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여러 국경을 넘나들어 봤지만 괜시리 유달리 긴장되는 국경이 아닐 수 없었다. 흔히 20세기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마지막 전쟁으로 코소보 전쟁을 꼽지 않는가. 하지만 이런 나의 긴장감을 제외하고는, 다른 여타 국경과 비교해 특별할 것 없는 입국 절차였다. 세르비아가 인정을 하든 안 하든 그들과는 분명 다른 제복을 갖춰 입은 검문소 직원들이 우리를 맞았다. 드디어 신생 독립국인 코소보에 입국. 



긴장했던 만큼 평소보다 더 기쁘게 느껴지는 새로운 국가로의 입국이었다. 야호! 우리가 차를 몰고 코소보에 들어왔어! 쒼나게 달렸는데...

아아...

반대편 차선에서 스피드건을 들고 있던 경찰이 수신호로 우리 차를 세웠다. 

아흑.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경 : 제한속도 30Km/h 구역에서 68Km/h로 달리셨습니다. 운전 면허증 좀 보여 주세요

김 : (국제 운전 면허증을 내밀며) 여기요

경 : 원 면허증도 보여주세요

김 : (한국 운전 면허증을 내밀며) 여기요


뭐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절차와 비슷했다. 


경 : 이 정도 과속일 경우 이에 해당하는 벌금은 35유로입니다

김/나 : (한국말로 동시에) 헐

김 : (나에게) 너 오는 길에 30Km 제한 속도 표지판 봤냐? 여기가 왜 시속 30 이야?


아닌게 아니라 여기는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로가 꼬불꼬불 오르락내리락 그런 것도 아니고. 이런 일에 대비해 나름 속도 제한 표지판을 발견할 때마다 규정 속도를 지키고 있었고. 

하지만 그런게 뭐 중요하겠는가. 코소보에 입국했다는 들뜬 마음에 표지판을 놓쳤을 수도 있고, 경찰하고 손 꼭 잡고 그 표지판 확인 사살하러 되돌아갈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들의 목적이 절대 과속 단속이 아니라는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 아닌가. 


김 : 여기 말고 프리슈티나에서 가서 벌금을 낼 수 있도록 딱지를 발부해 주세요

경 : 알았어요. 일단 수속을 위해 우리 차로 건너 가시죠


김원장은 나에게 나머지 절차를 맡겼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설마하니 김원장도 진짜 이들이 딱지를 발급해주리라 믿진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경찰차로 가면서 아, 어쩐지 이 시츄에이션은 너무 익숙한데. 데자뷔. 아프리카랑 똑같아... 그런 생각을 했고, 역시나 차선 반대편 경찰차 운전석에 올라타 뭔가 종이에 끄적거리는 척 하던 경찰은(그 종이 그냥 A4 백지던데) 바로 내게 그냥 우리가 너 대신 벌금을 내줄테니 이 자리에서 35유로를 내면 된다고 제안 같지도 않은 제안을 해왔다. 그러면 그렇지. 


나 : 지금 막 세르비아에서 들어오는 길이라 유로가 없어요. 미국 달러만 있어요.

경 : 달러? 일단 달러라도 가지고 와 봐요.


물론 내 지갑에는 유로가 있었다. 달러도 있었다. 그런데 기억에 유로 잔돈은 분명히 없었다. 단순 가치로 따지면 1유로보다는 1달러가 내게 유리했다. 그래서 유로는 없고 달러만 있다고 일단 뻥을 치긴 쳤는데... 우리 차로 돌아와 지갑을 열었다. 제발 10불 짜리가 있어야 할텐데... 아쉽게도 없었다. 20불 짜리와 그 이상만. 어쩔 수 없었다. 20불을 들고 그에게로 갔다. 


나 : 이게 제가 가지고 있는 달러에요

경 : 좋아요. 그럼 달러로 받지요. 하지만 35유로는 40불에 해당됩니다.

나 : (니가 인간 계산기냐) 현찰로는 이게 다에요. 나머지는 신용카드에요. 유로는 프리슈티나에 도착하는 대로 ATM에서 인출할 생각이었거든요. 정 그렇다면 프리슈...

경 : 알았어요. 좋아요. 그냥 20불 짜리 딱지를 끊는 걸로 하고, 그걸 내가 당신 대신 내줄께요

나 : (속으로) 아주 지랄을 하세요

경 : 앞으로도 운전 조심해요. 과속하지 말고

나 : 예 잘 알겠어요. (20불 먹고 떨어져서) 고마워요  


35유로를 20불에 막았으니까 나는 나름 내가 잘했다고 생각했다 ㅋㅋㅋ 아프리카 렌트카 여행을 떠올려 보자면 내가 프리슈티나에서 벌금을 내겠다고 고집할 경우, 그럼 자기들 업무 끝나고 퇴근할 때까지 옆에서 내내 기다리라고 한다거나 / 딱지는 떼어주겠다, 다만 오늘은 토요일이니 월요일 경찰서로 찾아와라 등등(우리는 하룻밤만 자고 일요일에 뜰건데) 하염없이 붙잡아 두거나 일이 늘어질 것이 뻔했다. 


한편으로 나로서는 발칸 렌트카 여행을 준비하면서 운전 중 이런 일을 몇 번이고 겪을 줄 알았는데... 이제야 겪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나름 선방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어쨌거나 결국 20불 삥을 뜯겼다는 결론에 이르른 김원장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각종 새끼들로 돌아가며 한참 코소보 경찰 욕을 해대더니 나중에는 왜 5불로 안 막았냐고 나를 향해 투사 ㅋㅋㅋ 뭐야. 아무리 그래도 35유로 부르던 애들한테 5불은 좀 심했다. 난 10불 정도 생각했는데... 물론 투어리스트라고 하지 말고 NGO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나중에 잠깐 들긴 했지만...(나이가 드니 순발력도 ㅜㅠ) 여튼 이럴 때를 대비해서 잔돈은 항상 충분히 준비해둬야 하는건데 ㅎ 

 

(코소보는 외양이 알바니아와 흡사했다. 사람들 얼굴도 모스크도 길거리에 날리는 깃발마저 알바니아 국기였다)

(김원장의 화는 조~오기 앞에 프리슈티나가 보일 때까지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Hotel Pinocchio


@ 예약 : 부킹닷컴

@ 방 : 스탠다드 더블룸

@ 가격 : 조식 포함 82유로

@ 장점

- 조용하다

- 방 넓고 침대 넓고 욕조 넓고...(비데도 있으) 언덕 중턱에 자리 잡아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프리슈티나 뷰가 끝내준다

- 새 호텔 분위기가 물씬. 인터넷도 빠르다

- 아래층에서 운영 중인 피노키오 레스토랑은 맛집이다

- 직원들이 매우 친절하다

@ 단점

- 센터와 다소 멀리 떨어져 있다. 센터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 잠시 단수가 된 적이 있다. 딱히 불편하진 않았다. 

- 프리슈티나 전체적인 문제지만 호텔 숙박비가 비싼 편

- 건물 전체적으로 약간의 공명음이 존재한다

@ 기타 

각국 대사관들이 쫘르륵 모여 있는 동네(프리슈티나의 한남동 ㅋ)에 자리잡고 있는 멋진 레스토랑의 위층, 동명의 호텔이다. 

분위기도 그렇고 구글맵에도 호텔이 아닌 레스토랑이 잡히는 걸로 봐서 본업은 레스토랑이고 호텔은 부업같다. 우리를 맞아준 것도 레스토랑 유니폼을 갖춰 입은 직원들이고. 입지는 길다란 골목 거의 끝쪽에 가까운데 우리가 일방통행 길을 역주행하여 진입하려고 했더니, 골목 끝에서 지키고 있던 경찰이 우리를 막아섰다. 피노키오 가요, 하니까 그럼 오케이, 가라고 해서 잠깐 역주행했는데, 그건 그렇고 저들은 웬 경찰인가 했더니 마케도니아 대사관 경비 중이었다. 

 




배정 받은 방(투숙객이 없어서 그런지 제일 좋은 방을 받았다)이 마음에 드니까 김원장 화가 조금 풀렸다 ㅋㅋㅋ

발코니에서 180도로 펼쳐지는 프리슈티나 뷰를 보고 나더니 좀 더 풀렸다 ㅋㅋㅋ 다음은 김원장이 찍은 발코니 뷰



호텔에 들어올 때 레스토랑을 관통해서 들어왔는데 그냥 척 보기에도 포스가 있는 집이었다. 일단 룸서비스 주문부터 먼저 하고 뒤늦게 평을 찾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맛집+멋집이었다(맛집과 멋집이 동시에 되긴 쉽지 않는데). 이번 여행 중 고기를 몇 번 썰었는데, 김원장왈 이 집 맛/멋이 한국에서 먹는 것과 가장 흡사하다며 제일 만족스럽게 먹었다고 했다. 저녁도 이 집에서 시켜 먹어야 하나 어쩌나 갈등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설마 밥 담당이 밥하기 싫어서 요령을 피우는 건 아니겠지) 맛난 것 덕분인지 기분이 거의 풀린 것 같았다 ㅋㅋㅋ  


(등심 스테이크와 볼로네이즈 스파게티 - 였던 걸로 기억 아 진짜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

스테이크 고기는 어떻게 구워 드릴까요, 파스타는 스파게티로 해드릴까요 펜네로 할까요 물어왔다)

(따라온 빵 맛도 괜찮았다. 배불러서 다 못 먹었다. 아까비. 토탈 13유로)


김원장은 소화가 좀 되자 다시 화가 스물스물 기어올라오는 모양이었다(한국 들어가서 당뇨 검사라도 해봐야 하나. 아냐, 내과보다는 정신과 고고씽 ㅋㅋㅋ). 기존까지 코소보의 입장을 찬성해 오던 쪽에서 오늘자로 세르비아의 입장을 찬성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꾸겠다나 뭐라나 ㅋㅋㅋ 이래서야 코소보에 미래가 있겠느냐 어쩌구저쩌구 혼자 또 한동안 투덜거리더니 급기야 코소보 관광청에 항의 서신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런 액션이라도 취해야 좀 낫겠다며.


이번 여행 준비를 하면서, 다른 주변국이라면 몰라도 - 심지어 알바니아에도 있었던 듯 - 코소보의 경우 정부 산하 공식 관광청 같은 걸 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공식 기관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장 마음에 드는 내용을 담고 있었던 http://beinkosovo.com/ 를 열어 이메일 주소를 하나 땄다. 그런데 대체 뭐라고 쓸건데? 오늘 벌어진 일을 기술하고 코소보에 대한 첫 인상이 완전히 구겨졌다, 이래서는 친구들에게 코소보 여행을 권할 수 있겠냐, 뭐 대략 이런 내용이라더라(감수 안 했으면 오늘부터 코소보 독립을 반대한다... 이런 내용까지 막 나갔을지도 ㅋㅋㅋ) 답장이 과연 올까 싶었지만... 하여간 가감첨삭 대충 해서 보내긴 했다. 그렇게 발송을 하고 나서야, 


프리슈티나 구경



(여기서 또 만나네. 알바니아 크루여 성 박물관에서 뵙던 분, 이름하야 스칸데르베그)


전쟁을 겪고 태어난지 10년도 안 된, 신생 독립국이라서일까. 구시가 유적들은 상당수가 보수 중이었고 신시가 보행자 도로의 모습은 상당히 어설펐다. 구시가야 그렇다치고 보행자 도로는 뭐랄까, 우리도 여느 유럽처럼 이렇게 번듯한 - 게다가 도로폭도 상당히 넓은 축에 속하는 - 구역을 만들었소!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냥 앙꼬 없는 찐빵, 사연 없는 편지 같았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건지 모르지만 도로를 감싸고 있는 건물들에서 전혀 고풍스러움이나 우아함이 느껴지지 않았으며, 몇 없는 노점상들이 내놓고 파는 물건들도 마데인차이나 조잡하기만 했다(기존에 지나온 나라들보다 더).


코소보 관련 최근 뉴스 -그다지 발랄할 게 없는- 를 몇 개 더 읽고 길을 나서서 그런지, 세상 어디나 크게 다를 것 없는 중장년층의 얼굴은 더욱 노곤해 보였다. 국경을 맞댄 이웃나라 중 전쟁을 했던 세르비아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몬테네그로나 마케도니아가 코소보에 긍정적 도움이 될 만큼 여유 있는 나라들도 아니고, 친정 격인 알바니아는 뭐 그 두 나라 만큼도 능력이 안 되니... 문득 코소보의 자생력이, 그들의 잠재력이, 앞으로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내일이면 나는 이 나라를 떠나지만, 오늘을 기점으로(=김원장과 다른 의미에서) 앞으로 미디어를 통해 만나는 코소보는 예전과 분명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리라. 우리가 남이가


(때마다 전역에 아잔이 울려 퍼지는 모습은 웬지 참 좋았다(전생에 무슬림이었던 걸까). 밤은 더욱 아름다웠다. 발코니에 한참 서 있었다) 


참고로 코소보에 입국했던 토요일 오후, 비인코소보닷컴에 다소곳한(?) 항의 이메일을 보내놓고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월요일, 비인코소보닷컴에서 답장이 왔다. 


내용은 "우리 말고 이스탄불에 있는 코소보 대사관 이메일 주소를 알려 드릴테니 이 내용 그대로 거기에 보내 보세요. 아마도 거기가 이 일을 처리할 최고의 담당 기관일거에요. 그 쪽에서 당신이 겪은 일에 대해 어떻게든 해결할 거라 우린 확신해요" 블라블라. 


코소보 내에서 벌어진 일을 왜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코소보 대사관에서 처리하는지는 모르겠지만(혹 김원장 이름이 터키쉬 이름 같았나) 여하튼 답장을 꼭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한편으로는 놀랍고 반가웠다. 김원장은 이런 식으로 다른 곳으로 토스해 버린다며 투덜거리면서도 이스탄불로 포워드 클릭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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