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씨 : 맑음

@ 이동구간 : 로우 피상(3,200m)-훔데(3,280m)-브라가(3,360m) / 160m 상승

@ 총 소요시간 : 5시간(순수 걸은 시간 4시간 30분)

 

지난 밤, 2시 반까지는 정말 죽도록 시간이 안 갔는데(대체 과호흡을 일으키지 않는 심호흡의 적당한 수준이란 어느 정도일까), 그 이후로는 그래도 30분 가량씩은 까무룩 잠이 들곤 했는지 시계를 볼 때마다 그만큼씩 시간이 지나 있곤 했다. 그렇게 자다깨다를 여러 번 반복한 후에야, 끝내 침상 머리맡에 토하는 사태는 벌이지 않은 채, 결국 동이 터오는 아침을 무사히 맞을 수 있었다. 아, 정말 죽지 않고 -_-; 새 아침을 맞았구나, 게다가 언제 그런 고통이 있었냐는 듯 심각했던 증상마저 모두 사라져 버렸구나, 작지만 감격 비슷한 기쁨을 잠시 누린 뒤 찬찬히 내 몸을 들여다보니 정말이지 놀랍게도 밤새 잠을 설친 정도의 피곤함만이 느껴질 뿐, 하룻밤 나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두통이나 오심, 어지러움 따위는 거짓말처럼 대부분 사라져 있었다. 

 

다시 그 끔찍한 증상이 재발할까봐 겁은 좀 났지만, 그래도 증상이 호전되었으니 "이론상" 오늘 하루 쉬지 않고 계속 전진해도 될 것 같았다. 게다가 풀만이 오늘 우리의 원 목적지인 마낭(Manang)은 물가가 비싸니 대신 그 전 마을인 브라가(Braga)까지만 가서 묵자는 제안을 해 왔고, 그의 말에 따라 지도를 살펴보니 현재 머물고 있는 로우 피상과 브라가는 고도차가 불과 160m 밖에 안 되는지라 까짓 160m 올라가는데 뭔 일이 나려나, 하는 호기로운 마음도 있었다. 굳이 하나 더 위안(?)이 되는 사실을 찾자면, 오늘 이동 구간 중 훔데(Humde)라는 마을을 지나게 되는데 바로 이 훔데에 비행장이 있는지라 혹 무슨 일이 발생해도 비행기를 이용하기 쉽다는 것. ㅎㅎ 이것까진 너무 오버였나? 

 

피상에서의 아침 나절은, 어제 오후에 이미 그 맛을 좀 봤지만, 지나온 날들보다 더욱 춥게 느껴졌다(네팔의 우기가 막 끝난, 9월 말쯤 트레킹을 한다면 지금보다 따스하게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산행 중 추위를 느낀다면 고산증에 좋지 않을테니 오늘은 아예 장갑까지 챙겨 끼고 출발하기로 한다. 

 

오전 7시 45분, 내게 잊지못할 기억을 만들어준 로우 피상의 숙소를 벗어나 백 여 미터 정도를 걷자 갈림길을 알리는 표지판이 등장한다(사진은 어제 피상 마을 싸돌아댕길 때 미리 찍어둔 것).

 

 

 

피상에서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보시는 바와 같이 아랫길은 소나무숲을 지나는 평탄한 코스이고,

다른 하나는 경사가 심하긴 하지만 대신 경치가 훌륭하다는 윗길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길을 준비하는데 있어 겁 많은 내게 큰 힘을 주셨던 산늪님(http://blog.naver.com/mtswamp)의 추천 중 한 가지가 바로 이 upper route였는데, 오늘의 내 상태로는 아무래도 무리일성 싶다. 만약 다음에 다시 오게 된다면(과연?) 그 때는 꼭 upper route를 밟아봐야지... 하지만 어쨌든 오늘만큼은 나열된 단어가 쏙쏙 맘에 들어오는 EASY STRAIGHT WALK 당첨! 

 

 

마을 끝에 위치한 화개장터 같은 - 있어야 할 건 다 있고요~ ♪ - 가게 앞에서 내가 좋아라 하는 트윅스 초코바 때문에 잠시 망설이다 휴지만 사고(80루피) 그냥 고고고(이 집 바로 옆에서 정수한 물을 일반 물보다 저렴하게 파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히말라야에서 조난식도 아니고 -_-; 간식으로 먹는 트윅스라니, 어쩐지 어울리지 않아.  

 

 

훔데를 향해 걸은지 얼마 되지 않아 어제 이스라엘 팀원들 중 한 여성을 만난다.

 

"아니, 왜 너 혼자야?"

"다른 애들은 모두 upper route로 갔어. 나는 몸이 안 좋아서"

 

아닌게 아니라 퍼렇게 질린 그녀의 얼굴이 모든 걸 자세히 말해주고 있다. 지난 밤 아마 나와 같은, 아니 나보다 더 심한 악몽의 시간을 보냈음이 틀림없다. 김원장에게 몇 조언을 듣고 진중히 고개를 끄덕여대긴 하지만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마음 한 켠이 좀 심란해져 온다. 저러다 더 증상이 심해지면 어쩌지? 그래도 팀의 포터 둘과 함께 앞서거니 뒷서거니 걷고 있으니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그들이 그녀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상태가 가장 최악이라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 심한 사람을 만나니 마음이 이리 바뀌는구나.

  

<혹 네가 게루냐?>

 

내가 택한 lower trail은 마르샹디 강을 사이에 두고 upper trail과 마주 보고 있다. 만약 우리가 윗길을 택했다면 오늘 우리는 게루(Ghyaru)라는 작은 마을을 지나게 되었을텐데 그 게루라는 마을은 산늪님께서 아래와 같이 표현하셨던 곳이다. 

이곳은 제가 라운딩하면서 가장 좋았던 곳입니다.
아랫피상에서 마낭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죠.
윗길 아랫길
여기서 윗길로 가면 만나는 첫 마을이 게루 입니다.
만약 아랫피상에서 날씨가 나쁘면 볼 것도 없습니다.
무조건 아랫길로 마낭으로 가세요.
만약 피상에서 날씨도 좋고, 컨디션도 좋고, 일정에 여유가 있다면
윗길을 잡아 게루로 가셔서, 그곳에서 하루 묵으세요.
안나 둘째 언니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는 마을입니다.
둘째 언니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지 궁금해 엿보는 마을입니다.
밤에는 별이 하늘을 가득 메워요.
어둠에 빈공간이 없는 별나라입니다.
완전 후우~

 

정말이지 읽는 것만으로도 완전 후우~ 소리가 절로 나온다. 길을 걷다 오른편으로 보이던 산 중턱의 작은 마을... 네가 게루냐? 바로 너냐?

 

 

언젠가부터 자연스레 입으로도 숨을 쉬게 되었고, 그렇게 숨을 쉬는데도 불구하고 숨이 좀 차온다 싶었던 언덕을 오르자, 이번엔 그 언덕 꼭대기에서 숨이 막혀버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오오, 이런. 갑자기 이런 광경이 펼쳐지다니.

 

그야말로 깜놀 아니냐.  

 

 

시야가 확 트여서였던가. 파키스탄에서 바라보았던 훈자 계곡 생각부터 얼른 나던 곳. 라운딩을 하면서 다양한 풍경을 만나게 된다고는 들었지만, 단순히 다양하다고 표현하기엔 좀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특히나 이렇게 발걸음을 떼기 어려운 풍경을 만나게 될 때면.

 

하지만 계속 서있을 수 있나, 가던 길 계속 가야지. 저 소나무 숲속을 차분히 걷는 일도 행복할 것 같다. 말라오는 입술에 보호제 한 번 쓱 발라주고 다시 출발.

 

 

표지판에서 이르듯, 언덕을 내려오면서부터는 길이 눈에 띄게 평탄해졌다. 정말 매일 매일 이런 길만 나왔음, 싶을 정도로 ㅎㅎ 정말 이럴 땐 앞으로 2,000m를 더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스럽게만 느껴진다. 아아, 이런 고도 계산 자꾸 안 해봐야 하는데...

 

그러나 다시 고도를 따져봐야 하는 일이 생긴다. 갑자기 생긴 치통이 그 원인이다. 김홍성님 책을 보면 라운딩을 하면서 치통이 생길까봐 일정을 서둘렀다는 글이 나오는데, 아마도 이 치통 역시 고산병의 한 증상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은 놓이는데, 간헐적으로 밀려오는 치통이 심해질 때면 주변의 멋진 풍경이고 뭐고 눈에 하나도 안 들어온다. 이런, 치통이라고 우습게 볼 게 아닌데? 김원장에게 이번엔 치통이 생겼다고 투덜거리니 김원장왈 본인은 숨이 차온단다. 오늘은 길이 이렇게 평탄한데? 그래도 숨이 차다니 그 역시 오늘의 코스를 온전히 즐기기 어려운 모양이다. 참...

 

고산병에 약이 있다면 오직 하나, 현 고도에 적응될 여유로운 시간이겠지. 우리는 속도를 더욱 늦추고 천천히 걷기로 한다. 그런 우리 곁을, 아직도 상태가 매우 안 좋아보이는 이스라엘리 그녀가 앞질러 간다. 머~얼리서 바라본다면 다국적 달팽이들의 느린 경주라 하겠지.

  

 

<주인 아저씨 어디 가셨나?> 

 

<말라버린 개울 바닥을 지나려니 산넘고 물건너 바다건너서 ♬ 하는 노래가 생각난다>

 

<그러나저러나 전신주가 등장하는 것을 보니 훔데가 가까워진 모양.

역시 전신주는 그림을 망치는구나> 

 

<이런 산들 앞뒤에 놓고 사진 찍을 만한 곳이 지구상에 별로 없을 것이라는데 한 표>

 

 

 

피상을 떠난지 2시간 30분, 드디어 훔데에 도착했다. 중간쯤부터 치통이 가끔씩 오긴 했지만 걱정하던 그 외의 고산 증세는 더이상 발현하지 않아 훔데에서 비행기 타고 내려갈 일은 없을  것 같다 ^^; 너무 휑~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법 큰 훔데에 온 김에 한 롯지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한다. 마침 이 롯지에서도 빵을 팔고 있길래 시나몬 롤 하나(80루피)에 밀크티 두 잔(잔당 25루피) 주문을 하고 김원장이 가방에서 꺼내주는 대로 급한 (치통)불을 끄기 위해 소염제와 진통제를 한 알씩 먹는다. 부디 약발이 먹혀야 할텐데...   

 

30분을 훔데에서 퍼질러 쉬다가 오늘의 목적지 브라가를 향해 다시 길을 나선다. 그러다가 또 한 번 깜짝 놀라는데...

 

 

"김치, 깍두기 있어요"

 

오호라, 김치만도 아니고 깍.두.기.까지 있단 말이지. 진작 이 집을 발견했으면 이 집에서 쉬었다 갔을텐데... 3일차 때 '카르테'라는 작은 마을에서 보았던 "맛있는 김치 있어요" 문구 이후로 나를 화악, 끌어댕기는 문장이다. 그러나 이 집에서 머물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나와는 달리 김원장은 저 집에 저 문장이 걸리게 된 사연을 짐작해 본 모양이다. 그래, 김원장의 말처럼 카트만두나 포카라의 한식점에서 일하다 온 사람이 차린 롯지라기 보다는, 아마도 한국에 돈 벌러 왔다가 김치랑 깍두기 만드는 법을 배워 다시 네팔 고향으로 돌아와 롯지를 차린 사람들이겠지. 우리의 대화는 가지를 뻗쳐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의 현 상황에 대해 까지 미치고, 그러다보니 절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까지 논하게 된다. 아, 이 바람직한 트레킹의 효과라니~ ^^; 딴 이야기지만 요즘 경기가 안 좋다 말이 많더니 어쩐지 후원하시는 분들도 전보다 많이 줄어든 것 같다. http://www.bmwh.or.kr/    

 

<다시 훔데를 벗어나 브라가를 향해 출발>

 

<그저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여러 생각을 일으키는 그들, 포터>

  

 

 

비행장 같지도 않은 어설픈 비행장을 가진 훔데를 벗어나 브라가를 향하는 길, 길은 여전히 아주 평탄하고, 아마도 길이 평탄한 것도 한 몫 하겠지만, 편안하게 바라보는 경치 역시 매우 아름답다. 아, 잠시 모든 걱정을 잊고 밀려오는 행복을 맞는다. 그야말로 몸의 여력이 맘의 여유를 불러오는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 맞다니까. 

 

 

<우리 포터, 풀만의 뒷태>

  

<김원장은 저 산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와, 정말 이런데 사는 사람이 다 있네...

너같음 이런 데 평생 살 수 있겠어?

글쎄... 처음엔 좋아도 언젠가는 심드렁해지지 않을까? 게다가 밤에는 좀 무서울 것도 같아.

그래도 보름달 뜨는 밤에는 죽여주겠지?

  

<훔데와 브라가 사이 구간에서 만날 수 있는 호수.

산중 호수가 있다고 해서 기대를 했는데 생각만큼 근사한 놈은 아니었다>

  

 

브라가에 이르기 30분 전 쯤, 김원장이 아까는 숨이 차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눈이 아프다고 투덜거린다.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 김원장에겐 워낙 돗수가 들어간 선글래스가 있었기 때문에 나나 쓰려고 일반 안경 위에 결합시키는 편광렌즈 하나 저렴한 놈으로 마련해 왔는데, 남편 눈이 아프다니 아무래도 렌즈를 양보해야 할 것 같다(이 착하디 착한 마누라 ^^;). 김원장의 선글래스 색에 비해 내 렌즈의 색이 더 짙으니까.

 

<브라가가 사정권 안에 들어오는 지점>

 

하지만 그 때문에 나는 거의 나안으로 마지막 30분을 걸어야 했는데, 막상 색이 들어간 렌즈를 떼어 김원장에게 넘겨주고나니 와, 정말 여기, 꽤나 눈이 부시다. 히말라야를 찾을 때에는 충분히 진한 색의 선글래스를 준비해 와야 할 것 같다. 일단 김원장의 흐린 색 선글래스가 해발 고도 3,000m를 넘어서면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한다는게 밝혀졌으니 앞으로 남은 일정을 고려해 볼 때 가격이 얼마가 되었든 간에, 남아있는 가장 큰 마을, 마낭에서 선글래스 구입을 새로 하기로 한다. 아낀다고 렌즈 하나만 달랑 구입해 왔다가 괜히 산중에서 허접스런 물건, 비싼 돈 주고 사게 생겼다, 투덜거리니 김원장왈 좋게 생각하란다. 여기서 선글래스 살 수 있는게 어디냐고.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네.   

 

<브라가 마을 거의 다 와서 upper trail과 lower trail이 만나는 지점인

Mugje 마을에서 Sea Buckthorn Juice 라고 참신한 주스를 파는 가게를 보았다.

한국에 돌아와 찾아보니 Sea Buckthorn이 산자 나무라는데 속칭 비타민 나무라고 한단다>

  

 

그리고 마르샹디 물줄기가 발에 젖을 듯 가까와지면, 그야말로 사람 살만한 마을, 브라가 권역이란 소리 ^^ 야크들이 먼저 나와 트레커들을 맞는다. 이렇게 야크마저 돌아댕기니 더더욱 티벳스럽네.

 

 

<반가운 놈들. 맘만은 뛰어내려가 함께 놀고 싶었지만,

그랬다 괜히 몸에 무리올까 싶어 사진만 찰칵>

 

훔데를 떠난지 2시간 만에 브라가 도착, 현재 시각 오후 12시 45분. 일찍 출발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평탄했던 길에 아름다운 경치까지, 어제의 고산병과 오늘의 치통도 잠시 잊고 마냥 뿌듯 뿌듯~

 

 

산늪님께서는 브라가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셨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낭 직전에 브라가에 옛마을이 참 좋습니다.
그 마을에 꼭대기에 곰파가 있는데,
곰파와 마을이 어울린 모습이 장관입니다.
그래서 마을 전체가 하나의 곰파처럼 보여요.
이곳은 꼭 보세요.
라운딩 동선 바로 옆에 있어서 1순위 추천입니다.

 

산늪님의 말씀처럼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따라 오른편으로는 윗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옛 마을이, 왼편으로는 아래와 같이 최근 지어진 듯한 롯지들이 늘어선 새 마을이 어우러져 있다. 사실 아주 작은 마을이라 옛 마을, 새 마을 구분한다는게 어울리지도 않지만.

 

 

이번 여정을 준비하면서 따로 가이드북을 사 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터넷을 통해 미리 이 길을 밟은 선배님들로부터 롯지들에 대한 정보를 와그르 모아온 것도 아니었지만, 어느 분이 브라가에서는 New Yak라는 롯지가 좋더라, 언급하신 글귀가 내 수첩에 적혀 있었고, 무엇보다 어제의 내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던지라 오늘만큼은 풀만이 끌고 가는 곳으로 따라가지 않고 이 New Yak라는 숙소 간판이 보이자마자 이 곳부터 기어들어가 보았다. 

 

반갑게 맞이하는 주인 말로는 오직 방 한 개만이 남아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찼거나 예약이 되어 있다고 하더라. 보여주는 방은 다른 방들에 비해 가장 안 좋아보였지만 - 해도 안 들고 전망도 안 나오는 1층 안쪽 - 그래도 어제와는 다른, 확연히 두터운 돌벽으로 건물이 세워진데다가 "브라가에서는 New Yak가 좋다"는 문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마치 객관적인 사실처럼 보이는 그 단순한 문장이 이토록 큰 힘을 발휘할 줄이야) 오늘은 그냥 속는 셈 치고 이 방에서 하룻밤 머무르기로 했다.  

 

명칭 : New Yak (그럼 어딘가 '구' 야크도 있나?)  

트윈룸 숙박비 : 350루피 (화장실 딸린 방) 참고로 내가 묵은 방은 313호였는데, 이상하게 산중 롯지들은 방 호수를 매기는데 일관성이 없는 듯 싶다. 이 집만 1층인데 313호를 달아놓은 게 아니다. -_-;  

샤워실 : 감격의 뜨거운 물! 다만 샤워기 사용 불가로 수도꼭지 이용

특이사항 : 역시... 추천 숙소가 될 만 하다. 이 고도에서 뜨거운 물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기쁘지만 지나온 숙소 모두와 비교해 볼 때 음식 맛이 가장 뛰어나다. 비록 내가 묵은 방의 전망은 별로였지만, 뒷 마당으로 나가기만 해도 끝내주는 설산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참고로 이 숙소에서는 때에 따라서 충전이 가능하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하다고 하는데, 카트만두에서 만빵 충천하고 온 디지털 카메라 배터리 하나가 거의 맛이 가고 있던 터라 충전 부탁을 했더니 일단 맡겨보라고, 저녁에 전기를 쓸 수 있으면 충전해 주겠다고 했는데, 결국 다음 날 아침, 불가능했다는 답변을 들었다.

   

 

비록 풀만이 지금껏 함께 지내온 이스라엘팀의 포터들과 헤어져(항상 우리 몫의 방까지 미리 잡아주었던 그들은 미리 다른 숙소를 택해 머물고 있었다) 좀 아쉬운 눈치를 보내긴 했지만, 주인에게 이야기해 펄펄 끓는 뜨거운 물로 머리만이라도 감고 나니 정말 무지 개운하고 좋더라(그간 거의 매일 머리를 감아온 김원장과는 달리 나는 2일차 자가트에서 감은게 마지막이었다 -_-).

 

치통도 어느새 사라졌겠다, 간만에 씻어내어 몸도 시원하겠다, 비록 몇 번이고 부탁하긴 했지만 결국 가져다 준 담요가 지나온 롯지들의 그것과는 달리 냄새도 안 나는 거의 새 것이겠다, 브라가에서는 이렇게 기분 좋은 일만 생기려나. 

 

이제 출출한 배만 채우면 될 것 같아 나는 2층 식당에 올라가 음식을 주문해 오기로 하고, 그동안 김원장은 먹거리를 세팅해 놓기로 했다. 식당에서 레몬티와 뜨거운 물 작은 병 한 통, 야채와 계란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주문해 놓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예전에 참제와 탈 사이 구간에서 만났던 적이 있는 쏼라쏼라 커플이 야외석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렇게 또 만나네... 이들이 점심을 다 먹고 나오면서 식당 계산대를 맡고 있는 주인집 아들에게 한 찬사, "이번 주 들어 처음 먹어보는 스테이크야" 아마 그 동안 고기가 무척이나 고팠나보다. 그러니 자그마치 1인당 1,000루피에 달하는 야크 스테이크를 사먹었겠지 -_-;

 

그러나 그 커플의 찬사가 그저 고기에 굶주렸던 이들의 호들갑스런 오버가 아니었다는 걸, 나 역시 곧 알게 되었다. 프렌치 프라이까지 딸려나온 샌드위치가 맛도 모양도 너무 훌륭했던 것! 이 집 주방장이 카트만두 출신일거라 심히 의심되는 가운데 조심조심 쟁반에 음식들을 받쳐들고 방으로 돌아오니 어라, 밥 준비 해놓겠다던 김원장이 침대에 뻗어 누워있다.

 

"밥 먹자~"

"아무래도 난 못 먹겠어"

 

듣자하니 내가 음식을 가지러 간 사이 배고픈 김원장이 비스킷을 꺼내 한 입 물었는데, 갑자기 확 쏠려오더란다(엇, 어제의 내 증상!). 오늘 오전부터 숨이 차오다가, 중간엔 눈이 아프다가, 숙소에 도착한 뒤로는 오심에 극심한 두통까지 겹쳤던 김원장은 샌드위치는 커녕 감자 하나 제대로 맛보지 못한 채 결국 타이레놀 신세를 져야만 했다. 바삭거리는 프렌치 프라이와 이렇게 맛있는 샌드위치를 눈 앞에 두고!

 

그러니까 김원장이 고스란히 어제의 내 증상을 물려받은 셈이다. 나참, 그게 뭐 좋은 거라고 따라서 겪냐. 그것도 오늘은 겨우 160m를 올라왔을 뿐인데...

 

덕분에 맛있는 샌드위치는 모두 내 차지가 되었지만 김원장은 타이레놀을 먹은 뒤로도 완전 시체처럼 뻗어 톡톡히 환자 노릇을 했고, 덕분에 나는 졸지에 혼자 배부른 직속 간호사가 되어 김원장을 돌봐야했다. 정말이지 여기 오니까, 그리고 이렇게 아파보니까 평소에 사소하다 생각되었던 것들에 대하여 참으로 감사하게 되더라.

 

안 아프다는 것, 산소가 있다는 것, 따뜻한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 심지어 우리가 둘이라는 것까지... 모두 평소에는 너무 당연해서 인식조차 하지 않고 지내왔던 것들인데 히말라야에서 새삼 그 존재 그 자체만으로 고마움을 느끼게 되다니.

 

그러나 저러나 웃기게도,

어제 아프니까 집 생각 나더니(비록 김원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그 말을 꺼내보진 못 했지만)

누워있는 김원장 입에서도 계속 이렇게 괴롭다면 내일 그냥 집으로 가잔다. ㅎㅎㅎ

 

지금 김원장도 어제의 나만큼이나 힘들구나. 내 그 고통, 정말이지 너무 잘 안다. 그래도 김원장, 어쩌겠어? 힘내, 잘 이겨내야지. 그리고 내일은 멀쩡하게 일어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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