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으로 배달된 영자 신문을 들고 우아한 척 조식당에 들어섰다. 자리를 잡은 뒤 무심코 신문을 펼쳐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어제 태국 공항이 점거되었다는 소식의 여파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어젯밤 뭄바이에서 큰 테러가 있었다는 기사를 읽게 된 것이다. 당근 영어가 딸려서 헤드라인 몇 개만 더듬더듬 읽었을 뿐이지만 사망자가 80명에 이른다는 둥, 뭄바이의 타지 호텔이 공격을 받았다는 둥, 동시다발적으로 규모가 꽤나 큰 테러였음을 짐작하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자체 참고 자료 : 2002년 여행 중 만났던 뭄바이 타지 호텔 

 

처음 든 생각은 '이거 정말 큰 일인걸? 이게 대체 뭔 난리야.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였다. 하지만 잠시 후 든 생각은 '그래도 (루트상 뭄바이와는 거리가 있으니) 우리 여정에는 별 일 없겠지?' 였다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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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늘 가야할 곳은 인도 최고의 관광지로 손 꼽히는 타지 마할이 있는 아그라였는데 다른 듣보잡도 아니고 거대 도시 뭄바이가 테러의 공격을 받았다니 움찔, 하게 되는 것도 분명 사실이었다. 하지만 기차표도 미리 구매해 둔데다(으응?),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타지 마할은 더욱 삼엄한 경계를 펼칠 거라는 김원장의 밑도 끝도 없는 이론(?)에 힘입어 우리는 예정대로 짐을 꾸렸다.  

짐을 모두 꾸리고 출발 직전. 어쩐지 김원장이 비장해 보인다.

 

호텔스럽게 내어 준 체크아웃 영수증

 

오토릭샤는 바로 호텔 앞에서 잡았다. 워낙 호텔을 들락날락 할 때마다 우리가 보이면 몇 명씩 호객을 해대곤 했으니 잡긴 어렵지 않았다. 역까지 70루피를 부르는 아저씨와 살짝만 흥정을 해서 60루피에 콜. 이제 우리 사회적 지위와 체면도 있으니 너무 빡빡하게 굴지말고 적당히 속아주면서 여행하자구, 다짐하고 이번 인도 여행길에 나섰지만, 끝내 체크아웃 하면서 참지 못하고 묻고야 말았다. 여기서 역까지 오토 릭샤로 대략 얼마면 돼? 프론트 데스크 아저씨도 순간 약간의 유도리를 발휘하는 듯 보였지만 60루피 정도가 적당할 것이라고 하더라.   

 

럭나우역으로 가는 길

 

처음엔 말 없이 잘 달리는 싶더니 결국 럭나우에서 유명한 치칸(금실, 은실 따위로 만든 자수 제품으로 나와는 거리가 먼 부류)을 쇼핑하고 가라고 계속 우리를 꼬시던 릭샤 드라이버. 인도는 나의 관대함을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하는 나라다.   

 

우리가 예매한 기차의 스케줄은 오전 10시 30분 럭나우를 출발하여 17시 25분 아그라(칸트 Agra Cantonment)에 도착하는, 대략 7시간 밖에 안 걸리는 -_-; 일정이었다. 고락푸르에서 열차가 제 시각에 출발했던 경험이 있던지라 서둘러 플랫폼으로 가보니 우리가 타야할 기차는 연착할 것임을 자랑스레 알리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기차역에서 하릴없이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어디선가 원숭이 모자가 나타나 정차되어 있던 기차 위로 오르락내리락 쇼를 시작했다. 그 모양새가 우스워 구경을 하다가 문득 내 근처에서 같은 광경을 바라보며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한 여성을 발견했다. 말은 안 통하지만 살짝 공감의 눈인사를 나누고 나니 괜시리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졌다. 

 

기차는 예정된 시각보다 30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이 정도면 준수해, 여기며 서둘러 우리 좌석을 찾아갔더니 (역시나) 누군가가 이미 앉아 있었다. 표를 보여주며 여기가 우리 자리임을 밝혔지만 살짝 엉덩이를 들어 공간을 내는 시늉만 할 뿐 (역시나) 절대 비키지 않았다. 속으로 下心을 되내여 봤지만 (이제는 익숙하기까지한) 그들의 뻔뻔한 대처에 화가 났다. 그래, 별 수 있나. 인도에 왔으니 인디안 스타일을 따라야지. 투덜거리며 나는 그냥 원래 우리 자리 중 하나였던 슬리퍼 가장 윗 칸으로 기어 올라가 반쯤 눕듯이 몸을 걸쳐 올렸지만 김원장은 낮 시간부터 그렇게 가기 싫다며 근처에 여유가 있는 좌석에 끼어 앉았다.  

 

그렇게 두 시간을 넘게 달린 뒤에야 검표원이 나타났다. 우리가 표를 보여주면서 원 자리에 앉고 싶다고 하니 그때서야 아저씨가 우리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을 몰아내고 -_- 제 자리를 찾아주었다. 이제야 같이 마주보고/혹은 위 아래로 편히 앉을 수 있게 된 우리. 이젠 정말 이대로 무사히 아그라까지 가는건가, 했는데...

 

어느 역에선가 집시떼로 보이는 한 무리가 우르르 올라타더니 요란하게 관악기+타악기+현악기를 불고 쳐대고 울리며 좁은 복도를 지나가면서 구걸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일명 봉으로도 불리는 외국인인 우리를 발견한 그들 중 한 명이 김원장 옆에 찰싹 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려 들었다. 하지만 김원장으로 말하자면 날카롭게 귓전을 울려대는 악기들 소리가 싫어 진작부터 귀마개를 낀 채로 귀를 틀어막고 있던 처지였으니 그(성 정체성이 불분명한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그녀'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가 엄청난 소음과 함께 계속 돈을 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김원장 본인을 붙잡고 흔들어 대는 것이 결코 좋을 리가 없었다. 그/그녀가 그 쯤에서 이 외국인은 왕 짠돌이인가 보다, 하고 그냥 포기하고 가만히 지나쳤음 좋았을 것을, 몇 번이고 김원장을 흔들다 원하는 돈이 안 나오리라 확신이 선 그/그녀는('그녀는'이라고 쓰고 '그년은'이라고 읽는다 -_-) 갑자기 김원장의 볼을 꼬집어 좌우로 흔들고는 다음 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내가 무어라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맨발로 앉아있던 김원장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그녀의 뒤로 미친 듯이 뛰어가(그러니까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그/그녀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는(이 장면에선 어쩐지 갈기는, 이란 표현이 어울리긴 한다만) 것이 아닌가!

 

뜻밖의 상황에 넋이 나간 나는 할 말을 잃었고

여전히 씩씩거리며 내 곁으로 돌아오는 맨발의 아베베 김원장이 내 맞은편에 털썩 앉고서야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지,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겨우 물었다.  

 

김원장 왈,

안 그래도 바로 옆에 서서 때려대는 소음 때문에 괴로워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생판 모르는 걸인 모드의 누군가가 곁에서 자신을 잡고 흔들다 심지어 꼬집기까지 했을 때

기분이 완전 더러워지면서 확 폭발했다고 한다.

 

허허허.

 

김원장은 그 후로도 한동안 이미 일어난 화 때문에 스스로 매몰되어 괴로워했고,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았을 때 그/그녀의 그 황망했던 표정과 그 뒤로 순식간에 이어지던 체념의 표정(마치 맞는 일에 익숙하다는 듯)이 좀처럼 잊혀지질 않았다. 왜 그/그녀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고도 대들지 않았을까? (김원장 말로는 그/그녀가 먼저 잘못했음을 본인 스스로 인정했기 때문이라는데 ㅎ)

 

여하튼 이런 사건을 겪는 동안에도 주변 사람들은 내내 우리를 강 건너 원숭이 쳐다보듯 했고 좀전의 제자리 찾기 사건과 맞물려 우리는 그동안 가끔은 그리워하기까지 했던 인도의 기차 여행에 대하여 다시금 재고해 보게 되었다(이 날 일기에는 "이 꼴 보기 싫으면 3A 타야지"라고 쓰여있다 T_T).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 날 기차는 가뿐하게 2시간을 연착해 주셨고 그리하여 아그라역에 지친 몸을 끌고 내리니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음... 이래서야 (환할 때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기 위해) 타임 테이블을 아무리 연구해 봐야 소용 없지 않은가... 잠시 상념에 젖어있다가 역앞에 포진한 택시와 오토 릭샤 드라이버들의 호객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다시 급 빠릿빠릿모드(?)로 돌아선 우리는 역에서 좀 떨어진 타지 마할의 바로 남측으로 펼쳐진, 저렴한 숙소가 모여 있다는 타지 간지(Taj Ganj) 지역으로 이동키로 했다.

 

아그라는 최고의 관광지답게 교통편에 있어서도 선불(Prepaid)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는데, 역을 나와 먼저 눈에 확 띄는 부스는 prepaid taxi 용이고, 그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서 prepaid 오토릭샤 부스를 찾을 수 있다. 잠시 지도를 살펴 보고는 역에서 타지 간지까지 그렇게까지 멀지 않은 것 같아(대략 5Km이내로 보였다) 택시보다 저렴한 오토릭샤를 타고 가기로 했는데(52루피) 깜깜한 밤이고 처음 와 보는 곳이라 그런건지, 아니면 지도 축척의 문제인지 생각보다 꽤 달려도 목적지가 나타나지 않아 순간 이거 또 뭔 일 나는 건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저 앞에 환한 불빛군이 보였고 곧 우리는 깜짝 놀랄만큼 배낭여행자에 친화적인 마을, 타지 간지에 도착했다. 

 

이제야 지친 몸과 맘에 휴식을 줄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하차하는 그 순간까지 끈질기게 우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오토릭샤 드라이버 아저씨의 호객(내가 이 동네 잘 아는 좋은 숙소가 있으니 소개 시켜 주겠다+승차비를 더 달라는 구태의연한 내용)을 겨우 뿌리치고는, 론리플래닛에서는 일언반구 언급을 안 하고 있지만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타지마할 남문 바로 지척의 라즈 호텔(트윈 베드 붙여놓고 더블룸이라 부르던 방 250루피. 핫샤워 가능. TV는 없음)에 여장을 풀었다.  

 

이렇게 겨우 하루를 끝내는구나 했는데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그야말로 또 하나의 테러에 가깝던, 마지막의 놀라운 반전!

 

내일은 금요일이라 타지 마할이 문 닫는단다!

(나는 타지마할만 휙 보고 이런 관광지는 얼렁 떠 줄 생각으로 토요일 아침 6시 15분에 아그라를 떠나는 기차표를 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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