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우리 집에는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비롯, 아빠와 엄마, 이제는 모두 가정을 꾸린 작은 고모와 사촌 언니들, 그리고 나와 동생까지 9명의 대식구가 살았다. 나와 막내 언니와의 나이 차는 6살로 다소 벌어졌지만, 그 위로 언니들과 고모와의 사이에는 그리 큰 편차가 나지 않아 가끔씩 어린 나와 동생은 ‘따’가 되기 일쑤였다. 그 중 한 경우가 바로 일요일 아침 식후에 벌어지는 커피 타임. 아빠와 고모가 출근을 안 하시고, 언니들도 모두들 집에 있는 일요일에는 다 같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난 뒤, 각자의 취향대로 한 잔의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가지곤 했었다. 당시 초등 학생이었던 나와 동생은 커피 잔을 꺼내 나르는 일까지에만 동참할 수 있었을 뿐, ‘어린이들은 커피를 마시면 머리가 나빠진다’는 이유로 더 이상의 접근이 금지되었다. 그러다 아주 가끔 부모님의 묵인 혹은 방심 아래 커피를 몇 숟갈(!) 얻어먹을 수 있었는데, 그 때의 향긋하고 달콤한 커피 맛이라니…

 

조금 머리가 굵어진 고등학교 시절, 등교 길에 있는 한 가게에서는 모 회사에서 제조하는 정사면체 비슷하게 생긴 - 우리는 삼각형 우유라고 불렀는데 - 커피 우유를 판째 가져다 놓고 여름이면 차갑게, 겨울이면 따뜻하게 하여 판매했었는데, 아침마다 하나씩 사 들고 교실로 와 빨대를 꽂아 먹는 재미가 쏠쏠했던 기억이 난다. 나름대로는 고등학생이면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그게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것 같다. 나의 머리가 이렇게 된… -_-;

 

대학은 참 좋은 곳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식구들의 눈치를 보며 ‘여명의 눈동자’를 봐야 했고, ‘일요일 일요일 밤에’가 할 시간이면 엉덩이는 방 안 걸상에 붙어 있어도 귀는 문 밖의 TV를 쫓고 있었으며, 엄마에게 되도록 재미난 드라마가 할 시간에 맞추어 저녁을 차리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던 내가 대학 입학과 동시에 TV와 안녕을 고했으니까… 더불어 어릴 적에는 주변의 어른들이 말려도 그토록 마시고 싶었던 커피가, 대학생이라는 딱지를 붙이자마자 180도 변신하여, 시험 때 남들이 다 마시니까 나도 예의상 한 두 잔쯤 마셔주는 음료로 전락해버리고 만 것이다. 게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 남들은 도서관 자판기 커피 한 모금에도 또랑또랑 눈 뜨고 공부만 잘 하는데, 나 혼자 감기는 눈을 비비며 화장실만 들락거릴 뿐 효과를 못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4년 내내 나만큼 먹어대는 친구들과 항상 경쟁적으로 식사를 하는 동안, 후후 불어 마시는 뜨거운 음료보다는 언제든 꿀꺽꿀꺽 마실 수 있는 차가운 음료를 선호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어느새 뜨거운 커피와 나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커피를 다시 마시게 된 건 직장 생활을 하면서부터였다. 직장 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알겠지만 근무 시간에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단순히 피곤함을 떨치는 수단으로 이용될 뿐만 아니라, 직원들끼리 수다를 떨 때의 군것질거리이자(남자 직원들이라면 담배와 꼭 붙어 다니고), 손님 접대용으로, 그리고 회의 중 먹거리로도 다양하게 등장한다. 하루에 무려 7~8잔까지도 어쩔 수 없이 마시게 되는 경우가 생기다 보니, 나중에는 스스로 알아서 연한 커피를 챙겨 마시거나 양해를 구하며 다른 음료를 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서울의 아침은 자발적인 커피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순수한 ‘커피’는 아니고, 고등학교 때 즐겨 마시던 바로 그 ‘삼각형 커피 우유’지만. 출근을 위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은 항상 괴롭다. 꾸벅꾸벅 버스에서 졸다가 어느새 회사 앞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근처 가게에 들러 이제는 ‘모닝 커피 우유’에 중독이 되어버린 우리 팀원 모두를 위한 커피 우유를 사는 일(팀원 간의 텔레파시가 안 통하는 날에는 아침부터 두세 통을 마셔야 한다). 직장을 그만 두고 여행을 시작한지 3개월이 넘어가는 지금, 그 차가왔던 커피 우유가 그립기만한데…(한국을 떠난 뒤로 우유를 마셔본 적이 없다)

 

뭄바이에서 인도의 남서쪽 끝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트리반드룸으로 가는 기차 안, 창 밖으로 어느새 무성한 야자나무숲과 숲 사이사이로 흐르는 황토 빛의 강, 예수님이 그려져 있는 교회의 십자가와 사리가 아닌 수녀복을 입은 인도인 수녀님들의 모습에 넋을 잃고 쳐다보는데, 객차 내 통로를 나지막이 울리면서 나를 불러들이는 한 소리, “커피~ 커피~”

 

열차 내에서 ‘차이’라 불리우는 밀크티를 파는 행상인들은 그간 많이 보아온 터라 그리 놀라울 것이 없는데 ‘커피’를 파는 사람은 처음인 것 같다. 몇 명의 아저씨를 그대로 보내고, 우리가 ‘커피’라 제대로 들은 것이 맞다는데 동의를 한 후에 결국 ‘커피~’를 외치는 한 아저씨를 불러 아저씨가 들고 다니는 양철통에서 따끈한 한 잔의 커피를 따라 받았다. 안 그래도 에어컨 바람에 한기를 느끼던 차였는데, 때마침 밖으로는 장대 같은 소나기가 차창을 때리며 쏟아지고, 두 손으로 감싸 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둘이 나눠 마시려니, 아, 그 달짝지근한 커피의 맛이, 나에게는 자판기 커피의 그것이요, 오빠에게는 다방 커피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알고 보니 남인도에서는 커피 재배를 하고 있단다. 그래서인지 남부 지방에서는 북인도의 밀크티만큼이나 커피가 대중적인 음료라고 한다. 기나긴 기차 여행에 있어 기대하지 않았던 반가운 손님을 맞은 격으로 이번에는 두 잔을 시켜 한 잔씩 마신다. 정말 맛있다. 차가운 우유가 단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도.

 

오래 전, 한 여성지에서 함께 커피를 마시고 싶은 남자 1위로 영화배우 안성기가 꼽혔던 적이 있었지. 나는 지금 축구선수 안정환도 생각이 나고, 유난히 커피를 좋아하시는 우리 아버님 생각도 나고, 비 내리는 오후 3시면 꼭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싶다는 엄마도 생각이 나고, 커피 우유 못지않게 박카스에도 중독이 되어있는 우리 팀원들 생각도 난다. 이런 저와 함께 멀리서나마, 커피 한 잔 하실래요?

 

Tip


교통 : 뭄바이 CST - 로크마냐 틸락(Lokmanya Tilak) / 교외선 전철 / 40분 / 1인당 7루피 / 뭄바이 시내 역들에서는 트리반드룸까지 직접 가는 열차가 없는 관계로 이 노선을 이용하려면 뭄바이 근교의 로크마냐 틸락까지 가야 한다. CST의 전면을 바라보았을 때 왼편에 위치한 작은 창구에서 우리나라 지하철 승차권 같은 노란색의 표를 판매하며, 이 표를 구매한 뒤 역의 1번이나 2번 Harbour line 플랫폼에서 수시로 운행되는 Vashi - Belapur - Panvel 행 전철을 타면 된다. 하차할 역은 ‘Tilak Nagar’이며, 내려서 달려온 쪽을 돌아보면 로크마냐 틸락역으로 가는 작은 샛길이 있다. 길을 따라 몇 분만 걸으면 의외의 장소에 덩그러니 건축된 역을 만날 수 있음
         로크마냐 틸락 - 트리반드룸(Trivandrum, Thiruvananthapuram으로도 불림) / 기차(3A) / 31시간 25분(오전 11시 45분 출발, 익일 오후 7시 10분 도착) / 1인당 1301루피(32,500원 남짓) / 마찬가지로 객차 입구에 예매를 한 승객 명단이 붙어 있어 본인 확인 뿐만 아니라 동승한 승객에 대한 인적 사항(?)도 알 수 있다
 숙소 : Pravin Tourist Home / 천장의 fan과 욕실이 딸린 넓지막한 더블룸이 210루피 / 역에서 나와 대로를 따라 왼편으로 난 길을 200m 가량 걷다 보면 건너편으로 Ambika cafe가 보일 것이다. 그 cafe를 사이에 두고 양편으로 골목 길이 갈라지는데 그 중 왼쪽 골목(Manjalikulam Rd)으로 건너 들어가 150m 정도 걸으면 왼편에 위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