의 산행이 제게 얼마나 큰 사태인지를 전적으로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출발 전 확인해 보니 숙소에서 오늘 출발하는 팀은 저희 포함 단 두 팀 뿐입니다. 

 

오전 5시 45분, 드디어 대장정을 나섭니다.

 

 

출발 후 약 1.5 Km 정도는 평탄하다 볼 수 있는 길을 걷습니다. 이 길은 어렵지 않습니다. 어제 미리 워밍업을 하기도 한 코스니까요. 제가 걷는 길의 왼편으로는 산이, 오른편으로는 수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평탄한 길은 미나핀 빙하에서 흘러내려오는 빙하천에 가로 놓여진 다리를 종점으로 하여 본격적인 오르막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아직 새벽이라서인지 어제 오후에 섰을 때보다 훨씬 수량이 적습니다. 빙하천은 기온이 떨어지는 밤 사이 상류가 다시 얼기 때문에 수량이 줄고, 기온이 올라가는 한 낮에는 빙하가 다시 녹으면서 수량이 늡니다.

 

어제는 멈춰섰던 다리 앞, 이제 다시 이 다리를 건너려니 마치 루비콘강을 건너는 듯 합니다. 다리 건너편에 과연 올라갈 수 있을까 싶은 오르막길이 더욱 저를 그리 소심하게 만듭니다.

 

어쨌거나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길은 장장 3 Km에 달하는, 엄청난 높이의 지그재그 오르막입니다. 얼마간 걷다 뒤돌아보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고만큼 바닥과 떨어져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저 아래 다리 근처로 저희보다 늦게 출발한 두 번째 팀이 오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아버지에 딸, 아들로 보이는 백인들로 각자 커다란 배낭을 하나씩 짊어지고 있습니다. 가이드도 고용했는지 그 세 명 앞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길을 안내하고 있는 현지인도 보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 당나귀를 끌고 목초지로 올라오는 동네 아이들이 연이어 몇 더 보입니다.

 

아래 사진은 그 길을 오르다 중간쯤 지쳐 주저앉아 쉬고 있는 제 모습입니다. 벌써 얼굴이 벌개진 것이 컨디션이 썩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_-; 이 오르막길에서 디란봉이 아주 잘 보이는데, 이 길을 오르다보면 사진이고 뭐고 다 귀찮아집니다. 문제는 이 길이 전체 코스에 있어 지극히 초반이라는거죠.

 

 

처음에는 그들과의 거리가 상당했지만 결국 이 긴 오르막이 채 끝나기 전에 두 번째 팀이 우리를 추월합니다. 가까이서 얼굴을 맞대니 자식들 나이가 20하고도 훌쩍 넘어보이는 것이 아버지 연세가 상당할텐데, 참 몸이 가벼운 팀입니다. 저런 배낭까지 짊어지고도...

 

헬로우, 인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저희를 휘리릭 앞서갑니다. 저 팀의 가이드를 공짜로 이용하려면 그들 뒤를 바싹 따라가야 할텐데요 ^^;

 

물론 진작 마을의 어린 목동들은 저희를 지나쳐간지 오래입니다. 이 즈음 김원장은 벌써 현지인화되어 파키스탄인들이 우리에게 던지곤 하는 질문을 먼저 선수치기도 합니다.

 

"앗살람알레이쿰, where are you going?"

 

방이다스(Bang-i-das) 혹은 하파쿤(Hapakun), 대부분 이 두 곳으로 간다고들 하네요. 목동의 목적은 하나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동물들을 배불리 먹이기 ^^

 

어쨌거나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급경사 오르막이 마침내 끝났습니다. 아래 사진은 방이다스에 올라 기쁨에 겨워 엉덩이 훌라춤을 추고 있는 ^^; 제 뒷모습입니다(저럴 기운이 남아있었군요). 타가파리까지 가는 길은 전반적으로 오르막길임이 틀림없지만, 방금 지나온 급경사에 비하면 방이다스에서 하파쿤에 이르는 길은 거의 평지처럼 여겨질 정도로 완만한 경사입니다.

 

 

방이다스와 하파쿤 사이 중간 즈음에 이르자 앞서 간 백인팀이 쉬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때가 기회다, 우리가 앞서자, 밑도 끝도 없는 묘한 경쟁심에 이번엔 아는 척도 안 하고 휘리릭 지나칩니다(알고보니 이들 팀은 오늘의 목적지가 하파쿤이었습니다. 즉 적어도 1박 2일, 아니면 가이드북에서 추천하듯 2박 3일의 일정으로 올라온 것이죠). 그리고는 순식간에 길을 잃어버립니다 -_-;

 

처음엔 길을 잃은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저희 앞에 폭포가 나타났습니다. 엥? 폭포?

 

방명록에 나름 자세한 여행자의 손으로 그려진 약도에 의하면, 폭포로 향하는 길로 절대 접어들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기 저 낭떠러지에서 물 마구 떨어져대는 저 놈이 폭포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입까?   

 

어디서부터 길이 어긋난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방이다스 쪽으로 되돌아가자니 막막합니다. 체력이 충분하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제 몸은 한 발짝이라도 덜 걷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되돌아가는 대신 과감하게 길을 가로질러 본래의 루트를 찾아보기로 합니다. 길이 없는 길을 만들어 걷기로 한 거죠.

 

방향만 잡고 걷다보니 개울도 만나고 당나귀 똥 무더기도 만나고(이건 반가운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 곳엔 목동들이 여러 번 지나친 적이 있다는 소리니까요) 질퍽한 진창도 만납니다. 그러다 문득 어디선가 저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옵니다.

 

"이봐요~ 거기 길 아니여요. 이 쪽으로 건너와요~"

 

드디어 저희가 바른 길을 찾아낸 겁니다.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골짜기 건너편으로 3~4명의 현지인들이 당나귀 한 마리를 끌고 오는 것이 보입니다. 그들이 건너편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죠.

 

저희는 그들의 부름을 받아, 그 쪽으로 건너가기를 시도합니다. 문제는 그 골짜기를 가로 질러 건너가는 길이 가시덤불 정글이라는 데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온 살을 옷으로 대충 다 가리고, 단벌 옷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긁히는 것도 무시하고 덤불을 뚫고 헤쳐 나온 결과, 다시 본 궤도에 재진입합니다.

 

이들은 미나핀에 사는 총각들이었습니다.

 

"어디 가는 길이어요?" - 또 선수치는 김원장

"타가파리 지나서 디란봉까지 가요"

"왜요?"

"놀러요"

"거길 놀러가요?" - 타가파리에서 디란봉으로 가려면 빙하를 건너가야 하거든요(이 쯤에서 방희종님의 재미난 ^^; 미나핀 빙하 횡단 이야기를 보시죠. http://howasia.net/travelstory/pakistan/rakaposhi/rakaposhi.htm)

"예. 우리는 차비가 없어서 마을 밖으로 못 놀러다녀요. 대신 1년에 한 번씩 이렇게 산에 올라가서 며칠 자고 가요"

 

차비가 없어서 마을 밖으로 못 놀러간다는 말을 들으니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저는 차비 뿐만이 아니라 비행기삯까지 지불하면서까지 여기 놀러왔는데... 부자 나라에 태어난 덕에 당연시 여기는, 그러나 그렇지 못한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에 처음부터 꿈을 원천봉쇄시켜야하는, 아니, 꿈조차 쉽게 꾸기 어려운, 그 둘 사이의 갭이 새삼 너무도 많이 벌어져있음을 느낍니다.  

 

어쨌거나 이들 덕분에 이제는 당분간 길을 잃을 염려를 덜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페이스를 따라갈 수만 있다면요 ^^; 이들과 함께 - 사실은 거의 졸졸 따라 - 하파쿤에 올랐습니다. 놀랍게도 하파쿤은 넓직한 계단식 목초지가 펼쳐진 곳입니다.

 

 

하파쿤을 지나면 미끄러지는 자갈길을 걸어올라야 합니다. 산 허리에 그냥 한 사람 다니기 딱 좋을만큼만 길이 나있는 터라 산 머리쪽으로 넘어지는 건 상관이 없는데, 산 발쪽으로 넘어지는 건 앞으로의 인생이 매우 곤란해질만한 길입니다. 하파쿤부터 타가파리까지 다시 길고 긴 오르막입니다. 하파쿤에서 좀 오래 쉬었다 갔으면 하는 소망이 있거늘, 총각들은 기운도 좋네요. -_-;

 

 

하파쿤을 지나자 시야가 확 넓어지면서 반대로 체감온도가 뚝 떨어집니다. 아마도 고도가 조금씩이나마 계속 높아지는데다 엄폐물이 상대적으로 적어지면서 찬 바람이 직접 불어대는 탓인 것 같습니다. 자칫 발을 잘 못 디디면 아래로 한참을 굴러갈 것 같은, 제가 싫어하는 스타일의 길을 길게, 아주 길게 왼편으로 휘돌아 오르면, 드디어 멋진 산이 어서 올라오라 손짓 합니다. 짜식, 여기 숨어 있었네..

 

 

 

고도가 높아져서였는지, 아니면 체력에의 문제였는지 점점 걷다가 쉬는 시간이 자주 찾아옵니다. 헐떡헐떡거리다가 김원장이 사진을 찍겠다고 하니 얼른 V를 내밉니다. 저 와중에 저런 걸 보면 어쩜 체력의 문제는 아니었던 걸까요... 이 죽일 놈의 체력.

 

 

이름모를 들꽃들은 차가운 바람에 몸을 최대한 낮게 숙였습니다. 바닥에 잘잘하게 붙어 작은 꽃들을 피워내고 있었는데, 이쁘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조 놈들, 참 질기다는 생각도 합니다.

 

 

온 길을 되돌아보면,

 

 

제가 얼마나 걸어온건지 가늠조차 잘 안 되고,

 

딛고 선 바닥을 내려다보니, 

 

 

꽃들이 앞다투어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캬~ 좋습니다. 그쵸?

 

 

라카포시 베이스캠프 트레킹이 명성을 얻는 이유로는 카리마바드에서 지리적으로 가깝고, 대중교통편으로도 접근이 가능하며, 트레킹 코스가 아주 길지도 않고, -_-; 시작점의 인프라가 훌륭하다는 둥의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이 지점에서 바라보는 미나핀 빙하의 전경이 너무도 멋지다는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빙하가 하얗다고요? 아닙니다. 적어도 이 곳 라카포시의 미나핀 빙하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녹색, 검은색, 보라색, 회색, 붉고도 푸른 색,... 여러가지 색을 띄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저를 삼킬 듯 둘러싼 빙하에 압도되어 한참을 정신 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아, 여기가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었지, 하고 다시 길을 떠납니다. 다행히 이 곳에서 베이스캠프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너무나 먼 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베이스캠프에 이르는 마지막 구간 10분이, 제가 보기엔 완전히 거의 절벽이나 다름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김원장은 저 길이 뭐가 무섭냐, 했지만, 저로서는 도저히 때려 죽여도 못 가는 길처럼 보였습니다. 다리에 힘이 남아있는 것도 아닌데 자칫 잘못해서 미끄러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저 차가운 빙하의, 깊이를 알 수 없는 크레바스 속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습니다.

 

결국 몇 분의 실랑이 끝에 김원장은 저를 두고 혼자 베이스캠프에 가기로 합니다. 제게 남은 물이 든 가방을 넘기고, 사진기 하나 달랑 차더니 다녀오겠답니다.

 

김원장이 그 길을 걷는 모습을 차마 보지도 못 하고, 조금 되돌아 내려와 게 중 커다란 나무 아래 몸을 잔뜩 웅크려 숨깁니다. 걸을 땐 몰랐는데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뭘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춥습니다. 뭔 바람이 그리도 세고 찬지.. 그렇지만 김원장이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나 춥다고 다음 엄폐물을 찾으러 가기도 그렇고(뭐, 엄폐물 삼을 만한게 보이지도 않았지만), 더군다나 당장은 내려갈 기운도 없습니다. 달달달 떨면서 김원장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김원장이 안 옵니다. 혹시 그 길을 가다 김원장이 자칫 발을 헛디뎌 떨어지기라도 했으면? 여기서 헬기를 부르려면 다시 미나핀까지 내려가야할까? 이슬라마바드 병원 시설은 괜찮을까? 한국까지 가장 빨리 돌아가는 방법은 뭘까? 아니, 김원장이 다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더 심한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해야 하나... 파키스탄에 우리 대사관이 있던가... 달걀을 가지고 시장에 가면서 오만가지 즐거운 상상을 하다 결국 달걀을 깨뜨리고 말 듯, 혼자 갖은 불길한 상상이란 상상은 다 하고 앉아있는데 김원장이 저를 부릅니다. 야!  

 

알고보니 그리 오래 걸린 것도 아닌데(하나 뿐인 손목시계를 김원장이 차고 있던터라 제 시간 감각이 엉망이 되었더군요) 혼자 추운 곳에 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으려니 그 시간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던 것 뿐입니다. ㅋㅋ

 

김원장이 제게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저 보여준다고 베이스캠프 사진도 찍고, 거의 다 먹어버린 물도 큰 걸로 한 병 새로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걸 사서 들고 그 위험한 길을 지나왔어?"

"아~ 거참, 안 위험한 길이라니까 그러네.. 현지인들은 당나귀도 끌고 지나다니는 길이야"

 

김원장의 작품이자 저는 끝내 못 가 본, 라카포시 베이스캠프 사진입니다. 

 

 

김원장과 반가운 도킹을 한 후, 이 추운 지점을 얼른 뜨기로 합니다. 돌아온 김원장의 손목 시계를 통해 현재 시각을 확인해 보니 오전 11시 30분입니다. 이제 한 낮. 게다가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따뜻해지리라는 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서둘러 다시 베이스캠프와 빙하를 뒤로 하고 이제는 즐거운 하산길에 접어듭니다(흑, 즐거울 줄 알았습니다).

 

내려오다 김원장이 배고프다 합니다. 하긴 아침식사 이후로 변변한 것 하나 먹은 바 없으니 배가 고플만 하죠. 숙소에서 구운 짜파티에 카리마바드에서 사 온 살구잼을 듬뿍 바른, 우리식으로 마련한 도시락도 있었지만 일단 비상식량으로 마련해 온 초코바부터 하나 꺼내 먹입니다.  

 

 

 

김원장 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스니커즈랍니다. ^^

 

누군가 높은 산에 갔다 내려올라치면 자신이 걸어온 길이 생각보다 긴 것에 대해 놀라기 쉽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딱 맞습니다. 내가 대체 이 길을 언제 걸어왔을까 싶게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없습니다.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하다, 장해!

 

타카파리에서 하파쿤으로 내려가는 길은, 올라갈 때부터 내려갈 길을 걱정할 만큼 미끄러운 길이었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랬죠. 결국 네 발을 다 써서 -_-; 엉덩이로 미끄럼 타듯 한 두 구간을 내려와야 했습니다. 혼자 쇼를 하면서 내려오고 있는 제 모습을 김원장이 다소 한심하다는 듯 바라봅니다. 아, 진짜, 저는 이런 길이 너무 싫어요. 흑.

 

이 위는 너무 춥다. 하파쿤까지 가서 길게 푹 쉬자, 하면서 내려왔지만,

막상 하파쿤에 다다르니 이번엔 너무 더웠습니다. 이게 대체 뭔 조화랍니까?

 

결국 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아래를 향해 몸을 옮기려니 이제는 상체가 하체를 질질 끌며 내려오는 형국입니다. 어허, 몸은 정녕 붙어있는 한 몸뚱아리이거늘, 어찌 이리 따로 노는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고 서 있습니다. 방이다스 부근입니다. 이제 남아있는 구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은 벌써 먼 길을 쓩~ 날아 숙소의 편안한 침대 위에 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다리로 빨리 그 곳까지 가기엔 좀 무리인 상태입니다. 아니 이미 꽤나 무리해버린 상태랍니다.

 

 

아스팔과 그의 당나귀입니다. 아스팔은 오르는 길에 만나 친해진 미나핀 마을 아저씨입니다. 아스팔과는 처음 방이다스 부근에서 잠시 함께 쉬면서 만났다가, 헤어져 먼저 길을 올랐는데 그 후 길을 잃어 헤맸다가 다시 제대로 된 길 위로 오른 뒤에 다시 만나 하파쿤까지 총각들과 모두 함께 올랐는데요, 아스팔의 목적지가 바로 하파쿤이기도 했습니다. 가이드가 없는 우리에게 얼른 저 총각 일행을 따라가라며 방향을 일러주고, 본인은 하파쿤에서 기다리겠다, 하더니, 우리가 하산길에 하파쿤이 시야에 들어올 무렵부터 손을 흔들어 인사해 주고, 하파쿤에 다다르자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돌아왔다며 우리에게 반가운 웃음과 함께 엄지손가락을 세워 들어 보여줍니다.

 

이미 아스팔은 당나귀를 충분히 먹이고, 그 사이 하파쿤 근처의 나무들을 해 장작을 만들어 두고 있었습니다. 이후 하산길은 또 아스팔과 저희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내려왔는데요, 당연히 아스팔이 우리보다 훨씬 빨라야했지만, 당나귀란 놈이 워낙 말을 잘 듣지 않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바람에 계속 서로 스치게 되었습니다. 물론 막판 하산길에는 아스팔과 당나귀가 어느 순간 코딱지만하게 보일 정도로 무서운 속도로 사라지긴 했지만요.

 

아스팔에게 묻습니다.

 

"그 땔감은 다 어디에 써요? 짜파티 만들때 쓰나요?"

"아니, 비스켓"

 

단호하게 부인하는 아스팔. (적어도 제겐) 짜파티나 비스켓이나... ㅋㅋ 까칠하긴 ^^;

 

 

고지가 바로 저긴데... 이제야 우리가 돌아갈 미나핀 마을이, 끝없이 긴 경사 심한 내리막을 지나, 다리를 건너, 오른편 산을 돌아 수로를 따라 1.5 Km를 더 걸으면, 그래, 바로 그 곳이 우리가 몸을 편히 누일 수 있는 곳인데...

 

몸은 천근만근이 된지 오랩니다. 거의 두 발을 질질 끌며, 완전히 지친 상태로, 비틀거리며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갑니다. 저는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입니다.

 

'여기서 미끄러지면 끝장이야. 다리에 조금만 더 힘을 줘 봐. 그래, 그렇게 한 발짝 더...'

'아니, 근데 내가 대체 이 길을 언제 지나갔던거야? 내가 왔던 길 맞아? 왜 이리 길어...'

'숙소에 돌아가면 환타를 꼭! 꼭! 꼭! 먹어야지... ' -> 오렌지색 환타병이 눈 앞에서 어른어른합디다.

 

 

저와 약간 떨어져 뒤에서 내려오던 김원장도 다리에 힘이 빠져 계속 죽죽 미끄러지며 마지막 급경사의 하산길을 내려왔다고 합니다(제가 하나 뿐인 스틱을 빼앗은 탓에 ^^). 서로 신경 써 줄 형편이 안 될 만큼 완전 서서 뻗어있는 상태였죠 ^^; 

 

 

저기 보이는 다리를 건너는 것으로 내리막길은 모두 끝나고, 이제는 평탄한 길만 남았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굴러떨어져도 큰 부상을 당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만나는 동네 아이들은 빈 물병을 달라고 졸라댑니다. 어디에 쓸런지 도무지 짐작이 안 가지만 아마도 페트병을 팔면 돈이라도 좀 되는 모양입니다. 있던 빈 병을 다 주고, 남아있는 물까지 억지로 다 들이킨 후 최후의 한 병까지 넘겨 줍니다.

 

숙소에 돌아오니 그 크지도 않은 골목이 난리가 났습니다. 빽빽히 들어찬 지프들에 자세히 살펴보니 웬 경찰차까지? 처음에는 대규모 등반대가 우리 숙소에 왔나 했는데, 경찰차까지 출동한 것을 보니 그게 아닌 것도 같습니다. 숙소 안마당에는 척 보기에도 깨끗한 옷을 차려 입은 남성들이 바글바글하고, 숙소 밖으로는 마을 사람들이 온통 몰려와 까치발을 하고 안마당을 들여다보느라 정신 없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면서도 다 왔다는 안도감에 젖어, 가슴에는 꽃을 꽂고 호위를 받으며 서 있는 입구의 한 남성에게 살짝 인사를 건넵니다. 아저씨도 젠틀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줍니다. 오호~ 잘 생겼네 ^^;

 

만세! 드디어 숙소에 IN! 했습니다. 오후 4시 30분이 채 안 된 시각입니다. 총 11시간 정도 걸렸네요. 방까지도 차마 못 들어가고 로비에 털썩~ 주저 앉습니다.

 

"Let me have a fanta please!"

 

환타를 아무리 외쳐봐도 그 친절한 숙소 직원들은 뒷마당에서 연신 음식 찌꺼기만 남은 빈 그릇들을 가져 오느라 정신이 없습니다(그래도 지나가는 여러 명한테 환타를 수없이 외친 탓에 결국 미지근하나마 두 병이나 마셨습니다. "오, 미안해요. 냉장고 안의 환타는 다 떨어졌어요!").

 

아침에 우리에게 스틱을 빌려준 직원도 우리 앞을 바삐 지나가길래 얼른 붙들고 물어봅니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래요?"

"펀잡(Punjab)주 주지사가 여길 왔어요. 저기 저 꽃을 단 남자가 주지사죠"

 

오메.. 아까 그 분이 높으신 분이였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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