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4일


눈동왕에 비하면 크지만 향성은 역시나 작은 마을이다. 채 풀리지 않은 몸으로 느지막이 일어나 물만두를 먹으러 가는 길에 어제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승객들을 여기 저기에서 만날 수 있다. 아직 그들의 얼굴이 보이는 것을 보니 오늘 아침, 버스가 우리만 남겨둔 채 출발하지는 않았나 보다. 하긴 운전사 아저씨도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오늘 아침 일찍 또 그 길을 운전해 갔다면 철인이겠지… 둘이 스무 개씩 물만두를 마흔 개나 배 부르게 먹고 나오다 마침 운전사 아저씨를 만났다. 영어라고는 tomorrow와 go, 그리고 six o’clock 밖에 모르는 아저씨, 중국어로 열심히 상황을 설명해 주는데 어느새 눈치가 9단이 된 우리는 그 설명이 ‘오늘은 안 가고, 내일 샹그리라에서 들어오는 차가 있으면 모레 아침에 출발하겠다’라는 것을 알아 듣는다. Okay.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예 안전하게 나가겠다는 아저씨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원래 예정대로라면 오늘 우리는 티벳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하루를 더 보내야 한다는 것에 막막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게 웬만한 보험에도 적용이 안 된다는, 말로만 듣던 ‘자연재해’ 아닌가! 오히려 이렇게 우리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해 하고 있어야 할런지도 모르지.

 

낮 동안 할 일 없이 뒹굴뒹굴 보내다가 - 오빠는 벌써 이문열 평역의 10권짜리 ‘삼국지’중 제 7권을 읽고 있다 - 위급한 현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이, 어김 없이 배에서 찾아오는 신체적 신호에 부응하기 위해 또 밍기적 거리고 자리를 털었다. 무슨 순찰이라도 하는 방범 대원들 마냥 새로운 소식을 접하기 위해 터미널부터 먼저 들렸는데, 어머나 세상에, 며칠 전 Daocheng에서 우리를 이곳에 떨궈놓고 샹그리라로 갔던 아저씨 차가 이 저녁에 형편 없는 몰골로 주차해 있다. 바로 오늘, 단장의 그 고개를 넘어온 것이다! 버스 주변을 배회하며 신통해 하고 있자니 경비가 없어 버스 내에서 먹고 자고 하던 우리 버스 승객들 중 몇이 우리를 알아보고 불러댄다. 내일 오전 6시 30분에 우리 차가 출발하기로 했다고…

 

하루를 더 쉬게 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마음이 바빠져 얼른 터미널을 빠져 나오려는데 이번에도 또 운전사 아저씨와 딱 마주쳤다. 아저씨 역시 잘 만났다는 표정으로 “tomorrow, go, six o’clock” 하신다. 정말 내일 가긴 가는구나…

 

Six o’clock 밖에 모르는 운전사 아저씨 말을 믿어야 하는지, 아니면 6시 30분이라던 승객 말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오빠와 의견이 충돌한다. 안전주의 오빠는 전자를 믿어야 한다고 하고, 모험주의 나는 평소 전적으로 미루어보아 후자를 택하지만 항상 그렇듯 결국 오빠가 이긴다. 오빠는 꼭두새벽 5시 20분으로 알람을 맞춘다.

 

5월 15일


눈가끔은 모험을 즐기는 것도 좋다. 오빠의 재촉에 밀려 6시 이전에 터미널에 나왔지만 그 동안 밀렸던 여남은 대의 트럭들이 슬슬 출발할 채비를 갖추는데 반해 우리 운전사 아저씨는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6시 40분이나 되어서 부시시한 얼굴로 나와 그제야 차를 살핀다. 그것 봐라~ 투덜거리는 나를 버스 안에 남겨 두고 오빠는 놀란 토끼 표정이 되는 아저씨를 보더니만 뭔가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차 밖으로 나선다. 뭘까?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니 우리 차의 왼편 뒷바퀴가 푸욱 꺼져있다. 어라? 저게 언제 저런 꼴이 되었을까?

 

한참 동안 타이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들어 온 오빠 역시 놀란 토끼 얼굴이다. 왜? 대답 대신 오빠 손에 질질 끌려 타이어를 교체하던 곳으로 가보니 길이가 10cm는 족히 되어 보이는 대못이 흙 바닥 위를 굴러다니고 있다. 저 커다란 못이 우리 타이어에 박혀 있었단다. 그렇다면 그런 상태로 우리가 그제 밤, 깎아지른 절벽을 내려왔다는 소리? 하긴 모르고 마시면 해골 바가지 안의 썩은 물도 타는 목의 갈증을 달게 풀어주는 법, 우리도 모르고 내려왔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안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몇 배 더 가중되기만 했을 것이다.

 

오전 7시 20분, 새 타이어 - 라고 하기엔 좀 부정확하다. 지금까지 내가 본 타이어들은 타이어 자체에 바람을 넣도록 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이 곳의 타이어는 그냥 껍데기에 불과하고 벗겨내면 해수욕장에서 빌려주는 검은 색의 고무튜브가 나타난다. 이 고무튜브가 완전히 찌그러져 있어서 운전사 아저씨가 보유하고 있던 재고품에 다시 바람을 넣어 교체했을 뿐, 껍데기는 그대로이다(우리나라 버스들도 그런가? 만약 아니라면 해수욕장의 그 많은 고무튜브는 어디에서 왔지?) - 를 달고 드디어 차는 다시 샹그리라를 향해 출발한다. 사천성에서 운남성으로 그 동안 못 넘어갔던 차들의 행렬이 흙 먼지 바람을 줄줄이 일으키며 가느라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지만 어쨌든 4시간 만에 정상까지 오른다. 정상이라… 아직 눈은 다 녹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 한바탕 환호성을 지르며 감개무량해 하는 순간을 잠시 갖는다. 바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못 벗기는 사람의 옷을 태양은 순식간에 벗겼다더니, 정말 태양이 위대하게만 느껴진다. 십 수명의 사람들이 하루 종일 고생해도 못 이루어낸 일을 태양은 한나절 스스로의 힘만으로 길을 만들었다.

 

눈정상을 넘어 내려오는 길도 만만치 않다. 오빠가 봤던 주인이 버리고 간 것으로 보인다던 짚차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이미 길 한편으로 밀려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천성에서 운남성으로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운남성에서 사천성으로 넘어오는 차들도 중간 지점이자, 속도를 내기 힘든 눈 덮인 정상 근처에서 아슬아슬 서로 길을 비켜 주다가 커다란 트럭 하나가 산 쪽 구덩이에 깊이 빠져 또 한 번 일대가 정체 현상을 빚는다. 정말 쉬운 길이 아니다. 뒤 따르는 차들의 경적 소리에 밀려 겨우 사고 지점을 통과하고 ‘샹그리라 대협곡’으로 향하는 길에 또 하나의 대형 사고를 목격했다. 이번에는 산 쪽이 아닌 절벽 쪽이다. 트럭 한 대가 100여 m 아래 절벽으로 떨어져 찌그러진 성냥갑처럼 구겨져 있었다. 아무도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는 다들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일주일 전, 향성으로 가는 길, 샹그리라 대협곡에서 그랬듯이 지금, 샹그리라로 되돌아 가는 길, 또 한 번 샹그리라 대협곡에서 1시간을 쉰다. 그리고 다시 3시간 30분, 샹그리라가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자갈 포장길을 차가 기우뚱 올라서자 오빠와 나는 행복해진다. 고향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오래간만에 다시 보는 샹그리라는 맨 처음 이 곳을 보았을 때처럼 다시금 크고 번화한 도시처럼 느껴진다. 무사히 자연에서 문명으로 돌아오는데 성공한 것이다. 오늘은 정말이지, 문명이 반갑다.

 

Tip


국제전화 : 향성 터미널에서 시내 쪽으로 걷다 Y자 길을 만나기 전에 오른쪽으로 China Telecom이 있다 / 내부의 공중전화 booth같은 곳에 설치된 일반 전화로 수신자부담 국제전화까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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