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씨 : 맑음

@ 이동구간 : 묵티나스(3,760m) - 자르콧(3,550m) - 킹가(3,280m) - 카그베니(2,800m) / 960m 하강

@ 총 소요시간 : 2시간 30분

 

간 밤에 추워서 좀 엎치락 뒤치락한 점을 제외하고는, 라운딩 시작 이래 제일 푹 잘 잔 날이었다(이제 아무 걱정이 없으니 그럴 수 밖에 ㅎㅎ). 안 그래도 김원장이 시끄럽다고 썩 마음에 안 들어하던 방이었는데 어제 낮잠 자고 밤 9시에 깨(이게 낮잠이냐) 불을 켜보니 어쭈, 다른 방 모두 불이 들어오는데 우리 방에만 불이 안 들어온다는 사실마저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간에 다시 직원 불러 고친다한들 어차피 밤에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에라, 그냥 일찍 잠들기로 했는데(말하자면 오후 6시 30분부터 내리 잔 셈 -_-) 그래서 그런가, 알람도 없이 오전 6시에 저절로 눈이 번쩍 떠졌다. 산을 넘어와서 그런가, 지나온 토룽 라 반대편 마을들보다 어쩐지 해가 더 늦게 뜨는 것 같은 느낌. 덕분에 어두운 방안에서 묵티나스에 아침 햇볕이 천천히 내려드는 광경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었다. 아, 좋구나(이제 올라갈 일 없다는 ㅋㅋ).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카그베니(Kagbeni). 네팔에 오기 전 산늪(http://blog.naver.com/mtswamp)님께서 다음과 같은 정보를 주셨던 곳이다. 

 

@ 까끄베니와 마르파


까끄베니는 좋은데, 참 애매한 위치에 있어요. 묵티나트에서 2-3시간 거리죠.

그래서 참 하룻밤 자기도 뭐하고... 좋긴 한데, 참 그래요.

그래서 까끄베니에 하루 묵어갈라면 묵티나트에서 절구경, 마을 구경, 빈둥빈둥하고 점심 먹고 출발하면,

까끄베니에 잘 수 있지요.

마르파는 무조건 하룻밤 자야죠. 좀솜은 황량해서 하룻밤 지내기 좋지 않아요. 

 

그러니까 카그베니(산늪님 표현으로는 까.끄.베니 ^^)와 마르파에서 자되, 좀솜에서는 자지 말라는 뽀빠이 아저씨의 말씀. 오케이. 지도를 들여다보고 산늪님 충고 그대로 오늘은 묵티나스에서 뒹굴거리다 카그베니까지만 가고, 다음날 카그베니에서 출발, 좀솜에선 안 자고 그대로 휙 지나쳐 마르파까지 가기로 결정(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보통 묵티나스에서 공항이 있는 좀솜까지 하루 일정으로 움직이는 트레커들이 많다. 이 경우 카그베니를 들리려면 루트상 약간 도는 꼴이기 때문에 보통은 카그베니를 들르지 않고 곧장 지름길로 좀솜을 향해 빠지거나, 혹은 카그베니를 들렸다 가더라도 잠깐 구경만 하고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에 비하자면 이제부터 우리는 다른 트레커들과 엇박으로 나아가려는 중).

 

<부활한 김원장, 식당에서>

 

산늪님 말씀대로라면 오늘 구간은 무척 짧으니(겨우 2~3시간 거리에 그것도 내리막길!) 일찍 묵티나스를 뜰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어제 퍼질러 자느라 본의 아니게 뛰어넘은 저녁 식사 탓에 아침부터 서둘러 우리의 영원한 친구 계란 후라이, 잼 토스트, 밀크티(잔당 45루피. 토룽 라에 비하면 1/3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높은 축에 속한다)까지 먹고 나니 몸이 근질근질, 어쩐지 길을 나서야 할 것만 같다. 그동안 매일 같이 해오던 하드 트레이닝(?)을 우리 몸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혹자에게는 벼르고 별러 산 넘고 물 건너 성지 순례를 하러 오는 묵티나스이기도 하니 여기 온 김에 순례지가 되는 근교 사원들을 둘러볼 만도 한데, 어쩐지 그 쪽으로는 마음이 썩 내키질 않아서 그냥 일찌감치 카그베니를 향해 내려가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다. 오전 8시, 묵티나스 출발.   

 

<어쩐지 묵티나스엔 정이 안 가, 괜시리 앙탈부리며 출발하는 길>

 

<아침부터 나온 가판이 있네. 그만큼 호객도 일찍부터>

 

<어제 내려올 때만 해도 문명이 그립더니, 그새 PC방 광고를 보며 씁쓸해 하고 있다는 -_-;>

 

 

<갑자기 시야를 가리는 엄청난 전깃줄. 이젠 사진 찍기도 어렵겠어>

 

<아웅, 그래도 멋지다는>

 

<사람들이 거니는 시간이 되면 노점상 아주머니는 쇼(?)를 보여 주시리라>

 

 

 

<아직도 묵티나스엔 해가 온전히 들지 않았다>

 

<길다랗게 뻗은 모양의 묵티나스 마을을 벗어나기 직전에 발견한 Jeep Stand !!!>

 

<그렇구나. 정말 여기까지 차가 다니는구나. 실제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차량을 보니 가슴 한 구석이 착잡>

 

토룽 라 바로 아랫마을 묵티나스에까지 오가는 차가 있다니! 순식간에 오지에서 문명 세계로 뚝 떨어져버린 느낌. 이젠 우리의 남은 여정도 내내 차와 함께련가. 불행 중 다행으로 묵티나스를 벗어나면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원래부터 사람들이 걸어다니던, 마을과 마을을 잇는 옛길이고 다른 하나는 아마도 최근에 새로 생겼을, 차량이 다닐만한 보다 넓고 평탄한 도로. 차량을 타고 내려가는 몇 트레커/순례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옛길로 들어선다.

 

<묵티나스를 벗어나면서>

 

<지나온 토룽 라 반대편 마을들과는 약간 다른 형식의, 보다 많은(?) 정보를 담은 안내판>

 

 

 

 

어제의 고통은 모두 잊었는지, 김원장의 기분은 최상이었다. 그와 절대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나 역시 더하면 더했지, 절대 그 이하는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제의 찬란(!)했던 기억을 나누며,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을 하면서 지금까지 겪었던 경험들이 지난 티벳, 파키스탄과 뉴질랜드 트레킹의 경험들을 합친 것과 거의 맞먹지 않겠냐며 서로를 한껏 추켜 세우기도 했다. 그야말로 충만감이 넘쳐흐르던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어제의 첫인상으로는 분명 티벳이었지만, 이 곳의 생김 생김을 보면 볼수록 티벳과는 다른,

뭐라 설명키 어려운 이 곳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난다. 요거이 바로 "무스탕 삘"일까?> 

 

<저 아래 빨간 지붕의 건물을 가진 자르콧 마을이 보인다>

 

 

 

묵티나스를 벗어나면서는 분명 트레커들을 위한 도로 위를 밟고 있었는데 어느새 차가 다니는 도로와 트레커들이 다니는 도로가 겹쳐졌다 헤어졌다를 반복하고 있다. 최대한 차가 다니는 길을 피하려 아둥바둥 샛길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트레커들.

 

<자르콧에서 바라본 묵티나스. 벌써 제법 내려왔군. 아직도 묵티나스 뒷배경의 산을 보자니 어제의 기억에 후덜덜>

 

 

<다음 마을 킹가. 마을이라고 하기엔 넘 작지만>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에 올라서서. 묵티나스를 떠난 뒤로 차 서너대가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토룽 라를 넘어 묵티나스부터 카그베니까지는 저 아래 종 川 (Jhong Khola)과 함께 걷는다>

 

<저 앞쯤에서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왼편으로 가면 에클레 바티(Ekle Bhatti)를 거쳐 좀솜으로 질러가는 길이고

오른편으로 가면 카그베니를 거쳐 약간 돌아가는 길이다>

 

 

<우리는 당근 오른편, 카그베니쪽으로 고고씽. 김원장 앞으로 풀만이 우리 배낭을 메고 걷고 있다. 풀만의 발걸음도 한결 가볍 ^^.

사진상 김원장 왼편으로 평행하게 난 길은 카그베니까지 지프가 다니는 길

(으음, 그런데 저 정면으로 보이는 흙빛 산 꼭대기로 가늘게 난 지그재그 길은 무엇? -_-;)

 

<묵티나스행 순례객들로 보이는 당나귀 무리가 우리가 내려온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근처에 딱히 배불리 먹을 건 보이지 않지만 하여간 염소떼>

 

 

 

<저쯤이라면 아마도 툭체 피크, 6920m>

 

 

묵티나스를 떠난 뒤 초반에는 그래도 내리막길다운 내리막길이 잠시 있었지만, 어느 순간 완만한 경사로 바뀌어 버린지라 이래서 오늘 카그베니까지 고도를 960m나 낮춘다는 것이 확 안 와닿았던 터, 좀솜으로 빠지는 갈림길을 지난 뒤 평지마냥 뻗은 길을 잠시 걷다가 갑자기 만난 절벽. 그 끝에 서니 저어~기 아래, 오늘의 목적지, 카그베니가 드디어 보인다. 우와, 저 밭들 좀 봐. 저 네모반듯한 밭들은 아마도 사과나무 밭이겠지? 끝없이 이어지던 무채색 풍경 속에서 간만에 만난 알록달록한 풍경이 우리의 시선을 화악~ 사로 잡는다. 봄철이나 여름철, 신록이 무성한 때 이 길을 걷는다면, 그리하여 이 절벽에서 갑자기 저 아래 나타난 카그베니를 만난다면 그 감흥은 아마도 몇 배 더 하겠지. 하지만 지금도 이렇게 멋진걸. 토룽 라를 오르면서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등장했던 마을이 '탈' 마을이었다면, 아마도 내려갈 때는 카그베니가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 비록 오늘이 하산 첫날에 불과하지만서도 ^^;

 

<높은 산과 깊은 계곡 사이 완전히 폭 박혀 있는 마을, 카그베니>

 

<절벽 위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 사람들 뒤로 우리가 지나온 길이 보인다. 보시다시피 완~만>

 

절벽 끝에서 바라보는 카그베니가 사람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안타깝게도 거기까지 이르는 길은 다시 급경사에 가깝다. 그것도 내가 매우 싫어라~하는 미끄러운 노면. 뭐 어제 토룽 라에서도 무사히 내려온 몸인데 여기서 구른다고 뭐 죽기야 하겠어? 김원장 앞세우고 발끝에 힘주고 출발. 파키스탄에서 라카포시 베이스캠프를 다녀온 뒤 험한 길을 만나면 매번 김혜수 톤으로 "나 이래뵈도 라카포시 베이스캠프 다녀온 여자야" 했었는데, 이젠 바뀔 듯. " 나 이래뵈도 토룽 라 넘어온 여자야"  

 

<몇 번 살짝 미끌어지긴 했지만 끝내 엉덩방아 없이 잘 내려와 한결 가까워진 카그베니를 찰칵,

사진상 오른편으로 넓은 폭의 칼리 간다키(Kali Gandaki) 강도 등장>  

 

<아쉽게도 카그베니에서 우리를 처음 맞은 것은 지프와 공사차량. 마을 초입 언덕 위에 곰파인지 롯지인지 모를 큰 건물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기대하던 카그베니. 비록 공사판과 질퍽거리는 마을 입구 풍경으로 인해 첫인상은 좀 구겨졌지만, 뭐 그래도 묵티나스를 떠난지 겨우 2시간 30분 만에 오늘의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데서 기쁨이 송송. 한국을 떠나올 때 "카그베니에서는 '뉴 안나푸르나 롯지'의 음식이 맛있다"는 정보를 끄적여 온 게 기억나서 우선 '뉴 안나푸르나 롯지'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안내판을 따라 외곽 방면으로, 즉 마을 중심부와는 반대인 왼편으로 얼마 가지 않아 바로 등장. 흠... 여긴 너무 초입인데다 외곽이잖아? 2시간 30분의 가뿐한 내리막 일정으로 여느 때와는 다르게 아직 체력이 넘쳐나던 우리는 일단 마을을 한 바퀴 먼저 돌아보기로 했다. 풀만, 미안하지만 우리 여기 한 바퀴만 돌아보자. 어디로 결정할지 모르니 배낭 메고 따라와 줄래?  

 

<상상 이상의 인프라를 보여주던 카그베니>

 

마을의 규모에 비해 생각보다 번화(?)한 골목을 가지고 있어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마을 한 가운데로 제법 굵은 시냇물이 콸콸 흘러가는 카그베니를 이 다리 저 다리 건너가며 한 바퀴 구경하다보니 느낌이 확 왔다. 흠, 여기 아주 마음에 드는데? 한 바퀴 도는 중에도 그럴싸한 숙소들을 몇 개나 지나쳤지만 다리 건너편의 한 숙소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니 그 숙소의 옥상 식당에 이미 외국인들이 여럿 나와 일광욕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 그 곳은 과감히 제끼기로 하고 두번째로 마음에 들었던, 아까 절벽 위에서 카그베니를 내려다보았을 때부터 눈에 확 들어왔던 파란 지붕의 롯지가 결국 오늘의 숙소로 당첨되었다(절벽 위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현지인의 집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와서보니 역시나 롯지였다는).     

 

 

명칭 : Holiday Inn (묵티나스의 '밥 말리'에 이어 어째 숙소 이름이 점점 난감해지고 있다. -_-; 그러고보니 묵티나스에서는 톰과 제리, 나이팅게일 등의 간판도 봤다) 

트윈룸 숙박비 : 200루피 (화장실 별도). 방값이 확 저렴해졌다. 숙소 건물은 총 3층으로 1층은 수퍼마켓(?) 및 주방, 2층은 식당과 샤워실(화장실), 3층엔 손님 방 4개와 식당겸 거실, 화장실이 하나 있다. 화장실은 좁지만 지금까지의 묵었던 숙소 중 최고로 깨끗하고, 2층 샤워실에서는 순간 가스 온수기로 핫샤워가 가능하다. 방 전등은 오락가락하지만, 3층 거실에서는 거뜬히 충전 가능.

특이사항 : 한 건물 안에 숙소로 운영하는 Holiday Inn과 식당인 Mid Western Restaurant카페 역할을 하는 Dutch Bakery, 가게인 Himalayan Food Store가 모두 있는데 규모는 다 코딱지만해서 따로 이름을 붙여 놓은 게 웃길 정도다. 처음엔 스위스 산장/펜션 같은 겉모습에 이끌려 아무 생각없이 들어섰지만 좁은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가 식당겸 거실로 쓰이는 공간을 딱 보는 순간, 방을 보기도 전에 여기다, 싶었다. 우리가 가장 사용하고 싶었던 방은 이미 예약이 되어 있었고, 그 다음으로 마음에 들었던 방 역시 백인 솔로 트레커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아있는 방 2개 중에 그나마 두 면으로 창이 난 방을 선택했다. 나중에야 든 생각이지만 이 숙소에 투숙객이 가득찼다면 이 숙소 특유의 아늑한 분위기가 안 났을 성 싶다. 우리의 경우 예약되어 있다는 손님들이 끝내 나타나질 않았고, 또 다른 투숙객마저 솔로였던지라 우리 둘에 눌려서 공용 거실에 얼굴 한 번 내밀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 부부의 전용 거실마냥 널부러져 즐겼다는.    

 

<1박에 200루피 짜리 우리 방. 크진 않지만 채광이 좋다>

 

<나를 화~악 유혹한 3층의 거실. 이 분위기에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다는>

 

<흠... 정녕 이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단 말이오? 그래도 명색이 히말라야 산골짝이란 말이오. 버럭>

 

분위기 너무 좋아~ 를 외치며 눈 돌아가는 메뉴판을 뚫어져라 들여다 본다. 오호, 후라이드 치킨 콜! 스파게티 콜! 콜라도 한 병 시키고 아래층 가게에서 때 아닌 프링글스에 눈이 뒤집혀 -_-; 한 번 열면 멈출수 없데! 를 외치며 허겁지겁 냠냠. 어흑, (서빙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후라이드 치킨도, 스파게티도 너무너무 훌륭해! 묵티나스 이후 너무 급격히 문명화되었다고 투덜거릴 때는 언제고... 쩝. 그러나 주문한 밀크티에서마저 은은히 풍기는 향에는 정말 감탄할 밖에.

 

(음식을 맛나게 요리한다는 뉴 안나푸르나 롯지가 아닌데도 이 정도 수준이라니)

카그베니의 어지간한 숙소들 모두 음식을 맛나게 하는 게 아닐까? -> 우리의 가설

 

<치킨 색은 좀 깜놀 ^^; 이었지만 비주얼에 한 번 놀라고 맛에 두 번 놀랐던 후라이드 치킨.

참고로 우리는 히말라야 산중을 헤매고 다닌지 어언(?) 열흘이 넘은지라 웬만큼 질긴 고기는 다 용서된다는>

 

<역시 비주얼부터 점수 먹고 들어가는 스파게뤼~>

 

두 면으로 훤히 트인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따땃한 햇살과 함께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 가장 여유로운 오후를 만끽한다. 아웅, 좋구나 좋아. 우리 카그베니에 하루 더 있을까? 카그베니가 너무 마음에 들어 김원장과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데... 그런데 만약 하루 더 있는다면, 그 땐 뭘하지? 하는데서 일단 답이 막힌다. 급할 게 있나, 오늘 하루 보내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자구.    

 

우리가 배 두들기며 널부러진 사이 풀만은 샤워와 동시에 밀린 빨래를 해치운 모양이다. 젖은 머리 그대로 등장한 풀만이 베란다에 빨래를 너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문득 아, 나도 볕 좋을 때 빨래를 해 널어야겠다, 하는 간만에 주부다운 생각이 번쩍. 그러나 김원장 속옷 두 벌 빨고는 힘이 빠져서 포기 -_-. 그래도 숙소 앞을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졸졸 들려오는 베란다 빨랫줄에 어설프게나마 빨래를 널고는 잠시 행복(그러나 오후가 되면서 바람이 몹시 불어왔다. 변변한 빨랫집게가 없었던 터라 거실을 뒹굴다가 툭, 하고 빨래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 얼른 나가서 다시 걸고, 또 다시 걸고... 그래야 했다는)

 

거실 창 밖을 내다보니 우리가 오늘 걸어 내려온 길이 쫘악 펼쳐지는지라 감상에 젖기 좋았다. 저 머리에 눈을 인 두 산 봉우리 사이 어드메 토룽 라가 있겠지. 어제 우리가 바로 그 높은 고개를 넘었었지. 토룽 라를 넘으며 찍었던 사진들을 노트북에 다운 받아 좀 더 큰 화면으로 즐기면서 또 한 번 서로 수고했다, 기특하다, 훌륭하다, 지치지도 않는 에너자이저 자축연을 즐겼다(이런 쇼를 남들이 봤다면 엄청 대단한 일 한 줄 알겠다).   

 

 

한편으론 꿈만 같은 지난 경험에서 오는 자족감에 히죽거리다 창 밖에서 갑자기 현실로 확 돌아오는 장면을 발견했다. 옆 집 옥상인데 크기로 보아 염소는 아닐테고 아마도 물소/야크인 것 같은데 알맹이는 벌써 싹 걷어치우고 가죽만 벗겨 따로 말리시는 모양이였다. 핏자국이 선연해서 얼핏 몬도가네식으로 보였지만, 이 동네서 그들의 머리부터 꼬리까지의 알찬 쓰임새를 떠올려보자면 그야말로 일상의 한 풍경일 뿐.

 

 

 

뭐 좋은 장면이라고 계속 보냐, 마을 마실이나 나가보자는 김원장의 닦달에 나서는 산책길. 숙소를 벗어나기 전, 주인 아주머니께 여쭤볼 것이 있어 1층 주방에 들렀다가 여기서도 피와 살이 튀는 현장을 목격하다. 물어보니 역시 야크 고기라는데 부위별로 제각기 용도에 맞게끔 해체해서 조리용으로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아주머니는 어디 가시고 남정네 둘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더라는.

 

 

숙소를 나선 우리 발길은 저절로 어퍼 무스탕(Upper Mustang) 쪽으로 향했다. 일반적으로 무스탕을 허가서가 필요없는 Lower 지역과 허가서가 필요한 Upper 지역으로 나누긴 하지만, 보통 무스탕 트레킹이라고 하면 카그베니 북쪽 칼리 간다키 강이 흐르는 계곡 지역을 한 바퀴 도는 어퍼 무스탕 지역 트레킹을 말하므로 카그베니는 본격적인 무스탕 트레킹에 있어 첫 마을이자 끝마을인 셈이다. 

 

 

카그베니 마을 북단에 설치된 안내판에서 보시다시피 어퍼 무스탕은 허가서가 따로 요구되는 Restricted Area로, 10일 짜리 (기본) 무스탕 트레킹을 하는데 필요한 허가서를 발급 받는데 1인당 700불(USD)이 든다는 무시무시한 T_T 소문이 도는 곳이다(여기에 더해 만약 10일 이상 트레킹을 한다면 11일차부터 1인 1일 70불의 추가 요금이 붙는단다). 뭐 이 마당(=안나푸르나 라운딩 중 마악 토룽 라를 넘어온 시점)에 무스탕 지역을 가고 싶다는 마음은 당연 눈꼽만큼도 없었지만, 그래도 거금을 내고 허가서를 받아야만, 그것도 1년에 딱 1000명 뿐인가 밖에 들어가지 못하는 지역이라고 하니 괜시리 막 눈에 담아두어야 할 것만 같았던 무스탕. 네가 그리 귀하신 몸이라 이거지?

 

옆에선 김원장은 어제 본인이 괴로워했던 기억은 벌써 까마득히 잊고 다음엔 꼭 무스탕을 가보자며 꼬시고 있다(아까 먹은 후라이드 치킨이 사실은 후라이드 까마귀였을런지도). 뿐인가,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다시 한 번 해도 그 때는 이번과는 또 다른 풍경들이 눈에 보일거라나 뭐라나. 나참 웃기지도 않아서. 김원장이 떠드는 양을 귓등으로 듣고 있던 내가 무스탕에 꽂힌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당장 눈에 들어오는 초반부 길부터 쫙쫙 미끄러질 것처럼 보인다고 (거절) 했더니 그럼 그런 구간은 어차피 빌려갈 당나귀를 타고 넘어가라고 한다. 엥? 벌써 다음 시나리오 완성 된거야? 그런거야?       

 

 <무스탕 트레킹을 한다면 이 칼리 간다키 강의 상류를 향해 계속 나아가면서 좌우 마을들을 둘러보게 되리라>

 

더 나아가지도 못 하는데 우리는 쉽게 이 무스탕 전망대를 떠나지 못한다. 네팔 정부가 외국인들의 무스탕 지역 접근을 엄격히 제한, 관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듣기로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이면 무스탕 주민들이 좀 더 따뜻한 곳을 찾아 산을 내려와 겨울나기를 한 뒤 봄이 오면 다시 무스탕으로 들어간다고 하더라. 그렇다면 무스탕 지역의 고유 문화를 보존하겠다는 명목 아래 고가의 허가서를 발급받은 트레커들만 입장을 시키는 행위는 어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닐까? 때로는 카트만두에서도 만날 수 있는 무스탕 지역 주민들이 정말 순수히, 자발적으로, 기꺼이, 그들만의 문화를 계승하고 있을까? 평범한 트레커들이 허가서를 받는 순간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스탕의 전통 문화를 훼손시키는 행위는 절대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과연 새록새록 생겨날까? 트레커들 사이에서도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자만의 과시적 리그가 되진 않을까? (아웅, 그냥 비싸서 짜증난다고 그래 -_-;) 

 

<잘 걷지도 못 하던 어린 송아지>

 

<지독히도 말을 안 들어 주인 소녀를 열 뻗치게 했던 소 한 마리. 결국 허벌나게 두들겨 맞다 -_-;>

 

<돌아보니 또 나를 부르고 있는 무스탕. 아놔, 안 간다니까 그러네>

 

<카그베니 골목길>

 

 

마을 북단의 무스탕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등에 지고 이번엔 반대편으로, 묵티나스를 떠난 우리가 카그베니로 들어왔던 그 길쪽으로 거슬러 주변부를 둘러보기로 했다. 마을 가운데를 가로 지르는 개울 상류 쪽으로 슬슬 구경을 가는데, 어라, 우리의 풀만이 외로이 개울가에 혼자 나와 앉아 있다. 라운딩을 시작한지 이틀째 되는 날부터 밤이면 밤마다 이런 저런 다른 팀의 포터들과 어울려 지냈던 풀만인데, 어제까지 묵티나스에서 함께 놀았던 다른 포터들은 모두 좀솜쪽으로 곧장 가버리고, 우리만 카그베니로 새어 버린지라 오늘은 저렇게 나홀로 따로국밥 신세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그의 축 처진 어깨가 괜시리 안타까워 힘 좀 내라는 의미에서 팁을 좀 쥐어준다. 그러자 금방 해맑은 모드로 변하는 풀만 ^^;  

 

 

개울변 돌담 높은 집 안 마당에서는 목하 도살에 여념이 없었다. 곧 자기 차례가 다가온 것을 아는지 긴장한 듯 보이던 물소, 염소들과 그 집 문으로 부산히 고깃덩어리를 어깨에 둘러 매고 들락날락거리던 사람들. 그러다보니 아까 봤던 가죽을 말리는 장면이나 살코기를 해체하고 다지던 모습들이 다시 떠올랐다. 혹시 오늘 출장 도살업자 -_-; 가 카그베니에 온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날 잡은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바쁘게들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네팔에 출장 도살업자라는게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팔 종교의 특성상 있을 법도 하지 않을까... 오늘도 끝모르고 뻗어나가는 상상의 나래. 

 

그렇게 마을을 싸돌아다니다 아까 절벽 위에서 바라봤을 때 궁금하게 여겼던, 카그베니 뒷산 정상부로 난 지그재그 길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그 엄청난 오르막길을 따라 자그마치 2시간 30분이나 올라가면 사방팔방 멋진 뷰가 펼쳐진다는 소리같은데... 내 비록 오늘 얼마 걷지는 않았지만, 어제 내리막길의 여파로 여전히 허벅지 앞 근육과 엄지와 새끼 발가락의 통증이 남아있는 이 시점에서 미쳤다고 저 길을 오를리가... 내 사전에 더 이상 고도를 올리는 일은 없으리, 를 되뇌이자 김원장 왈, 그렇담 하단부까지만 살짝 가보자고 또 꼬신다. 꼭 하단부까지만이야! 손가락 걸고 약속을 받고,

 

 

칼리 간다키 강을 가로 지르는 흔들 다리를 건너(바람 무지 분다)

 

 

마을 건너편에 도착. 흠, 이 쪽에서도 무스탕쪽으로 접근할 수 있겠는데? 그럼 허가서가 없어도 우릴 못 잡을 것 같지 않아?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_-; 하단부에서만 봐도 살 떨리는 지그재그 오르막길을 잠시 구경하다 도로 백 투 더 빌리지. 한 바퀴 둘러본 결과 카그베니에 하루 더 묵는다면 우리 취향상 아무래도 좀 심심할 것 같다.

 

보통때 같으면 하루 한 끼 이상 미리 준비해 온 한식을 먹었겠지만, 이젠 내리막길만 남았으니 체력을 비축한답시고 입맛에 맞는 음식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지난 점심 메뉴가 매우 훌륭하지 않았던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심혈을 기울여 저녁 메뉴 선택. 오늘 저녁은 야채 모모(야채 만두)와 에그 치즈 볶음밥이다(사실 아까 야크 고기를 마구 다져대는 광경을 본지라 도저히 고기가 들어간 만두는 못 시키겠더라. 그래서 야채 만두로 콜).   

 

 

 

에구, 그러나 저녁 선택은 완전 실패였다. 무엇보다 만두고 볶음밥이고 너무 짜서 먹을 수가 없었다. 점심땐 안 그랬는데 말이지. 혹 이 숙소를 염두에 두고(아니,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식당에 있어서) 찾아오는 여행자들이 있다면 꼭 짜지 않게 요리해달라고 미리 부탁을 하길 바란다. 아깝지만 저녁은 반 정도 밖에 못 먹고 즉석 미역국 하나 풀어 훌훌 마시고 말았다는. 

 

김원장과 낄낄거리며 <마파도 2> 영화를 반 정도 보다가 밤 9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든다. 트레킹 시작하고 가장 늦게(즉 다음날 일정에 대한 아무런 부담이 없이) 잠자리에 드는 날이다. 창 밖은 어두운데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 지금 이 장면은 언젠가 겪었던 익숙한 순간인데... 그래, 중국 윈난 리지앙에서 이런 비슷한 경험을 했었지. 물 소리, 바람 소리, 개 짖는 소리... 하루 더 쉬지 않고 그냥 내일 카그베니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지만, 틀림없이 며칠 지나지 않아 카그베니에서의 하루가 그리워지고 말리라.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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