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씨 : 맑음

@ 이동구간 : 차메(2,670m)-탈레쿠(2,720m)-브라탕(2,850m)-듀쿠르 포카리(3,060m)-로우어 피상(3,200m) / 530m 상승

@ 총 소요시간 : 6시간 10분(순수 걸은 시간 4시간 35분)

 

우려했던대로 간밤엔 꽤나 추웠다. 아침에 일어나 방안의 온도부터 확인해 보니 섭씨 1.7도. 분명 한밤에는 영하로 떨어졌을성 싶다. 창가에 놓아둔 물이 혹여 얼지나 않았을까, 창 앞에 서다가 움찔 놀란다. 어제 저녁에는 날도 흐리고 해서 잘 몰랐는데, 이 방에서 바라보는 설산 전망이 말 그대로 끝내준다(역광이라 사진으로 남기긴 어려웠지만). 북쪽으로도 창을 낸 이유가 있었구나! 

 

어제 많이 먹고 잔 탓인가, 입맛이 없는지라 최대한 가볍게 먹고 일찍 숙소를 나선다. 해는 떴건만 아직 기온이 상당히 낮은 편인데다가 몸이 완벽히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아 폴라텍으로 따뜻하게 챙겨 입고 출발이다. 오전 7시 30분, 아주 조금씩이긴 하지만 매일의 출발 시간이 전날보다 빨라지고 있다. 이는 모두 김원장의 계획에서 비롯된 것인데, 앞에서 누가 알짱거리는 것보다 우리가 먼저 조용한 길을 걷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다. 밤새 하이얗게 눈이 내린 다음날 아침, 누구보다도 일착으로 발자국을 남기고 싶은 내 마음과 비슷한 거겠지(하지만 어차피 천천히 걷다보면 어느 순간 대부분 우리를 앞서 가버린다 -_-;). 그런데 오늘은 일찍 나와봐야 초반부터 발걸음이 한없이 느려진다. 바로 눈 앞에 펼쳐진 차메 마을 구경 때문. 산에 들어온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차메 마을의 삐까뻔쩍함에 두 눈이 정신없이 돌아간다. 

 

 

"이것 좀 봐봐. 어머, 저기 저것도 좀 봐봐. 여기 없는 게 없어~"

 

차메에서는 인터넷은 물론이요, 신용카드를 이용한 출금도 가능한 것 같다. 처음엔 김원장 역시 정신없이 둘러보는 것 같았는데 나보다 빨리 수습을 한 모양인지 어느새 나를 놀려대고 있다.

 

"트레킹 며칠 만에 완전 촌뜨기 됐네" 

 

 

<헉, 초코파이! 눈 돌아갈만 하지 않은가!>

 

촌뜨기(부부 ^^)가 차메를 완전히 벗어나는데에는 무려 30분이나 걸렸다. 산 아랫동네보다 가격이야 비싸겠지만, 혹 트레킹 준비를 제대로 못 하고 올라왔다면 차메에서 웬만한 준비가 가능할테니 걱정하지 말 것. 보온이나 등산에 필요한 장비들, 익숙하면서도 칼로리가 높은 먹거리들, 다양한 규격의 밧데리는 기본이요, 각종 편의용품까지 어지간히 갖추고 있으니까.  

 

<차메를 벗어나면서. 아랫 사진을 보면 정말 티벳 문화권에 들어온 분위기가 물씬 난다>

 

차메를 뒤로한지 30분, 첫 마을 탈레쿠(Talekhu)를 만난다. 구슬을 쉽게 구할 수 없는 이 동네 아이들은 대신 딱딱한 호두알로 신나게 구슬치기 중이다. 정말 신나게...

 

내가 어릴 적, 동갑내기 사촌네 집에는 미국에 있는 친척이 보내준 레고 블럭이 참 많았다. 어찌나 내가 그 레고에 열광했는지, 나중에 커서 아이를 낳게 되면 ^^; 나는 우리 엄마와는 달리, 레고를 종류별로 산더미처럼 사주리라, 결심했었다. 당시 나는 아무리 조르고 졸라도 레고를 안 사주는(물론 못 사주는 거였다. 그 땐 그런 걸 이해할 나이가 아니었다) 엄마를 원망스러워했으며 그간 내가 재밌게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을 다 허접이라 느끼며 팽개치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몇 십년, 나는 물론 더 이상 레고를 사랑하지 않고 레고를 사 줄 아이도 없지만 지금도 쇼핑몰 한 구석에서 우연히 레고를 발견하면 옛 기억에 울컥, 해지곤 한다. 하지만 여행 중의 나라는 인간은, 우리나라에서라면 레고를 가지고 놀 만한 또래의 아이들이 이렇게 호두알이며, 고무줄 몇 개 가지고도 숨넘어갈 듯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과 종종 마주치곤 한다. 그리고 뜻밖에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재료로 만들어져 전세계 시골길을 신나게 누비고 있는 굴렁쇠를 보는 일은, 정말이지, 행복하기까지 하다. 그런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일까. 그 재주를 평생 간직할 수 있는 사회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어린 시절 기억에 폭 젖어 걷다 문득 고개를 들어본다. 이런 나를 훤히 굽어보는 산이 저기 또 있다.

 

 

발바닥에서부터 차츰차츰 전해오는 열기로 몸은 덥혀지고 있지만(벌써 잠바를 벗어제꼈다), 설산을 바라볼 때마다 괜시리 마음 한 구석이 쏴~아 서늘해져 오는 것은 왜일까. 혹 저 산봉우리와 내가 안 보이는 무언가로 굳게 연결되어 있어 그저 바라만보는 것으로도 쉽게 저 기운이 전도되어 오는 건 아닐까.

 

 

 

 

차메의 숙소를 출발한지 2시간 남짓, 우리는 브라탕(Bhratang)에 도착했다. 앞서 도착한 포터들이 저 앞 어느 한 곳에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 왜들 저기 모여있을까? 답은 맞은 편 가게에 있었다. 해가 잘 들어 따뜻해 보이는 진열장 너머로 층층이 쌓여있는 "fresh breads"가 바로 그 범인이었던 것. 아닌게 아니라 아침을 적게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간 빵다운 빵을 구경하기 어려웠던 탓인지, 그 빵이 참으로 맛있게 보인다. 여기서 우리도 티타임! 내가 김치에 그렇듯 서양인들은 역시 빵에 약한가 보다. 그럴싸해보이는 빵의 유혹에 넘어간 트레커들이 우리 이후로도 속속 모여든다.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오늘 이 집 대박났다!  

 

<사실 빵은 초컬릿과 시나몬, 단 두 종류 뿐이고 모양도 맛도 투박한 편이다. 하지만 여기가 바로 네팔하고도 히말라야 일번지, 그 이름도 유명한 안나푸르나 제 2봉 아랫마을 브라탕이라는 걸 되새김질 하다보면 황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다보니 오늘 차메에서 출발한 트레커들 대부분이 이 집에서 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팀은 우리를 제외한 유일의 50~60대 동양인 부부. 척 보기에 일본인이다. 남편과 아내의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것 같다만, 동양인의 정서상, 저 둘이 부부가 아니라 생각하긴 어렵다. 저 부부를 어디에서 처음 봤더라... 탈에서 점심을 먹을 때 식당 유리창을 통해 그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본 게 처음 같기도 하다. 동양인이 워낙 드문 편인데다가 그 부부는 항상 남편이 저~ 멀리 혼자 앞서 걸었던지라, 얼핏보면 마치 각자 나홀로 트레킹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우리로 말하자면 내가 때로 몇 십 미터쯤 앞서 걷곤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 서로 가까이에서 걷는 편이다). 오늘 우리와 멀지 않은 테이블에서 빵을 나눠 먹는 모습을 보니 역시 오래된 부부스럽다. 뭐랄까, 따로 따로 행동하는 것보다 함께 어울려 있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운.

 

브라탕 근교에서도 사과가 많이 나는지 빵집 한 구석에 알이 작은 사과들이 잔뜩 쌓여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서양인 팀을 인솔하는 가이드가 그 사과들을 집어 각 팀원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이 맛나게 사과를 먹는 모습을 보니 나도 식욕이 동한다. 저 사과 파는건가? 망설이는 사이 진열되어있던 빵들처럼 사과도 바닥을 드러낸다. 다행히 빵집 맞은편 가게에서 포터들이 골라주는 사과를 몇 개 구입할 수 있었다(개당 5루피). 지금까진 생각보다 쉽게 사과나 귤 따위의 과일을 구했지만 아마 고도가 높아지면 이 것마저 어려워질거란 생각이 든다. 있을 때 먹어둬야지.   

 

30분 간의 티타임을 마치고 듀쿠르 포카리(Dhukur Pokhari)로 이어지는 길, 야~ 정말 걷기 좋은 코스이다.

  

 

<절벽을 안으로 쳐내어 만든 길이 잠시 이어지지만, 폭이 넓어 무섭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날씨는 눈이 부실 정도로 쨍하고(모자랑 선글래스도 등장),

길 자체가 완만하고 평탄한지라 오르막이란 생각도 거의 안 드는 데다가,

경치는 또 얼마나 수려한지...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길의 오른편으로 엄청난 바위벽이 등장해 할 말마저 잃게 만든다. 바위 하나가 어지간한 산보다도 더 높다더니... 높이도 높이지만, 그 크기야 말로 실로 광대하다. 장관이 따로 없다.    

 

 

<뒤를 돌아보면 지도상으로는 안나푸르나 II봉쯤 되어야할 산이 보이는데...

뭐 이름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저 감탄>   

 

 

커~다란 바위의 위엄에 짓눌려 걷다가 이런 다리를 건너고 이어지는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면, 역시나 헐떡거리며 오르막을 끝낼 즈음, 딱 쉴만한 고 자리에서 단촐한 티벳풍의 기념품 가게가 트레커들을 맞이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오르막길의 기념품 가게보다 내리막길, 즉 고개 너머의 기념품 가게들이 더 잘 될 거라는데 한 표 던진다. 내 경우, 오르막길에 뭔가 무게를 더한다는게 심리적으로 꽤 부담스러우니까(물론 이 길로 내려가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오늘 하루만 해도 정말 다양한 모습의 길들을 만난다). 숲 속이니만큼 분위기는 아늑해서 좋은데, 길 자체는 오르막인지라 김원장은 이 구간에서 숨이 차 온다며 더욱 천천히 걷는다. 아침에 차메에서 일찍 출발했지만 차메 구경 하느라 뒤로 쳐지고, 다시 브라탕 빵 가게에서 모두 모였다가 비슷하게 앞서거니 뒷서거니 출발했지만, 소나무 숲에서 다시 우리는 후발대 자리를 고수하게 되는 셈이다.  

 

 

 

 

소나무 숲속을 헤치고 나서니,

 

<풀만이 우리 짐을 지고 가는 모습을 볼 때는 마음이 편치 않다가도 다른 팀의 이런 포터들을 보면 그래도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_-; 그러고보니 오늘은 다른 팀의 여러 가이드 및 포터들과 어울려 잠시 함께 걷기도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이 길을 걷는다는 이유 하나로 어쩜 우리 모두는 한 팀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하나의 작은 마을, 듀쿠르 포카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브라탕에서 여기까지 기념품 가게 앞에서 10분간 쉰 것 포함 1시간 40분 소요). 우리를 앞질러 갔던 그 수많은 트레커들이 또 여기 와 모여 있구만. 여기서 오늘의 목적지인 피상(Pisang)까지는 이제 겨우 한 시간 거리니 우리도 오늘은 맘껏 여유를 즐기다 가자고~ 분위기는 오른편 식당이 나아보이지만, 이미 많은 트레커들에 의해 복작복작 점령당한지라 우리는 맞은 편을 택한다(여기서도 백인들은 항상 햇볕 아래 야외 좌석을 선호하는 반면 우리는 여전히 그늘진 자리를 찾아든다).

  

 

<인기가 많았던 식당 간판. 벌써 피상(Pisang)권역인가보다>

 

<하지만 우리는 맞은 편 식당으로 Go Go>

 

차나 한 잔씩 마시고 점심은 피상에 도착해서 먹으려고 했는데 풀만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여기서 밥을 먹고 가자는 눈치다.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점심 메뉴 : 맨밥과 마늘 수프 주문+깻잎 통조림 하나 뜯고> 

 

<국물까지 탈탈~ 완전 깻잎 비빔밥을 만들어설라무네~ 꿀꺽>

 

<반면 우리 풀만의 식단은 오늘도 변함없는 달밧 떨커리>

 

달밧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예전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년 전 네팔에 왔을 때에는 지금처럼 한식을 가져오지도, 조리해 먹지도 않았었더랬다. 그러니까 삼시세끼 매식을 했다는 말인데, 카트만두와 포카라에 얼마나 먹거리가 많은지 네팔의 대표 주식인 달밧 떨커리 한 번 먹을 기회가 없었다(정확히 말하자면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우리가 안 사먹은 것). 당시 네팔에 단 며칠 머물고 지나가는 일정이었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사실 그 때 당시 우리는 네팔에 제법 오래 뒹굴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달밧에는 손이 안 가더라(대신 하루 한 끼 이상 꼬박 한식을 사먹었던 것 같다). 그렇다, 바로 전 나라 티벳에서 같이 서부를 여행했던 여행자 하나가 여정 막판에 한 식당에서 끔찍하다는 톤으로 "No more 툭바(티베탄 칼국수)~"를 외쳤던 것에 비하면 네팔에는 엄청나게 훌륭한 먹거리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었고 그들에 눌려 좀처럼 달밧을 사먹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네팔 여정 막판에 "고르카"란 마을에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당시 그 마을로 말하자면, 달밧 말고는 먹을게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버스정류장 근처 한 작은 식당에 들어가 달밧을 주문했는데 그 달밧이야말로 지극히 현지식다운 달밧 그 자체였다. 당시 그 달밧을 먹으며 네팔을 떠나면서야 제대로 된(그러니까 외국인 입맛에 맞게 차려진 달밧이 아니라 네팔리들이 평소 즐겨먹는) 달밧 한 접시 먹고 가네~ 했었던 기억이 난다. 잡설이 길었는데 여하튼, 이번 여정에 있어서는 한식도 싸왔고 심지어 해먹기도 하니 과연 제대로 된 달밧 한 접시 먹어보고 가게 될까 싶다. 계속 이런 식으로 입맛에 맞는 음식만 먹으려고 들면 -_-; 달밧은 언제 또 먹어보려나.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듀쿠르 포카리의 "포카리"는 "호수"란 뜻이렷다! 누군가 스위스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는, 산과 호수가 어우러지는 구간이다(예쁜 호수는 아니다). 길은 무지 평탄하고 넓어서 그냥 평지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스위스가 이와 비슷한 풍경이었는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스위스보다 훨씬 날(rare) 풍경임은 확실하다.

 

 

<저 멀리 보이는 설산을 줌으로 댕겨보니 대략 이런 모습이고>

 

<드디어 아랫마을 피상과 윗마을 피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설산은 여전히 아득히 멀다>

 

<뒤를 돌아보면 여전히 건재한 바윗덩어리. 브라탕 나서면서 본 것 같은데 아직도 안 끝났다>

 

<피상으로 들어서는 입구>

 

<웰컴 투 피상>

 

 

<피상은 마을이 두 개다. 현재 사진으로 보는 윗쪽 마을은 Upper Pisang, 아랫 마을은 Lower Pisang이라 불리우며 각 마을로부터 트레킹 루트가 위 아래로 갈렸다가 이후 브라가(Braga) 근처에서 다시 만난다. 같은 이름의 마을이 두 개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흔히 그렇듯, 윗 마을이 원조 마을이고, 아랫 마을은 트레커들이 다니는 길을 따라 새로 만들어진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아님 말고 ㅋㅋ>

 

한국말로 인사하는 포터들이 또 먼저 숙소를 잡고 우리를 부른다. 이번엔 아예 우리 방도 잡아놓았다나, 뭐라나. 프랑스팀의 포터들 같은데, 덕분에 며칠째 계속 같은 곳에서 머물게 된다. 풀만과도 그새 친해졌는지 포터들끼리 잘들 어울려 지내는지라 풀만과 별 대화를 나누지 못해 괜히 미안한 우리로서도 보기가 좋다.   

 

 

명칭 : Eco cottage & Lodge  

트윈룸 숙박비 : 250루피

공용 화장실 및 샤워실 : 뜨거운 물은 안 나왔음(둘 다 몸 상태가 별로라 이용할 생각을 못 해 물어보지 않았지만 요구한다면 한 주전자 끓여주지 않을까 기대)

특이사항 : 각 방은 독채 방갈로 스타일로 이름처럼 너무 에코(?)스럽다. 안타깝지만 추워서 다음 번엔 이 숙소에 안 묵을 것 같다. 앞으로는 방 벽 두께를 확인하고 묵으리오!

   

<숙소는 길에서 꽤 아래 지대에 위치해 있는지라 계단을 이용한다> 

<맞은편 방의 모습, 우리에게 주어진 방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내부는 매우 좁은 편으로 침대 두 개 외에는 배낭 놓을 자리도 마땅치 않다>

 

방 문 바로 앞까지 볕이 잘 드는 것에 비해 방갈로 스타일의 방 안은 생각보다 어둡고 매우 썰렁한 기운이 감돈다. 마음 같아선 우리도 볕 잘 드는 문 앞 계단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싶지만, 프랑스팀 애들이 우리가 묵는 방임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 계단에 본인들 등산화며 양말 따위를 늘어놓은데다가 결정적으로 모두들 밖에 나와 열라 떠들어대고 있어 김원장의 짜증을 돋군다.

 

"쟤네 보고 좀 조용히 해 달라고 그럴래?"

 

왜 꼭 이런 걸 나한테 시키는지... 물론 나도 그런 말 따위 하고 싶지 않다. 벌써 며칠째 저들과 같은 숙소에 묵고 있는지라 서로 낯도 조금은 익은데다가 특히나 저들의 포터들과의 연을 생각하면 더욱 말꺼내기가 껄끄럽다.

 

"조금만 기다리면 해가 기울테고, 그럼 각자 자기 방으로들 들어갈꺼야. 조금만 참아. 쟤네도 이렇게 볕 좋을 때 얼마나 모여 떠들고 싶겠어~"

 

그러나 여전히 우리 방 안에서 듣는 그들의 재잘거림은 귀에 거슬릴 정도다. 김원장은 이런 방에서 쉬느니 차라리 마을 구경에 나서겠단다. 오전에 먹었던 빵이 제법 맛있었는지, 빵집이 있으면 빵도 좀 사오자면서. 빵? 빵에 약한 나, 졸래졸래 따라나선다.   

 

<우리 숙소 입구 계단에서 바라본 윗 피상 마을. 아랫 피상 마을과는 100m 가량 고도차가 난다> 

 

 

우리 부부의 인터뷰가 실리기도 한 <세계일주 바이블>이란 책을 보면, "여행자의 발을 묶는 은둔의 여행지"로 파키스탄의 훈자와 더불어 네팔의 포카라가 상위에 꼽히는데, 오늘, 피상을 향해 걸으며 그 두 곳의 공통점이 무얼까,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두 곳 모두 히말라야, 그 높고 깊은 산 자락에 위치해 있고,

둘째, 물가는 와방 저렴하며,

셋째, 무엇보다 만나는 현지인들이 참 좋은 분들이라는 것.

 

정말 <은둔>하기엔 이 동네가 딱이지(어쩐지 바닷가는 은둔하기 좋은 곳이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시야가 뻥 뚫려서야). 

 

 

<어퍼 피상을 향해 가려면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마을 중심 한 건물이 최근 화재 피해를 입었는지 공사 중이었다. 사고 현장은 저 마니차 뒷편>

 

빵을 판다 내건 곳은 몇 곳 있었지만, 어쩐지 포스가 느껴지질 않는 곳들이었던지라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돌아보고는 그냥 숙소로 컴백했다. 다행히 시끄럽게 떠들던 아이들은 각자 방으로 돌아갔는지 우리 방 앞 테이블가에는 오직 두 명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바라던 바야, 이제야 좀 쉬겠거니, 침대에 누웠는데 갑자기 김원장이 머리가 아파온다고 한다. 처음에는 두통이 올랑말랑 하는 정도라고 해서 별 걱정 안 했는데 결국 타이레놀을 꺼내 드는 걸 보니 제법 증상이 심해지고 있나보다. 아무래도 지대가 지대이니만큼 고산병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다. 괜찮겠어? 약 먹었으니 괜찮아지겠지. 김원장은 약을 먹고 눈을 감는데, 아이고, 나는 도무지 이 방 안이 너무 추워서 침낭 속에 들어가 있어도 몸이 떨려온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혹 식당에 불을 피우지 않았을까 다녀와 보기로 한다.

 

때가 들어맞았는지, 내가 식당으로 올라가 추워요~ 하니 난로불을 피우겠다고 한다. 야~호, 얼른 방으로 돌아와 김원장에게 함께 식당으로 올라가자니 본인은 차라리 자는게 낫겠다며 혼자 가 있으라고 하네. 이따가 시간 맞춰 주문해 둔 저녁 식사가 나오면 그 때나 불러 달란다. OK. 나는 혼자 불 피우는 식당 난롯가로 향한다. 아무래도 그제부터 시작된 몸살 감기가 완벽히 떨어지질 않은 모양이라 생각하면서.

 

본격적으로 난로가 지펴지자 아까 시끄럽게 굴던 프랑스팀이 하나 둘씩 식당으로 모여든다. 며칠째 같은 숙소를 이용했어도 오늘처럼 가까이 둥그렇게 둘러앉았던 적이 없었던지라 비로소 얼굴들을 하나하나 뜯어본다. 그러고보니 제법 젊은 축이네. 모두 일곱명. 그들 역시 내가 신기했는지 말을 걸어온다. 어라, 알고 보니 이들은 프랑스인이 아니었다. 얼핏 그들이 떠드는 소리에서 불어를 들은 것 같았는데... 그 말을 하니 그들 모두가 웃는다. 종종 그런 오해를 받는다면서. 그들은 이스라엘리였다. 그들이 말하길 누군가는 자기네 말을 들으면서 프랑스어 같다고 하고, 누군가는 스페인어 같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아랍어라고 한단다(알고 보니 발음이 같은 단어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란다. 제일 재미있던 단어는 단연 "얄라!". 내가 중동을 여행하면서 배운 몇 단어 중 하나로 "가자!"는 뜻인데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간다고 할 때 얄라를 쓴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스라엘리들을 아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관점을 좁혀 "여행지에서 만나는 이스라엘리"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은 동반자라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게다가 좀 전의 수다로 인해 본의 아니게 우리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했기 때문에, 솔직히 이스라엘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반갑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나와 같은 "트레커"로서, 그리고 "여행자"로서 이야기를 나눌만한 꺼리는 제법 많았다(내가 영어 답변을 버벅거려서 그렇지 -_-;). 마침 내가 불과 몇 달전, 이스라엘 코 앞까지 갔다가 테러 위험 때문에 방문하지 않고 지나친 기억이 있어 더 할 말이 많았을런지도 모르겠다. 

 

알고보니 그들은 한 일행이 아니었고 여성 둘, 커플 하나, 남성 둘, 그리고 나홀로 남성으로 이루어진, 자그마치 네 팀이었다. 모두 네팔에 와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같은 이스라엘인이라는 동질성으로 묶여 이 트레킹을 함께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와 친하게 지내는 그 팀의 포터 둘은 각기 여성팀과 남성팀에만 따로 고용되어 있었던 것이고, 커플과 나홀로 남성은 본인의 짐을 각자 진 채로 트레킹 중이었다. 그 일곱 중에는 이제 막 제대를 한 20세의 어린 여성(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여성도 군대를 간다)부터 30세를 훌쩍 넘긴 사람들까지(그래도 다 나보단 어리더라 -_-) 골고루 있었는데, 그들의 국적을 떠나서, 나이나 직업이나 성별과 상관없이 어우러져 다니는 모습은 어쨌든 보기 좋았다. 제일 어린 20살 여성이 커플로 여행을 왔고, 나머지는 모두 미혼으로 동성끼리 왔다는 것도 흥미로웠고(여하튼 여행중인 이스라엘리는 정말 많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꺼냈더니 자기네 나라에는 "이스라엘 국내에 남아있는 이스라엘리보다 여행 중인 이스라엘리가 더 많다"는 농담도 있다더라).

 

한참을 떠들다가 드디어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김원장을 불러왔다. 다행히도 그간 김원장의 두통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고 했다. 오늘의 저녁 메뉴로는 맨밥에 달걀 수제비(에그 텐툭:텐툭은 티베탄 수제비)를 주문하고, 따로 즉석 사골우거지국까지 준비해 둔 터였다. 자, 이제 맛있게 먹자~

 

그런데,

 

갑자기 내게 문제가 생겼다. 

 

멀쩡하니 웃고 떠들고 잘 놀다가 밥을 한 숟갈 떠 넣는 순간, 갑자기 화~악 쏠려오는 것이다. 어라, 속이 왜 이러는 거지? 분명 배가 고팠는데? 너무 갑작스레 생긴 증상이라 다소 황당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혹시나 해서 다시 한 숟갈 입에 넣어봤지만 이번엔 정말이지 토할 것만 같았다. 그와 동시에 핑~도는 머리.

 

음식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오심이 계속 이어지는지라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밥 먹는 김원장 혼자 식당에 남겨두고, 먼저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어쩌면 난로를 너무 코 앞에서 쬐서 생긴, 일시적 저산소증 -_-; 이 아닐까... 혼자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가며 춥고 어두운 방, 침낭 속에 들어가 누워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증상은 더욱 심해지기만 했다. 식사를 마친 김원장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두통이 매우 심각해진 상태. 

 

그랬다.

 

내게 그 놈의 고산병이 온 것이었다.

 

가만히 누워있어도 하늘이 빙빙 돌고, 먹은게 없어도 속은 마구 울렁거리고,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런 된장, 오고야 말았구나. 트레킹 중 컨디션이 나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는데! 그것도 겨우 3,200m에서!!!

 

내가 넘어야 할 고개는 근 5,500m에 달하는데, 이제 겨우 3,200m에서 이렇게 처참히 무너지다니... 정말 눈앞이 깜깜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증상이 고산병임이 확실해지자 내가 쿤밍에서 겪었던 심계항진이나 카일라스에서 겪었던 호흡곤란 따위가 떠오르면서, 그 때 당시 별 걱정 안 했던 그 증상 또한 마일드한 고산병 증세였고, 실제로 그 때 증상은 이번에 비하면 별 거 아니었구나, -_-; 싶더라(실제로 카일라스를 여행할 때는 5,000m를 넘나들었지만 당시에는 어느 정도 고소 적응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5,000m 이하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만큼 이번 증상은 너무나 강력했고, 나 역시 고산병을 겪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는, "날 밝으면 내려가야겠다"만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았다.

 

억울하게도 -_-; 고산병을 앓는 나를 위해 김원장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고, 나 역시 그나마 겨우 편한(=덜 쏠리는) 체위를 찾아 눕고 간간히 물을 마시면서 열심히 심호흡을 해대는 것 밖에는, 그 긴 밤을 지낼 방법이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러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감정적인 생각과,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쉽게는 안 죽더라, -_-; 하는 경험(나는 중환자실 출신이다)까지 어우러져 정말 다시는 못 해 먹을, 길고도 긴 밤이었다(김원장이 의사였지, 하는 사실은 증상 완화에 별 도움이 안 되더라 -_-;).

 

날 밝으면,

내려간다.

 

 

 

 

 

"나 돌아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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