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씨 : 맑음

@ 이동구간 : 나디 바자르(930m)-바훈단다(1310m)-샹게(1100m)-자가트(1300m)

@ 총 소요시간 : 7시간 30분(순수 걸은 시간 5시간 30분)

 

간밤에 3번이나 깼다. 이유야 여러가지였다. 처음엔 시끄러워서, 다음엔 추워서, 마지막에는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어쩜 이런저런 원인들의 합집합 때문일런지도). 옆 방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방 자체가 방음이 안 되어 있기도 했지만 실제 처음 나를 깨운 것은 쥐(로 의심되는 동물)였다. 다다다다 장판 위를 달리거나 부스럭부스럭 비닐 봉지를 건드리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를 갉아대는 소리. 지극히 조용한 밤, 이 소리는 몹시도 자극적으로 들렸고 나로 말하자면 한식을 이따만큼 싸온 처지였기 때문에 첫날 밤부터 쥐에게 습격을 당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귀찮아도 침낭 밖으로 기어나가 먹거리를 단디 여미거나 여기저기 데롱데롱 매달아두는 수 밖에(나는 끝내 약간의 무서움과 귀차니즘으로 인해 최대한 화장실 가기를 미루고 또 미뤘지만, 김원장은 화장실 가려다가 눈이 번쩍이는 개급 크기의 동물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오전 6시, 미리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고도 30여분을 침낭 속에서 밍기적거리다가 겨우 기어나온다. 화장실부터 다녀온 뒤 어제 주렁주렁 널어놓은 빨래들을 확인해보니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 하지만 어쩌랴. 그냥 입어 말리는 수 밖에 없다. 산이 깊어질수록 우리에겐 선택의 폭이 점점 줄어들텐데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어디 있나. 다행히 하루 만에 적응 열라 잘 하고 있다. 내가 원래 한 적응 한다.  

<아침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 김원장. 이미 알아온 정보대로 어젯밤 미리 오늘의 아침 식사 시간과 메뉴를 주문해 놓았다. 주문과 동시에 음식을 만드는 탓에 미리 주문하지 않으면(혹은 미리 주문해도 -_-;) 원하는 시간에 먹을 수 없게 된다>

<아침 메뉴 : 달걀 후라이, (자칭) 야채 오믈렛, (자칭) 팬케이크, 밀크티. 이 때만 해도 이 집만 자칭 메뉴가 많은가보다 생각했는데...>  

 

숙소를 나서기 전, 주인장과 돈 계산을 한꺼번에 했다(떠나오기 전에는 몰랐는데 트레킹을 하다보니 모든 숙소가 이렇게 일괄정산 시스템이더라. 머물면서 뭘 주문해다 먹었는지 잘 기억해두도록 ㅎㅎ). 마침 주인 아저씨는 영어가 되시길래 샹게행 지프에 대해 물어보니 언젠가 산사태가 난 뒤로는 더 이상 지프가 다니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불불레에서 샹게까지는 회장님 할애비라도 얄짤없이 걸어가야 하는 셈. 샹게까지 차가 다닌다는 짱 사장님 말씀만 믿고 보름 일정이면 충분히 되겠거니, 계산했었는데 당장 하루가 더 추가되게 생겼다(뭐 그래도 일정이 널럴한 우리에겐 딱히 문제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원래 계획대로라면 어제 샹게에서 자고 오늘은 '참제'나 '탈' 정도까지 가보려고 했는데...)

 

오전 7시 50분, 배낭에 넣어두었던 스틱까지 꺼내 세팅을 하는 것으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축축한 옷을 걸친 채 출발! 외친다. 본격적인 트레킹의 두근두근 시작이다. 오늘 과연 어디까지 걸을 수 있을라나? 남들이 걷는 만큼 나도 걸을 수 있을까?

 

<길에서 만나는 동네 여학생들이 나보다 훨씬 세련됐다. 아직 저지대라 그렇다고 자위 -_-;> 

 

 

<좁은 현수교를 먼저 점령한 당나귀떼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김원장> 

<처음엔 어제처럼 평탄하게 뻗은 길인가 싶더니 어느새 숨이 차오르는 길이 바훈단다까지 이어지면서 마르샹디강을 저 아래로 쑤욱~ 밀어넣는다>  

 

 

<나디와 바훈단다의 고도차는 대략 380m. 슬슬 숨이 차오는 오르막. 몸도 어느새 덥혀지고> 

<롯지 하나 없는, 순수 현지 마을들을 만날 때마다 자꾸 눈이 돌아가는 나> 

<바훈단다에 이르기 직전, 경사가 급한지라 내려오던 백인 노땅 팀원 한 분이 쫘-악 미끄러지던 오르막 한켠에서 마을 할아버지 한 분이 손주들을 안고 막 따왔을 귤을 팔고 계셨다. 트레킹하면서 과일은 구할 수 있는데까지 구해먹자, 주의였기 때문에 손에 들고갈 수 있는 만큼, 6개를 샀다. 개당 5루피니까 우리 돈 100원 미만>

 

나디를 떠난지 1시간 50분 만에 헐떡거리며 도착한 바훈단다는 내 기준으로는 1,310m 산 꼭대기 -_-; 에 위치한, 작은(그러나 이 동네 기준으로는 큰) 마을이었다. 올라오는 경사가 제법 길고 심해서 나같은 게으른 트레커들이라면 예서 하룻밤 쉬어갈 마음들이 생길 법 했는데 그래서인지(물론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마을엔 롯지들이 몇 있었다. 한 식당에 앉아 환타 한 병(500ml, 90루피)을 시키고(사실 트레킹을 하면서는 물만 마시자 했는데, 헉헉 올라오고 나니 무엇보다 시원한 환타가 땡기더라. 그러나 아쉽게도 환타는 그닥 시원하지 않았다. 냉장고가 없는 탓) 지도를 보니 다음 큰(?) 마을인 샹게까지는 오히려 200m를 내려가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마을인 자가트까지는 다시 200m를 올라가야 하고. 아, 짜증. 기껏 낑꼬라낑꼬라 400m를 올라왔는데 다시 200m나 내려갔다 또 그만큼 올라가라니. 당연 투덜거리는 마음이 생겨났다. 샹게까지 차가 다녔음 오죽 좋아? 그럼 이런 오르락내리락 안 해도 되는거였잖아... 하는.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산에서의 옵션은 참으로 심플하다. 여기서도 그 법칙은 예외없이 적용되었다. 나는 지금 1,310m에 서 있고 다음 마을은 여기서 200m 아래, 그리고 다시 그 다음 마을은 현재 높이. 오늘 오전, 이제 겨우 2시간 등산을 했을 뿐이라 체력은 남아 있고, 이후 내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길은 앞으로 가든 뒤로 돌아가든 무조건 하산. 무엇보다 내게는 신나게 얄라!(가자!는 뜻의 아랍어)를 외쳐대는 남편이 있다. -_-;

 

그리하여 이어진 미니 하산. 캬! 경치는 좋네 ^^;

 

<바훈단다를 넘어서니 저 멀리 다시 마르샹디가 보인다. 꼬불꼬불 마르샹디를 바라보며 잠시 한숨을 쉬어본다. 대체 앞으로 몇 굽이를 돌아야 -_-;> 

 

 

 

 

정오가 가까와지자 땀이 날 정도로 더워진다. 어젯밤 추위에 떨었다는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물 마시고 음료 마시고 귤까지 다 먹어치웠는데도 오전 내내 화장실 가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수분이 부족한 모양이다. 마침 자생귤을 직접 갈아 쥬스로 만들어주는 아주머니를 또 발견, 고새 다 먹어치운 생귤을 또 보충한다(김원장은 생과일쥬스보다는 섬유질을 함께 먹을 수 있는 과일 자체를 선호하는 편). 초록색 껍질에 그다지 단 맛은 없는, 대신 이따만한 씨가 있는 작은 귤들. 

 

샹게 못 미쳐 게르무(Ghermu)라는 마을에 도착하자 우리 포터 풀만이 여기서 밥을 먹고 가잔다. 시계를 보니 12시. 그러지, 뭐. 풀만이 하는 양을 보니 게르무에 알고 지내는 롯지가 있는 모양이다. 풀만이 안내하는 롯지로 말 잘 듣는 아이들마냥 따라 들어가 건네주는 메뉴판을 펼쳐본다.

  

 

짜고 치는 고스톱인가, 식당마다 메뉴판이 거의 동일하다(얼마 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메뉴와 요금 모두 정부의 관리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비슷한 고도라면 대부분 동일 메뉴에 동일한 가격을 받는다고나 할까. 바가지 걱정은 없겠다). 음식 주문을 하고 등산화부터 벗어제껴 뜨끈한 발을 식힌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점심을 기다리며 찰칵. 트레커들과 더불어 끊임없이 당나귀들이 딸랑딸랑 목방울을 울리며 지나간다>   

<점심 메뉴 : 맨밥과 마늘 수프+장조림 캔과 어제 먹다 남은 깻잎. 네팔리 주식의 특성상 맨밥은 어디에나 있고 보통 한 그릇 시켜도 둘이 먹을 정도로 많이 준다. 마늘 수프는 고산병을 예방해준다는 썰이 있는데 정말일까? 깻잎통 위의 알약은 씹는 치약>

 

정작 먹는데야 몇 분 안 걸렸지만 맨밥에 마늘 수프 달랑 만들어 주시는데에도 워낙 시간이 오래 걸려서 1시간 반이나 지나서야 다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김원장은 생각보다 밥 주문하고 먹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며 약간 조급해하는 눈치.

 

 

 

부른 배를 두들기며 게르무에서 30분 정도 더 걸어 이런 다리를 하나 건너는 것으로 드디어 그 놈의 샹게에 도착했다. 여기가 워낙 어제 오후에 도착했어야 하는, 그리고 하룻밤을 보냈어야하는 샹게란 말이지?    

 

<다리 위에서 바라본 상류 풍경. 보기와는 다르게 다리가 하나도 안 무섭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진이랄까>

<나보다 먼저 샹게에 도착한 김원장. 왼편으로 가면 아마도 불불레행 지프가 다니던 길이 나오겠지? 하지만 우리가 갈 방향은 다리 건너 오른편>

 

샹게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막 2시가 되고 있더라. 이제 샹게에서 자야하나, 아니면 좀 더 가야하나 어쩌나. 잠시 고민하던 끝에 한 낮인데도 샹게가 햇볕이 잘 안 드는 어두컴컴한 마을이라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어제 도착했어야 하는데 이제 도착했다는 우리만의 조급함도 있고, 1시간 30분씩이나 밥 먹고 다시 걸은지 30분 밖에 안 되었으니 밥값을 마저 해야한다는 의무감과, 아직 2시 밖에 안 되었다는 익숙한 효율성까지 겹쳐 좀 더 걸어보기로 한다. 얄라얄라!  

  

 

<이미 공지했듯 자가트는 샹게에서 다시 200m를 올라가야 한다. 그래도 앞선 오르막에 비하면 이 구간은 쉬운 편.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신발끈을 고쳐매는 김원장>   

<얼마나 걸었을까. 살짝 샹게 방면 뒤돌아보기. 사진 속에 네팔에선 흔한 다랭이밭이 보인다> 

<그리고 드디어 자가트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마을 입구 표지판이 등장! 야호~>

 

이미 간만의, 그리고 역시나 조금은 무리였던 산행으로 인해 나는 마을 어디서든 얼른 방 잡고 쉬고 싶은데, 우리 풀만은 자가트에서 자겠다는 우리 말을 듣고도 계속 앞으로 앞으로 마을을 관통해 나아갈 뿐이다. 그러다 앞서 와 있는 다른 팀 포터들의 말을 뭐라뭐라 듣더니 우리를 안내한 곳은 바로 여기! 마을 거의 끝자락의, 겉에서 보기에도 그럴듯해 보이는 한 고층 롯지였다.

 

명칭 : The North Face River View Guest House (이름처럼 북향의 전망좋은 첫 방에서는 마르샹디가 보였는데 우리가 옮긴 남향의 두 번째 방에서는 강이 안 보였다)

트윈룸 숙박비 : 200루피 (화장실이 딸린 방은 300루피. 처음 우리가 묵으려고 했던 방은 2층의 화장실이 딸린 좋은 방이었으나 바로 위 3층 방에서 울려대는 발소리 때문에 우리도 꼭대기 3층 화장실 없는 방으로 옮겼다).

깨끗한 화장실겸 샤워실 : 핫샤워 가능

특이사항 : 자가트에선 지은지 얼마되지 않은 축인지(그 증거로 저 위 마을 지도를 보라. 이 롯지만 다른 색으로 추가 기재된 듯하다) 어제 숙소보다 월등히 좋다. 이상하게 어제도 남향방, 오늘도 남향방 같은데 오늘 이 방은 어제보다 고도가 많이 높은데도 안 추워 빤스와 런닝만 입고도 잘 수 있다. 다만 방안에 아예 전구라는 것 자체가 없다(식당만 불 들어온다). 대신 양초는 무료 제공해 준다.   

 

 

<노스페이스에서 간판이라도 찬조받은 것일까. 그러고보니 카트만두에 있을 때 노스페이스가 네팔 짝퉁들에 대해 경고하는 문구를 실은 신문을 본 게 생각난다> 

<3면이 창이라 그저 눕는 것만으로도 하이디처럼 별을 볼 수 있다>

 

따뜻한 물이 나오니 오늘도 핫샤워 호사를 누린다.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 앞 마련된 작은 야외 식탁에 앉으니 누가 성수기 아니랄까봐 우리 말고도 전 세계에서 온 트레커들이 바글바글이다. 그런데 유달리 우리에게만 친절한 서빙 담당 직원, 우리에게 어디서 왔냐 확인 사살까지 하더니 살짝 몸 기울여 남몰래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We are one asia"

 

아마도 얼굴 허옇고 삼삼오오 카드 치며 시끄럽게 구는 백인팀보다 말없이 앉아있는(왜 식당에서 마주치는 모든 부부들은 서로 말이 없을까 -_-;), 그들과 비슷한 얼굴을 한 우리에게 더욱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다. 그의 '우리가 남이가! 아시안 한 가족 아이가!' 하는 말을 듣고 맞다, 우리는 같은 아시안이다 맞장구 쳐주니 그가 더욱 좋아라한다. 그가 우리몫 접시를 들고 올 때마다 풀만에게 배운 감사합니다란 뜻의 네팔어, '단네밧'을 외치니 그의 얼굴이 더욱 환해진다. 나의 기분도 그만큼 환해지고. 

 

 

<저녁 메뉴 : 역시나 맨밥과 계란 볶음밥. 계란과 따로 노는 계란 볶음밥을 보고 둘이 한참 낄낄거렸다("이건 그냥 볶음밥 위에 계란 뿌린거잖아!"). 여기에 뜨거운 물을 따로 주문하여 후딱 만들어낸 우거지 된장국. 참, 뜻밖에 음식들이 우리 입맛에 매우 짠 경우가 잦다. 다음에 다시 간다면 매 주문 전 '짜지 않게요~' 부탁하리라>

 

이 숙소에서 전기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식당 뿐이지만, 그 곳은 백인 트레커들만 가득하고 나에겐 좀처럼 극복이 안 되는 영어 울렁증이 있으니 따끈한 밀크티를 마지막으로 식당을 뒤로 하고 방으로 올라온다. 하지만 촛불로만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우리의 작은 방... 딱히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으니 일찌감치 잠을 청하기로 한다. 여기저기 켜 둔 촛불을 모두 후~ 불어 끄고 각자의 침낭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ㅋㅋ 보다 전망이 좋은 김원장 침대 위에 일단 누워 하늘을 보니... 역시 어제의 감동쯤은 언제든 줄 수 있다는 투로, 깜깜한 하늘이 수많은 별들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휘익 떨어지는 별똥별. 엇, 나 소원 아직 못 빌었는데... 별똥별 하나 더 보려는데 김원장이 자기 침대 좁다고 투덜거린다. 알았어, 내 자리로 간다구! (우리가 결혼 몇 년차더라...쿨럭

 

제 침대로 돌아오는 내 마음 속에 문득 떠오르는 광경은 파키스탄 낭가파르밧의 헤를리코퍼 베이스캠프. 거기서도 별똥별 떨어지는 것을 봤었는데 말이지. 네팔과 파키스탄이 나눠가진 건 히말라야뿐만이 아니다. 거기엔 내 추억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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