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 부부에게 라면은 필수 구비 식품이다. 오빠에 비하면 나의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던 데다가 할 줄 아는 요리조차 없었던 나로서는 매일의 저녁 식사 뿐만 아니라 휴일에도 외식이 선택 사양이 아닌 필수였다. 동네의 뻔한 음식점도 이미 몇 바퀴 돌았겠다, 생활 정보지를 뒤적거리며 오늘은 뭘 시켜 먹을까를 뒹굴며 고르다 그래도 마땅한 음식이 안 떠오르면,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고 환영 받는 메뉴가 있었으니 바로 ‘오빠가 끓인’, 일명 ‘꼬들이’ 라면.

 

냄비에 물을 약간 모자라게 붓고 스프를 먼저 넣어 팔팔 끓인 후, 부수지 않은 면을 넣고는 젓가락으로 딱 한 두 번 정도만 뒤집어 주고는 말 그대로 면이 꼬들꼬들하도록 살짝 익혀 냄비 채 들고 와서 약간 쉰 김치와 함께 먹으면(이 때에는 냄비마다 뚜껑이 하나씩 밖에 없는 것이 원망스럽다), 캬아~ 그 맛이야말로 언제 먹어도 끝내 준다(이와 반대로 울 엄마는 물을 찰랑찰랑 붓고, 달걀부터 시작해서 온갖 채소를 다 썰어 넣은 뒤 내가 보기엔 면발이 팅팅 불도록 푸욱~ 끓인 후 잡수신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이 안 나지만 보통은 둘이 하나만 끓여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젓가락으로 더 이상 건져 올려지는 면발이 없을 때쯤 집에 찬밥이 없는 것을 심히 안타까워하곤 했었다.

 

이런 우리에게 외국 여행을 하면서 가장 생각나는 한국 음식 중 하나가 바로 라면이 아닐 수 없다(95년, 내가 한 달간 짠순이 유럽 배낭 여행을 했을 때 유일하게 사먹었던 한국 음식도 바로 스페인에서의 라면 한 그릇이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그 가격, 우리 돈 8,000원!). 다행히 라싸에서는 중국 중전의 한 식당에서 구입한 김치와 함께 사이비(새우 맛이었기에)나마 매일 한 끼씩 라면에 밥 말아 먹는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라싸를 한 발짝 벗어나자마자 당장 끼니 수급에 어려움이 왔다. 물론 서양인들에 비하면 우리는 그나마 호조건이겠지만, 서부 티벳 여행 내내 삼시 세끼 중국식이나 티벳식으로만 먹을 수 없는 일! 우리는 라싸를 떠날 때 잔뜩 준비한 비상식, 한국 라면을 하루에 한 개씩 풀기로 했다. 하지만 서부 티벳에서 컵 라면이 아닌, 말 그대로 끓여 먹어야 하는 봉지 라면은, 취사 도구라고는 숟가락 하나 없는 우리에게 그림의 떡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어찌 대한의 건아들이 포기할 쏘냐! 중국인 식당에서는 손짓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티벳인 식당(주로 천막 수준이지만)에서는 가이드인 츠링이 우리를 위해 통역해 준 덕분에 결국 우리의 라면 섭취 전선에는, 밥까지 말아 먹을 정도로 이상이 없었다.

 

라면물론 덕택에 오빠는 팔자에도 없이 참으로 다양한 방법과 도구들을 이용하여 라면을 끓여야만 했는데… 중국인들의 식당에서는 도구가 문제였다. 이들이 원체 냄비처럼 생긴 도구를 안 쓰는지라 입구가 엄청 넓은 중국식 프라이팬에 마찬가지로 볶음용 국자를 들고 라면을 끓여야 했는데, 그 동안 한국에서는 천부적인 소질을 보이던 오빠가 도무지 물 가늠을 못 하는 바람에 매번 조금은 짜거나 조금은 싱거운 라면을 먹어야 했다. 티벳인들의 식당에서는 늘 화력이 문제였다. 첫 시도를 했던 마루 겸 부엌에서는 염소똥으로 라면을 끓여야 했고, 다음 번 천막에서는 야크똥으로, 똥도 구하기 힘든 곳에서는 가시덤불로 끓인 라면을 먹어야 했다. 워낙 지대가 높은 곳이라 낮은 온도에서 물이 끓기 시작하는 데다가 화력 조절이 불가능하니(사실 똥에 불이 제대로 붙기까지가 오랜 시간이 걸릴 뿐, 일단 불이 붙으면 화력 자체는 놀랄 만큼 좋다) 아무리 꼬들이 라면을 좋아하는 우리 입에도 가끔 덜 익은 과자 라면이 들어오는 경우가 생길 수 밖에…(어디 가서 라면을 시켜 먹을 때 그 집 맛의 수준을 ‘꼬들이’의 정도로 결정하는 오빠이기에 본인이 요리할 시에도 면발을 덜 익히지 않으면 않았지, 절대 충분히 익히지 않는다)라면

라면

 

 

 

 

 

 

 

하지만 어쨌든 모두, 잊기 힘든 라면의 맛, 바로 한국의 맛이었다. 오빠는 이제 라면에 질린다며 당분간 안 먹겠다 큰 소리치고 있지만, 만약에 라면이 없었더라면 틀림 없이 서부 티벳 여행이 한 층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아직도 봉지 라면이 15개나 남았는데 과연 이건 언제나 먹을 수 있을까?

 

Tip


식당 : New 종바는 비록 중국식이기는 하지만 Old 종바에 비해 훨씬 크기 때문에 점심 식사를 하기에 적당하다(동네 슈퍼에서는 한국제 초코파이도 판다) 
숙박 : 중국전신(中國電信) 내 숙소 / 8인실(4인실씩 2개가 붙어있는 디자인) 한 침대당 30원 / 화장실 공동 사용 / 역시나 발전기를 사용한 한시적 전력 공급
* 라면을 끓이는 데 들어간 비용 : 적게는 무료, 많게는 8원(이는 가시덤불 땔감 비용이었는데 정말이지 이 때는 더 챙겨 주고 싶을 만큼 오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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