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씨 : 맑음

@ 이동구간 : 야크 카르카(4,018m)-레다르(4,200m)-토룽 페디(4,450m) / 432m 상승

@ 총 소요시간 : 4시간 30분(순수 걸은 시간 4시간 10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난 밤 12시쯤, 그러니까 오밤중에 잠이 깨더니 이후 2시간 가량 잠이 안 와 내내 엎치락뒷치락 침낭 속에서 몸을 비틀어댔다. 그 와중에 원인에 대해 내가 세운 가설 몇 가지로는 ;

 

1. 방 안이 너무 춥다

2. 이 또한 고산병의 전조증상이다(요즘 뭐든 고산병에 서로 갖다 붙이는데 재미들렸다)

3. 어제 너무 일찍 잤다 -_-;

4. 토룽 페디를 눈 앞에 두고 극도의 불안감이 엄습했다

 

등이 있었는데, 어쨌든 답을 못 찾은 채 나도 모르게 다시 꼴깍 잠이 들었고 일어나보니 어느새 아침이더라. 지난 밤의 증상으로 혹 고산병이 다시 올까 걱정했지만, 오히려 오늘 아침 머리는 어제보다 다소 맑아져있었고 그리하여 이론상 오늘 다시 고도를 높여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대기의 건조함으로 인해 결국 입술이 갈라져 피가 나는 것만 제외하면). 어차피 오늘 하루만 더 고도를 올리고는 하루 푹 쉴 예정이기도 했으니까.

 

 

아침을 먹기 위해 방에서 기어나와 식당으로 가려는데 식당 입구에서 얼쩡거리던 말 한 마리. 반가워서 말이랑 사진 한 장 찍어줘, 김원장에게 부탁했는데, 저런 몰골인 줄 알았으면 나는 빼고 말만 찍으라고 할 것을 ㅋ

 

(방이 꽉 찬 반대편 숙소와는 달리) 우리 숙소에는 워낙 묵는 손님이 없어, 김원장은 내심 예약한 대로 일찍 먹을 수 있으리라 기대를 한 모양인데, 정작 주최측의 입장은 묵는 손님이 거의 없는 관계로 오히려 하나도 급할 게 없는 분위기였던지라 아침 식사를 부탁한 시간에 맞춰 식당에 갔는데도 직원 모두들 불 꺼진 난로곁에서 아직 한참 꿈나라였다. 잠시 망설이던 우리가 결국 그들을 소심하게 깨우고 아직 잠이 덜 깬 주인 아저씨께 다시 주문 반복해서 일러주고 아저씨는 그때서야 다시 불 지피고 그러느라 그 만들기 어렵다는 -_-; 오믈렛과 밀크티를 받아드는데까지 제법 시간이 걸린다. 때문에 오늘 아침,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먼저 출발하려고 마음 먹었던 김원장은 다시 투덜투덜.  

   

<우리가 머물렀던 2층 방이 정면에 보인다>

 

오전 7시 50분, 토룽 페디를 향한 오늘 우리의 출발 시각. 어제의 우크라이나 아저씨들 일행이 김원장의 마음에 쏘~옥 들었는지, 김원장이 그들을 만나면 인사하고 갈텐데, 하며 평소에는 보기 어려운 다정(?)한 모습을 보이며 약간 아쉬워하기까지 한다. 나? 나는 물론 남들 챙겨 인사 나누고 그럴 여유 따위 없다. 오늘도 마음 굳게 다잡고 신발끈 꽉 동여맨 채 두려운 미지의 세계로 질질 출발.  

 

<몇 발짝 오르다 뒤돌아 바라본 야크카르카의 모습. 철저히 이 곳을 찾는 여행자들의 편의에 따라 만들어진 마을(?)답다>

 

간밤에 너무 춥다고는 생각했지만, 실제로 여기 저기 곳곳에 얼어붙은 눈들이며 얼음들을 만나게되자 다시금 마음 한구석에서 결의가 다져진다. 출발부터 경사도 제법 이어지는 편이어서 서두르지 않겠다고, 천천히 걷겠다고 되뇌이고는 있지만 나도 모르게 가끔씩 입으로 숨이 몰아 쉬어지곤 한다. 워워~ 천천히, 천천히. 

 

 

높은 만큼 산소가 희박한 이 곳, 아직 햇살도 채 손을 뻗지 않은 야크 카르카를 떠나 첫 언덕에 올라설 때까지는 다가오는 한정된 시야 속의 모습보다 뒤돌아 보는 풍경이 더욱 멋지다. 지나온 저쪽은 눈부신 설산이 히말라야에 아침이 다시 찾아왔음을 선연히 보여주고 있다.   

 

 

<야크카르카 중심부(?)와는 떨어져있지만 아직은 야크카르카 권역이라고 우길만한 언덕 위에 또 하나의 롯지가 있다.

야크카르카에 왔는데 방이 없다거나 체력이 남아돈다거나 하면 여기까지 올라와 묵을 수도 있겠다>

   

<야크카르카의 뜻이 "야크 방목지"라는 걸 여실히 증명해주는 또 한 장의 사진. 야크들아~~~>

 

하지만 이 작은 롯지가 하나 있는 언덕에 올라설 즈음에는 그 존재만으로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햇볕이 내리쬐는 구간들이 확 나타나고 경사도 잠시 완만해질 뿐더러 시야까지 트이면서 이제는 사방팔방으로 매력적인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쯤되면 지나온 길보다 앞으로 가야할 길에 더욱 시선이 자주 가게 마련이다. 오호, 내가 가야할 길이 바로 저,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풍경 속이라 이거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김원장>

 

 

놀랍게도 이 곳에서 개를 끌고 걷고 있는 백인 남자애(라고 부르긴 했지만 사실은 20대 후반의 청년)를 발견한다. 어쩌면 내 시선을 끈 것은 그보다도 개였을 것이다. 해발 4천미터가 넘어가는 이 곳에서 트레킹 중인 개라니. 워낙 개를 좋아하는 나는 개 주인이 외국인이라는 사실도 잠시 잊고 -_-; 얼른 다가선다. 그리고 순식간에 눈치를 챈다. 이 개도, 주인도, 결코 평범치 않다는 것을.

 

개는 비루먹은 몸을 색색의 낡은 천으로 적당히 칭칭 두른 폼을 하고 있고 주인 역시 개와 크게 다르지 않은 -_-; 행색이다. 무엇보다 그의 등산화가 인상적이었는데 낡다 못 해 코부분으로 이만큼 벌어진 틈으로 해어진 양말을 신은 그의 발이 빼꼼 세상 구경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의 신발을 등산화라고 불러야 하는지조차 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긴 끈으로 신발 바닥과 몸통을 칭칭 감은 채 걷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바닥 태반이 떨어져 나갔으리라. 신발이 본인 것이 아니거나 어디서 줏었거나 뭐 그런 가설이 어울릴만한 그가 외양상으로는 유럽 어드메(혹은 이스라엘)에서 온 듯 했기에 더욱 나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뜻밖에도 그는 인도 여행 중 그 개와 만났다고 했다(인도에서? 여기와는 완전 반대인, 아주 더운 저지대말이지? ㅋㅋ). 우연히 먹을 것을 한 번 던져준 뒤로 자기만 졸졸 따라다닌다고 했다(개에게는 여권도 비자도 필요없구나). 그 말만 듣고도 주인도 없이 굶기를 밥 먹듯 했을 길거리 개와 인도에서 인생의 의미있는 무언가를 찾아보고자 나선 젊은 배낭 여행자와의 만남이 한편의 드라마처럼 머리속에 쫘악 그려지는 듯 했다. 내 상상의 나래가 하염없이 뻗어나가고 있는 것을 눈치라도 챘는지 그 역시 전생 운운 해가며 그 개와 본인은 good karma로 맺어진 것 같다고 했다. 오호, 카르마라는 단어가 나오는 걸 보니 이쯤에서 얼른 후퇴해야 쓰겄다. 그래, 너희 둘의 트레킹에 행운이 깃들기를!     

 

 

<나란히 나란히 나란히. 포터들의 쉼터에서>

  

 

 

 

이제 경사는 그다지 심한 편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는 일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마도 가빠지는 호흡 때문일거다. 워낙 새가슴으로 이번 트레킹을 따라나선 나도 나지만, 이런 나보다도 더욱 천천히 걸으며 호흡을 조절하고 있는 김원장이 딱 저 만큼 정도의 간격을 두고 내 뒤를 따라 오고 있다. 그런 김원장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려다가 문득 배경에 감탄을 하게 되는 걸 보니 아직 내 체력이 따라주긴 하나보다. 이 놈의 강철 체력. 바람만 세게 불어도 파리한 얼굴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공주 이미지는 정녕 내게는 안드로메다보다도 먼 일이란 말인가.  

 

 

 

 

야트막한 경사길을 오르는데 왼편으로 제법 깊어보이는 골짜기가 나타나면서 우리가 앞으로 밟아가야할 가느다란 길은 그 건너편으로 이어진다. 지도를 살펴보니 조만간 이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타날 듯 하다. 다리까지 이어지는 길이 잠시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저 앞에서 다시 만나기라도 하는 모양인데 우리 같은 트레커들이 이용하는 길은 보다 완만해 보이는 오른편이 주를 이루고, 포터들은 여지없이 왼편의, 보다 경사가 급하지만 직선 거리는 짧아보이는 길을 택한다. 저 무거운, 그들이 없다면 우리가 짊어졌어야 했을 배낭들을 이고 지고.

 

 

괜시리 객기를 부렸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시점이므로 우리도 완만한 루트를 선택, 그리고 드디어 나타난 다리.

 

 

<다리 위의 김원장과 나>

 

햇살이 내리쬐는 곳을 걸을 때는 그래도 따뜻하니 걸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골짜기가 가까워지면서 짙게 드리워지는 음지와 다리 위에서 맞는 바람의 차갑기가 장난이 아니다. 다리 아래 흐르는 천의 상류쪽, 즉 출루(Chulu)봉(6,584m)을 올려다보니 어흥, 이 정도면 거의 빙하천 수준일 듯.

 

 

야크 카르카를 떠난지 1시간 10여 분, 오전 9시 땡에 맞춰 도착한 레다르(Ledar).

여전히 곳곳에 얼어있는 얼음 덩어리들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자스라.

 

 

 

<엇, 앞서가던 그 개를 다시 만났다. 주인님은 어디 가시고 다른데 와서 먹을 것 타령이냐>

 

마침 레다르에서 코딱지만한 매점 및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가족의 아침 식사 시간과 겹쳤나 보다. 그들이 식사를 하는 양지 바른 벤치 위에 우리 엉덩이도 살짝 신세를 지기로 한다. 어디 해발 4,200m에서는 뭘 드시나 좀 구경해 볼까? 

 

 

<음... 다행히 내 식욕을 자극하지는 않는 모양새다>

 

<나와는 달리 옆에 묶인 채로 이 집 딸이 먹는 아침 식사를 자꾸 탐내던 말 한 마리. 둘이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다>

 

둘이 하는 양을 슬쩍슬쩍 훔쳐보면서 낄낄거리는데 어라, 앉아서 쉬는데도 가끔씩 저절로 코가 아닌 입으로 숨이 쉬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더 오래 쉬면 몸이 쳐질거라는 김원장의 얄미운 조언에 겨우 5분 남짓 쉬다가 다시 일어서는데 아무래도 남은 구간 페이스 조절을 잘 해야 "오늘도 무사히..."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오전 9시 5분, 다시 레다르 출발. 지금까지 약 180m 고도를 올렸고 앞으로 오늘의 목적지인 토룽페디까지는 250m 가량 더 올려야 한다.

 

<레다르를 뒤로 하고 나서는 길> 

 

<점점 멀어지는 레다르>

 

<김원장은 숨쉬기 운동 중?(본인 설명으로는 셀프 과호흡 중이라고)>

 

 

 

 

레다르를 벗어난 이후로도 길은 완만한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지대가 낮다면 달려서도 지나갈 만한 수준이지만 여기서 그랬다간 오늘 밤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머리통을 부여잡아야 할 것이다. 이제 손애 잡힐 듯 다가선, 저 왼편 흰 머리를 가진 봉우리가 내일 모레쯤 우리가 넘어설 토룽패스 그 근처 어드메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시금 긴장감이 밀려온다. 아 XX, 지금이라도 발길을 돌려 내려가야 하는 건 아닐까? -_-; 

 

<뜻밖에 맑고 아름다운 색을 자랑하는 웅덩이를 발견. 아마 틸리쵸도 이런 웅덩이의 빅 버전이겠지?>

# 여기서 잠깐, 틸리초(Tilicho)는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4,920m)에 있다는 호수를 말한다.

우리가 발견한 이 웅덩이는 아마 해발 4,300m쯤? 

 

<어쩐지 비틀거리는 듯 보이는 김원장 ㅋㅋ 오른편에 보이는 저 계곡도 우리와 함께 먼 길을 달려왔구나

(사실 우리는 상류(Kone Khola)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

 

 <다시 안정된 페이스를 구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김원장>

 

 

 

레다르를 떠난 이후 완만하고도 긴 구간은 이윽고 급한 갈짓자 모양의 짧은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안 그래도 내게 내리막길은 더욱 쥐약스러운데 이 구간은 때아닌 다국적 트레커들의 정체로 인하여 속도를 내기도 줄이기도 어렵다. 갑자기 이 많은 애들이 다 어디서 모였지? 턱턱 잘도 짚어 내려오는 김원장에 비해 나는 스틱 두 개에 의지하여 거의 정신줄 놓고 미끄러질 듯 엉덩방아를 찧을 듯 어찌어찌 비틀거리며 안 넘어지고 내려서는데 겨우 성공한다. 짧은 내리막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리를 건너기 위해 등장했나 보다. 그리고 오늘의 이 두번째 다리를 건너면 깔딱고개 뺨칠 듯한 경사의, 하지만 길이는 다행스럽게도 아주 길지 않은 오르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척봐도 내려온 것 이상 훨씬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올라가야할 길폭은 어디 구석에 비켜서 있을만한 공간도 없이 좁다랗게만 이어지고, 어쩌다보니 제각기 따로 출발한 여러 팀이 이 구간에서 한꺼번에 모이다시피 하는 바람에(아마도 이 오르막 구간 때문에 정체가 빚어진 듯) 숨 좀 돌리며 우리 페이스를 유지하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그냥 일렬로 서서 밀리듯 쭈욱 올라가야 했다. 아이고야, 이거 만만치 않은 걸? 아무리 둘러봐도 이 중에서 내 다리가 제일 짧거늘. 이건 불공평한 처사라구!

 

헉헉헉.

 

<깔딱고개 정상(?) 올라선 뒤 뒤돌아 찍은 풍경. 우리가 지나온 길은 사진상 왼쪽(오른편으로도 예전 길의 흔적이 보인다)으로

사진 하단 아래 어드메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 오른편으로 넘어온 뒤 만만찮은 오르막길을 밟아야 한다>

 

오전 11시 5분. 깔딱고개가 끝나다. 이 짧은 구간을 줄서서 올라온 트레커들 대부분은 그다지 넓지 않은 상단부에 모두들 모여앉아 차오르는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우리도 불편하게나마 어떻게든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한다. 초컬릿과 과자로 밀려오는 허기를 일단 달래면서 미리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풀만에게도 비스킷을 건네주며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제 "오늘" 남아있는 구간에서 이같이 심한 오르막은 더이상 없나 보다.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

 

이제 오늘의 목적지인 토룽페디까지는 약 1시간 거리. 어느새 정면의 풍경이 확 바뀌어있다. 11시 20분, 드디어 말로만 듣던 토룽페디를 향해 출발. 이제 서두르지 말고 다시 천천히 가자구.

 

 

풀만이 알려준대로 토룽페디에 이르는 길의 경사도는 무척 완만한 편이었지만, 이런, 중간에 내가 '(산)꾼'이라고 부르는 그들이 일명 <너덜지대>라 부르는 구간이 나타났다. 그러니까 이 곳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길폭 자체가 매우 좁으면서 자체 경사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표면은 잔돌들로 매우 미끄러운데 윗경사면에서는 계속해서 크고 작은 잔돌들이 굴러 떨어지고 있고(LAND SLIDE!) 그 돌들이 미끄러지는 방향의 끝은 천길 낭떠러지인 점이 이 지대의 특징이랄까. T_T 정말이지 오른편으로 조금만 발을 헛디뎠다가는 뼈도 못 추릴, 행여나 꿈에 나올까 두려워했던 그 너덜지대가 등장한 것이다. 사실 이 곳에 오기 전에 이 곳을 미리 밟은 선배들의 후기를 읽으면서 발음이 안 되는 지명과 감이 안 잡히는 고도 혹은 끔찍한 고산병에 대한 술회 이상으로 나를 곤란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이 너덜지대였다. 오늘로 9일째 안나푸르나 둘레를 걸어오면서 쉽지 않은 구간이 몇 있었지만, 이렇게 딱 보자마자 "아, 이런 구간이 바로 너덜지대라는 곳이구나" 생각이 드는 곳은 이 곳이 처음이었다. 만약 이런 구간이 앞선 일정에 몇 번 이미 등장했었다면 나는 진작 산을 내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젠장, 지금은 벌써 9일차가 아닌가. 뒤로 돌아가는 것보다 앞으로 산을 넘어가는게 오히려 더 빠른 엿같은 시점이란 말이다. 안 그래도 이 좁은 길 반대편에서 토룽페디 롯지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들을 부려놓고 돌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야크떼가 나타나자 나는 더욱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보통 이럴 때(=좁은 길에서 가축떼를 만났을 때) 야마는 야크를 경사진 벼랑쪽으로 몰고 나는 안쪽으로 걷는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산쪽으로 몸을 기울였는데, 어라, 이 야크들 역시 떨어져 죽기는 싫었던 모양인지 갑자기 벼랑쪽에서 산쪽으로 발길을 돌려, 그 경사를 마구 미끄러져가며, 우리를 넘어 피해가려 애쓰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설명하자면 우리 진행 방향의 왼편은 바로 산이요 오른편은 저 아래 낭떠러지 계곡인데 이론상 나의 오른편으로 지나가야 할 야크들이 내 왼편 산으로 뛰어 오르는 형국이었다. 이는 일을 더욱 안 좋은 상황으로 몰고 갔는데, 그들의 육중한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하는 자갈들이 우수수 우리를 향해 굴러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섣불리 걸어나가다가는 위에서 굴러 내려오는 돌들을 밟아 그 힘의 방향 그대로 미끄러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야크 십수마리가 지나갈 때까지 얼음! 자세로 서 있어야 했는데, 얼마간 그러고 있노라니 이번에는 내 왼편으로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중심 잡느라 비틀거리는 야크떼들이 혹 발을 잘 못 디뎌 그 중 한 마리라도 미끄러졌다가는 내가 그 야크에 깔려 같이 굴러 떨어지겠구나, 하는 끔찍한 상상에 시달려야했다. 여하튼 발이 간혹 꼬여가면서도 네 발 달린 짐승들은 두 발 달린 짐승들보다 쉽게 그 구간을 빠져 나갔고 그제서야 나는 살 떨리는 구간을 마저 지날 수 있었다(살 떨리는 구간을 지나고나니 이번엔 절로 다리가 떨려오더라는). 이제 악몽의 너덜지대를 지나온 것으로 나는 정녕 빼도 박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제 둘 중 하나겠지. 올라가다 고산병에 시달려 죽거나 내려가다 너덜지대에서 미끄러져 죽거나.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토룽페디 롯지들이 눈 앞에 등장>

 

평소 스스로 그다지 겁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나는 이런 길엔 너무나도 취약하다(실제로 몇 년전 파키스탄 여행시 라카포시 베이스캠프를 올라가던 길에 이런 지대를 만나 결국 난 포기하고 김원장만 다녀온 적이 있다. 당시 글 http://blog.daum.net/worldtravel/8379142). 이렇게 내게는 극도의 공포감을 안겨주었던 너덜지대였지만 무사 통과 뒤 한숨을 내쉬며 이럴 때 절실히 필요한 "남편"의 존재를 찾으니 정작 김원장에게 너덜지대는 아무 특별한 사건도 아니었고 오히려 다른 일로 괴로워하고 있더라. 바로 깔딱고개를 오른 뒤부터 몸의 컨디션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 그러고보니 고새 얼굴도 새까맣게 탔다. 아저씨 누구세요? 아무리 모자를 쓰고 있어도 이 지대에서 자외선을 완전히 차단하기란 어려운 일인가 보다. 오늘 구간 대부분 햇빛이 쨍쨍 내리쬔데다가 끊임없는 걷기로 인해 몸에 땀방울은 맺히는데 정작 본인 모자로 가려진 머릿속은 4,000m 고지대에서 불어대는 차가운 바람에 시리도록 찬 것이 한 몸 안에서도 온도차가 심하게 느껴지고 있단다.      

 

 

12시 20분, 드.디.어. 토룽페디 도착. 토룽페디라는 지명이 무색하게 토룽페디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롯지만 달랑 두 개가 있을 뿐. 트레커들이 걸어온 길은 자연스럽게 Thorong Basecamp Lodge로 이어지는데, 이런 고지대에 있는 롯지라고 하기에는 규모도 시설도 꽤나 그럴싸하다(돈만 있으면 국제전화도 가능한 곳이다). 

 

<우리가 가진 지도로는 해발 4,450m>

 

이미 마당에는 먼저 도착한 트레커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수다를 떨고 있었고 직원으로 보이는 이들도 트레커들의 방을 안내하거나 이런 저런 일들로 매우 바빠보였다. 일단 마당에 퍼질러 앉아 숨부터 고른다. 드디어 도착하고야 말았다는 뿌듯함도 잠시 지친 몸과 맘에 눈을 게슴츠레 뜨고 멍하니 지나온 길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아, 새들이 내 시선 아래로 날고 있다. 저 깊은 골짜기 아래로 날고 있다. 놀랍구나, 놀라워. 내 눈 높이 아래로 날고 있는 새들이라니... 얼마간 넋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다 문득 한가로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몸을 돌려 롯지 직원들 중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려 보는데 다들 열라 바쁜 척 쌩깐다. 결국 무거운 몸을 다시 일으켜 우리에게 방을 안내해 줄 그 누군가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한걸까? 겨우 담당자를 찾아 안내를 받은 방은, 남들이 이미 배정받은 방들에 비하면 처음 보여준 방도 두번째 보여준 방도 거의 감방 수준에 가깝다. 지나온 다른 마을들과 달리 토룽페디는 고도의 특성상 트레커들이 몰리게끔 되어 있기 때문에(어느 트레커의 후기에서는 토룽페디에서 방을 못 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여기서도 또 한참 높은 곳에 위치한 High Camp까지 올라가야 했다는 글을 보기도 했다) 방 구경 한답시고 롯지 부지내 계단 몇 개를 오르락내리락 하느라 더욱 숨이 가빠진 우리였지만 좀 더 무리를 해서라도 어떻게든 방부터 잡아야 했다. 결국 인프라가 좋아보여 노렸던 Thorong Basecamp Lodge는 남아있는 방들이 맘에 안 들어 포기하기로 하고, 바로 그 위에 위치한, 보다 최근에 지어진 듯 보이는 어설픈 롯지로 기어가듯 올라갔다. 다행히 이 롯지는 방 한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비어있어서 걔중 그나마 괜찮아보이는 방을 골라 잡을 수 있었다.

            

명칭 : Hotel New Phedi   

트윈룸 숙박비 : 250루피 (화장실) 맨 끝 방은 외풍이 너무 셀 것 같아서 끝에서 두 번째 방을 골랐다. 재래식 변기가 있는 화장실(같은 것 -_-)이 딸려 있어서 힘주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도 김원장이 금방 구해줄 수 있다는 장점을 높이 샀다. 화장실 냄새가 아주 안 난다고 할 순 없었지만(화장실 문도 잘 안 닫히고) 그렇다고 아주 신경 쓰이는 수준도 아니었다. 이 정도 고도에서는 화장실 냄새 말고도 신경쓸 사항이 많으니까.  

특이사항 : 원활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방안까지 전기가 들어온다. 그 사실을 알고 처음에 흥분해서 방전된 모든 전자제품을 꺼내 놓고 충전을 시도했는데 어떤 놈은 되는 척 하고 어떤 놈은 안 되며 플러그를 두 개만 동시에 꽂으면 백발백중 안 된다. 그래도 카메라 밧데리 정도는 방에서 충전이 가능했고 더욱 센 전력이 필요한 경우에는 부엌(식당이 아니라)에서 무료로 신세를 질 수 있었다.

 

사실 아까서부터 배가 고팠기 때문에 Thorong Basecamp Lodge에 방을 잡는대로 그럴싸해 보이는 숙소 레스토랑부터 이용할 심산이었는데 우리가 새로 잡은 Hotel New Phedi의 레스토랑은 바로 아래 Thorong Basecamp Lodge 레스토랑에 비하면 많이 후져보였다. 안면 몰수하고 그냥 아래 숙소 레스토랑을 이용할까 하다가 몸도 무겁고 김원장 컨디션도 안 좋고 무엇보다 다른 숙소의 식당을 이용할 경우 묵는 숙소의 방값이 무지막지하게 올라가는 이 동네 시스템을 고려하여 그냥 이 집에서 먹기로 했다. 주문해도 때로는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생기므로 주문 전 급한대로 일인당 초코바 두 개씩 일단 먹었고. 그런데 김원장의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진다. 아무래도 누워야 할 것 같단다. 처음 방을 잡고 각자의 침대를 정할 때 김원장이 밝은 걸 좋아해서 창쪽을 맡았었는데 아무래도 외풍이 덜한 방 안쪽 내 침대를 김원장에게 내어줘야 할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침대에 들어가자 그냥 뻗어버리네.  

 

<뻗은 김원장>

 

김원장이 저렇게 된 이상 식당에서 먹기는 글렀다. 혼자 식당으로 부시시 나가 방에서 먹겠다고 이야기하고 주문한 맨밥과 계란 후라이, 중간 사이즈의 뜨거운 물통, 밀크티 한 잔까지 커다란 쟁반에 받혀들고 방으로 돌아와 장조림캔 따고 김도 꺼내고 해서 한 상 차려 놓는다. 김원장, 일어나서 좀 먹어봐. 그러나 한 두 숟갈 뜨는 듯 하던 김원장은 결국 힘없이 거절. 타이레놀이나 꺼내오란다. 숨이 차오고 머리는 띵하고 몸이 으슬으슬하다는 것이 아무래도 증상이 심해지는 모양. 오호... 남편은 고산병에 다시 걸린 듯 골골한데 마누라는 식욕이 촬촬 넘치는구나. 남편이 아프거나 말거나 나는 살고 봐야지. ㅋㅋ 김원장 약 먹이고는 혼자서 신나게 먹어준다.

 

 

그래서... 결국 혼자 배부른 마누라는 벌을 받은 것일까? 밥을 먹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이번엔 내가 완전 뻗어 버리고 만다. 다시 속이 울렁거리고 여기저기 근육통이 도지는 것이 아아... 로우 피상에서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갑자기 너무 많이 먹었나? 혈액이 다 위로 쏠리기라도 했나? 아이고... 어지러워라. 김원장에 이어 나도 타이레놀 신세를 진다. 밀려오는 두통에 우리 둘 모두 침대 하나씩 차지하고 살을 에일듯한 찬바람이 슝슝 들어오는 방안에 힘겹게 누워 있으려니 따뜻한 우리 집의 푹신한 내 침대가 그리워지면서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란 말이냐! 내 돈 내가면서! 하는 생각이 버럭 든다. 이런 된장(예전 티벳 카일라스를 여행할 때 겪었던 그 이상 증상 모두가 고산병이었구나, 새삼 확신이 드는 순간이기도 했다).

 

<뻗은(그래도 브이질 할 여력은 남은) 써티>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김원장은 제법 컨디션을 되찾아가는지 내가 아까 먹다 남긴 밥에 뜨거운 물을 부어 쇠고기볶음 캔 하나를 따서 늦은 식사를 한다(반대로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데 그래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오늘 증상이 로우 피상에서 겪었던 괴로움보다는 그래도 훨씬 약한 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식사를 끝낸 김원장이 이런저런 부스러기가 남은 밥 쟁반을 화장실쪽 나무벽 아래 치워 놓았는데 근처에 나 있는 아주 작은 구멍에서 쥐 같은 동물이 나타나 남아있는 밥을 우리 눈 앞에서 맛나게 냠냠하는 일이 벌어졌다(꼬리가 무척 짧아서 그런지 징그럽다기 보다는 귀여운 놈이었다). 김원장이 다가가면 얼른 그 구멍으로 숨어버리고 다시 침대로 돌아오면 얼굴을 요만큼 쏘옥 내밀고 있다가 안전하다 싶으면 얼른 나와 다시 쟁반으로 돌진! 털이 북실거리는 놈이라 눈 대중으로는 도저히 그 구멍을 들락날락 못할 사이즈였는데 거의 김원장과 톰과 제리를 찍더라. 결국 우리가 밤새 잠을 자는 동안 그 놈이 우리 배낭의 먹거리를 제 맘대로 공략하게 냅둘 수는 없다는데 중지를 모으고 우리 스틱으로 나무 구멍을 틀어막고 거기에 더해 밀고 나오지 못하도록 스틱을 고정시키고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루의 트레킹을 마친 뒤 할 일이라는 거의 없는 이런데 며칠이고 있다보니 참 별 일 아닌 것 가지고 무지 진지해지는 우리를 쉽게 발견하게 된다.

 

저녁까지 내가 골골해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김원장, 문득 내게 미안해지기라도 했는지 "나중에 포카라에 도착하면 거하게 한 잔 하자!" 당근을 던져온다(나 거하게 한 잔 하는 것 좋아하는지는 잘 알고 있는 인간이다. 좀처럼 기회를 안 줘서 그렇지). 음... 과연 우리는 무사히 포카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앞으로 1,000m나 더 위에 있는 토룽 패스를 넘어 포카라로 가는 것도, 뒤로 돌아 지나온 길을 되밟아 포카라로 가는 것도 어느 것 하나 만만치가 않다(흑, 아까 너덜지대만 아니었어도 문제가 생기면 돌아가는 편을 택했을텐데 T_T). 

 

Shit, 너.무. 멀.리. 왔.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