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재판이 끝난 후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혼잣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맞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구는 돕니다. 그래서 아득히 안 올 것만 같았던 아침도 당연히 또 왔습니다.

 

해가 뜨자 승객들이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희망에 찬 목소리로) 소스트에서 차 왔어요?"

"아뇨. 그냥 걸어가려고요"

 

흑. 좌절 -_-;

 

그렇습니다. 짐이 아주 많아 운신할 수 없는 보따리 상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각자의 짐을 챙겨 산사태 지점을 넘어 소스트까지 걷기로 한 모양입니다. 우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 몇 번으로 몸에게 신호를 보낸 뒤, 우리도 짐을 부려 멥니다.

 

 

김원장도 준비를 마쳤습니다. 자못 비장한 마음으로 ^^; 산사태가 난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KKH 자체가 산 비탈을 그대로 쳐내서 만들었기 때문에 비가 오면 산사태가 일어나는 일이 워낙 잦다고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어제는 비가 내렸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저희가 탄 차가 지나갈 때 산사태를 직접 맞닥뜨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저희 차 앞으로는 다 지나갔고, 바로 저희 차가 통과할 때쯤 일어난 일이니까요.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산사태 지역으로 가까이 다가서니 그 토사 높이가 상당합니다. 6~7m쯤 되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아주 작은 돌들은 몇 개씩 계속 굴러떨어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산사태가 난 곳을 기어 올라가 넘고, 누군가는 계곡에 가까운 바닥쪽으로 넘습니다. 저는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지 모르는 채 그저 막막할 따름입니다. 겁이 덜컥 나는 것이 그냥 버스로 되돌아가 버스 안에서 소스트에서 공사 차량이 와 산사태를 치워줄때까지 기다릴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러나 김원장이 다그칩니다.

 

"뭐해? 따라와!"

 

이미 건넌 사람들이 바닥쪽이 그나마 안전하다 소리를 질러 줍니다. 그 소리를 듣고 기어올라가다 다시 비틀비틀 내려옵니다. 여기서 미끄러지면 죽음이다, 그런 생각만 자꾸 듭니다. 한 발, 한 발... 그러다 어느 순간 발이 진흙 속으로 푸욱~ 깊숙히 빠집니다. 엄마야~

 

다행히 중심은 잡았지만 종아리까지 진흙탕 세례를 피할 순 없습니다. 흑, 여기 온다고 경등산화 하나 사 신고 왔는데, 새 신발 치레 한 번 거하게 합니다. 이왕 젖은 몸, 그냥 푹푹 빠지면서 토사를 통과합니다. 한 아저씨가 내민 손을 맞잡는 것으로 마지막 부분까지 무.사.통.과!

 

 

안전지대에 올라서자 스스로 너무 대견한 기쁜 마음에 기념 사진을 남기기로 했습니다. 그 순간, 또 한 번 큰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리는 산! 건너온 사람들이 놀라서 다시 산사태가 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켁, 큰 일 날 뻔 했네요 -_-; (사진 찍힌 타이밍이 ^^;)

 

 

어쨌거나 이 와중에 둘 다 살아났습니다. ^^; 이제는 소스트로 향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나름 기념비적인 산사태 지역을 떠나기 전에 다시금 뒤로 돌아 사진 한 장을 더 남깁니다. 저~ 건너편으로 아직 안 건너온 승객들도 몇 명 보이네요. 자~ 그럼 우리 먼저 출발합니다~

 

 

이른 시간이라 깊은 골짜기는 아직 어둡습니다. 물론 골짜기라고 해도 이 곳은 해발 2,800m 가까이 되는 곳이긴 합니다만, 주위의 산이 워낙 높으니 골짜기의 개념도 상대적이네요. 여행하면서 많이 배운다니까요 ^^ 

 

 

 

 

이 장면쯤에서 KKH를 걷는 동영상을 잠시 보여드리자면,

 

 

김원장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잘도 걷고 있습니다. 현재 김원장은 10 Kg 정도 되는 배낭을 메고, 저희의 비상식량이 2 Kg 정도 가득 담긴 부직포 가방을 옆에 걸치고 있습니다. 저는 6 Kg 남짓한 배낭을 뒤로 메고, 앞으로는 역시 2 Kg 남짓의 귀중품을 넣은 작은 가방을 하나 더 둘러멨고요.  

 

 

산사태 지역이라는 표지판인 듯(우리식으론 낙석주의?). 그래, 잘 안다 잘 알어. -_-; 김원장 앞으로도 굴러온 돌덩이들이 몇 보입니다.

 

 

 

저 역시 잘잘한 돌들이 떨어진 길을 걷고 있네요. 처음만큼은 아니지만 차가 굴러가기 조금 어려울 정도의 작은 산사태 지역을 두 세 곳 더 건넙니다. 사진 상의 제 고개가 삐딱한 탓에 다소 맥없이 보이지만 ^^; 사실 그렇진 않았습니다. 새벽이라서인지 공기는 마냥 상쾌했고 그 덕분인지 고지대에 짐까지 지었는데도 제법 씩씩하게 걸었답니다. 노래까지 부르면서요.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빰빠밤! 지구는 두~웅그니까~"

 

 

어느 순간, 사람의 손길이 닿은 작은 텃밭을 만났습니다. 소스트가 멀지 않다는 증거인 것 같아 기뻐집니다. 한편으론 내버려 두고 온 집 근처 저희 텃밭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완전 정글이 되었을텐데... 하면서.  

 

 

 

 

나이가 있는지라 ^^; 50분 걷고 10분 쉬기를 반복하기로 합니다. 이 방법은 한국에서 등산할 때도 써먹는 방법이지요. 효과 좋습니다. 

 

 

 

KKH상에 잠시 앉아보았습니다. 이 사진을 보니 떠오르는 사진이 하나 있어 아래 함께 첨부해 봅니다.

 

 

이 사진은 2002년에 찍은 사진입니다. 장소는 중국 꺼얼무와 티벳의 라싸를 잇는 청장공로(靑藏公路 : 칭짱꽁루)입니다. 저 곳은 티벳이고요. 4년 전 그 때나 지금이나 같은 바람막이 옷을 입고 있네요 ^^; 저 옷은 김원장이 96년에 이탈리아에서 한국 돈 8,000원을 주고 산 거라고 합니다. 벌써 10년에 걸쳐 사이좋게(?) 나눠입고 있습니다(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옷이군요 ^^;). 물론 아직도 10년은 더 입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아껴야 잘 살죠 ^^;).

 

 

김원장도 앉혔습니다. 루나랑 장난은 아직도 쌩쌩한데 - 20대의 탱탱한 젊음에 축배를! - 30대, 40대 늙어가는 부부는 어디서나 털퍼덕 버전이네요.

 

 

그래도 김원장 역시 생각보다 ^^ 스스로 잘 걷는 것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KKH상에서 제가 말리는데도 팔굽혀펴기까지 마구 해봅니다. 뿌듯해하는 저 표정이라니 ^^ 이젠 저보다 한 술 더 떠 KKH에 아예 드러누워있군요. 이 곳을 이렇게 걷는 이 경험이 얼마나 좋은지 김원장의 한 마디를 살짝 빌려 보도록 하지요.

 

"어제 버스에서의 고생이 이렇게 다 보상되는구나"

 

 

드디어 소스트로 보이는 - 사진으로 많이 보아온 소스트의 멋진 절벽 모습이 보이길래 ^^ - 지역이 제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마침 공사 차량을 손 보고 있던 현지인에게 물으니 10분만 더 걸어가면 된답니다. 거의 3시간 가량을 걸어왔으니 12 Km가 맞나 봅니다.

 

 

 

루나가 소스트 팻말 아래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네요. 찍을만 하죠 ^^

 

소스트에서 출입국 심사를 받습니다. 너무나도 친절한 출입국 사무소의 직원이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Welcome to Pakistan! 인사를 건넵니다. 그 말이 너무나도 반갑습니다. 고압적인 중국측이랑 확연히 비교되네요 ^^; 여권에 입국 도장 하나 더 쿵! 찍습니다.

 

루나가 말합니다.

 

"언니! 우리 밥부터 먹어요~"(루나는 언니 이외에도 몇 가지 한국 단어를 말할 줄 압니다. 예전 남자친구가 한국인이었다네요. 아줌마라고 부르라니까 그러기엔 제가 너무 젊다나요? 호호호 ^^; 그러면서 김원장에게는 꼭 아저씨라고 부릅니다. "아저씨, 괜찮아요?" 이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는 어제 아침까지 밥이랑 김치해서 든든히 먹고, 점심과 저녁은 미리 준비해 온, 카스테라니 과일이니 과자니 해서 많이 먹었는데, 루나랑 장난은 그제 점심때 양고기탕 먹고는 저녁도 굶고, 어제 아침도 굶고 점심도 굶고 저녁은 승객들이 나누어준 과자 부스러기 몇 개로 때웠다고 합니다(저희는 맨 뒤에, 루나와 장난은 맨 앞에 앉아있었거든요).

 

 

인도에는 릭샤가 있고 태국에는 툭툭이, 필리핀에 지프니가 있다면 파키스탄엔 바로 이 화려하기로 이름난 트럭이 있습니다. 그 유명세에 흠이라도 낼 게 두려웠는지 역시나 아름답게 치장한 트럭입니다.

 

 

차차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만 다리가 4개 달린 것 중 탁자 빼고는 다 먹는다는 중국에 비하면 파키스탄 식단은 비교할 바가 못 되죠. 어쨌거나 식사를 대충 마치고 환전도 하고 다음 목적지인 파수(Passu)를 향해 떠납니다. 소스트는 작은 국경 마을일 뿐이고 트레킹을 보다 제대로 하려면 이 곳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파수부터가 적격이니까요. 이 곳에서 일본인 히로는 훈자로 곧장 먼저 가기로 하고, 저희 넷은 파수까지 함께 가기로 합니다.

 

소스트는 분명 파키스탄인지라 이 곳부터 저와 루나는 차별 아닌 차별을 받기 시작합니다. 차 안에서라도 여성은 절대 외간 남자와 살을 맞대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저희가 파수행 미니 버스에 타려니 미리 타있던 남자 승객들은 모두 내리고 저와 루나를 각 줄의 맨 안쪽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김원장과 장난을 태우고, 김원장과 장난 옆으로는 파키스탄 남자 승객들이 앉는거죠. 파키스탄 여성들은 밖에 거의 안 싸돌아다니기 때문에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남성들 뿐입니다.

 

 

 

미니버스는 50분 가량 멋진 길을 달려 파수에 잠시 정차합니다. 달리는 차창을 통해 언뜻 보기에 파수는 감히 달나라라고 할 만큼 황량해 보입니다. 우리 말을 듣고 함께 파수에 내리겠다던 루나가 의아하다는 듯 말을 꺼냅니다.

 

"여기가 파수여요? 진짜 여기에 내릴거여요?"

"응. 왜? 루나는 안 내리게?"

"아무 것도 할 게 없어보여서... 우리는 그냥 훈자로 먼저 갈께요"

"그래, 그럼 훈자에서 다시 만나자"

 

루나와 장난은 그렇게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파수에 안 내린 걸 후회하지 않을까요?

 

 

 

 

 

차에서 내려 눈이 닿는 곳 꼭대기까지 바라보고 한 바퀴 빙 둘러 주변을 둘러보며 아무렇게나 대충 사진을 찍어도, 이거 합성 아니야? 소리 절로 나올 만큼 파수는 멋진 곳입니다. 오죽했으면 어젯밤, 버스에서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한데다가 여기에 더해 새벽부터 3시간 남짓 KKH를 배낭 메고 트레킹까지 한 피곤함을 과감히 무시해버리고 숙소에서 쉬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얼른 다시 밖으로 나와 버렸을까요.

 

 

파수 주변에는 커다란 빙하가 서 너개 정도 있는데요, 북쪽에서부터 Batura Glacier, Passu Glacier, Ghulkin Glacier, Gulmit Glacier가 그것입니다. 이 중 Passu glacier는 이름 그대로 파수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습니다.

 

 

 

생각보다 오르는 길이 좋지 않아서 제 표정이 자못 심각합니다. 빙하가 결국 커다란 얼음 덩어리고, 이 얼음 덩어리가 녹을 수도 있으며, 이로 인한 침식 작용을 고려했다면 대비를 좀 더 했을텐데... (물론 이런 거 다 따지기엔 머리도 못 따라가고 이런 곳 여행도 못 다니겠죠 ^^;) 얼음과 다름 없는 차가운 물이 딱히 정해진 지류 없이 땅에 조금이라도 움푹 들어간 부위가 있으면 그 골을 따라 여기저기서 마구 흐릅니다. 작고 날카로운 돌들은 미끄럽고, 그나마 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은 질퍽질퍽합니다. 잘 닦여진 길다운 길이 따로 없어 무릎이나 허리에 이르는 풀들을 헤치고 길을 어림짐작하여 짚어 나가는데, 흠냐, 가시가 날카로운 풀도 많네요.

 

어쨌거나 저기쯤 올라가서 저는 이제 그만!을 선언합니다. 조금 더 올라가면 호수도 있다고 했는데 그건 못 봤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람쥐 같은 김원장에 비해 미련 곰탱이 같은 제가 겨우 웬만큼 내려와 안전지대라 할 수 있는 나름 평탄한 지역으로 나와 한시름 놓고 있는 모습입니다. 다소 강아지스러운 -_-;

 

 

빙하쪽을 바라보고 파수를 둘러싼 산을 배경으로 삼은 김원장입니다. 김원장 뒤로 흐르는 냇물은 빙하에서 흘러온 물이기 때문에 무지~ 차갑습니다. 색도 범상치 않고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KKH 대신 파수 마을길로 접어 들었습니다. 훈자에서만 유명한 줄 알았더니 역시나 이 곳에도 살구 나무가 대세군요. 아직 채 익지 않은 작은 초록 사과가 달린 사과 나무도 간혹 보입니다. 행복하게도 마주치는 마을 사람들 모두 웃으며 저희의 인사를 받아주고 되돌려줍니다. 

 

"앗살람 알레이쿰"

"와알레이쿰 살람"

 

이렇게 거닐어보니 파수는 참 작은 마을입니다. 저희가 묵는 숙소는 KKH 대로변(그래봐야 중앙 차선도 제대로 안 그려진 2차선)에 있고, 맞은 편으로 주인 맘대로 열고 닫는 작은 점방이 두 개 있습니다. 소스트로 올라가는 버스든, 훈자 방향으로 내려가는 버스든 모두 이 지점에 섭니다. 그러니 이 곳이 이 마을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 셈이죠. 마을 안에는 길가의 작은 점방보다도 더 작은 점방이 두 개 더 있습니다. 가게가 4개 뿐인 아주 작은 파수... 그런데도 어쩜 이렇게 큰 산을 아우르며 품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Welcome to Pakistan, Welcome to Pas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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