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씨 : 흐리다 결국 비

@ 이동구간 : 다라파니(1860m)-바가르찹(2160m)-다나큐(2300m)-티망(2270m)-코토(2600m)-차메(2670m)

@ 총 소요시간 : 6시간 45분(순수 걸은 시간 5시간 15분)

 

다행히도 다라파니에는 시계 볼 줄 아는 닭들이 살고 있나 보다. 김원장이 가져다 준 담요덕인가, 밤새 땀을 뻘뻘 흘리고 잤는지 아침에 일어나보니 식은 땀이 흥건하다. 그래도 목이 약간 아픈 것을 제외하면 어제의 몸살기는 많이 사라진 것 같다. 가만히 그 밖의 몸 상태를 들여다 보자니 오른쪽 종아리 부근에 근육통이 있는 것 말고는 모두 OK. 아이, 좋아라~ 다리야 뭐, 꼭 몸살 기운의 잔재라기 보담 어제 많이 걸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어제 6시간 40분이나 걸었으니 평소의 내 체력으론 좀 무리였을테지. 하지만 어제의 걷기 덕에 앞으로의 일정이 한결 여유로와진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는 하루 5시간 이내로, 천천히, 즐기며 올라가리라 다시금 맘 먹어 본다. 거의 사라지긴 했지만, 어쨌든 감기 기운은 어제의 욕심에 대한 자연의 경고였을테니.

 

그러고 보니 이 방엔 불도 들어왔었는데...(전구만 있고 콘센트는 없어서 전자제품을 사용할 순 없다) 어제 아파서 일찍 자는 바람에 전기 사용을 못 한게 못내 아쉽다. 산 속에 있다보니 평소보다 뜨거운 물이며 전기며 하는 '일상'이었던 것들에 오히려 더 목매고 있는 듯 싶다. 하긴 예서 불 들어온다고 해서 딱히 할 만한 것도 없지만... 아마 이 트레킹이 끝날 즈음이면 전기 없이 지내는 것에 꽤나 익숙해져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아침 메뉴 : 플레인 오믈렛+야채 오믈렛+티벳빵+밀크티. 티벳에선 저런 빵 못 봤는데 말이지. 오늘로 오믈렛이 우리의 아침 식사로 가장 적당한 메뉴라는데 동의>

 

어제 주인 아저씨와의 물싸움으로 인해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나와 아저씨 사이를 왔다리갔다리 하며 전령사 노릇을 해주던 숙소 꼬마에게 감사의 뜻으로 초컬릿을 하나 선물하고 출발한다. 오전 7시 40분, 또 하루의 시작이 내 발로부터 한 걸음씩 열린다. 벌써 4일차, 오늘의 목표는 차메(Chame). 오르막 길에서 만나는 여러 마을 중 가장 규모가 크다는 두 마을 중 하나다(다른 하나는 마낭 Manang).   

 

<벌써부터 티베탄이 사는 마을스럽다>

 

마을을 벗어나면서 바나나 몇 개를 줄에 걸어놓고 파는 노점이 있어 얼른 쟁여둔다. 가격을 더 받고 싶어하는 아줌마와 정가(?)를 부르던 아저씨의 말이 동시에 공중에서 충돌하는 덕에 보다 저렴한 아저씨의 가격으로 개당 10루피씩 내고 5개를 받아든다. 부부끼리 쿵짝이 안 맞는 바람에 아줌마의 아쉬움 섞인 눈길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는 아저씨. 

  

 

 

어제 오후부터 날이 흐려오더니 오늘은 비라도 내리려는지 하늘이 한껏 찌뿌둥한터라 둘러봐도 설산은 잘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꾸준히 오르막임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순간 평탄하다가도 급경사가 나타나고 다시 완만하다가 내리막이 이어지는 다양성을 띤 길인데다가 마르샹디 계곡도 심심하면 왔다리갔다리 건너다니기 때문에 길 자체가 따분할 이유는 전혀 없는 곳이다. 초반의 완만한 길 덕택에 다라파니를 떠난지 45분 만에 바가르찹(Bagarchhap)에 도착했고 다시 30분을 더 걸어 체크 포인트가 있는 다나큐(Danakyu)에 가비얍게 이른다.

    

 

 

다나큐를 벗어나면서부터 길은 갑자기 경사가 심해진다. 천천히 걸으려해도 조금은 숨이 차오는. 때마침 가는 비마저 흩뿌리기 시작한다. 아니, 비라고 하기엔 짙은 안개 속을 지나가는 느낌이라는 편이 오히려 더 어울리겠다. 아직은 맺히는 망울을 보기 어려운 빗줄기다.

 

 

 

스틱이 딱딱한 돌 위에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김원장과 내 숨소리만이 조용한 산 속에 울려퍼지고 있다. 경사가 심해서인지 풀만도 더이상 속도를 내지 못하고 우리와 보조를 맞춰 걷는다. 얼마나 올랐을까, 숨을 고르며 지나온 마을 길을 되돌아보니 조금 뿌듯해진다. 내가 이만큼이나 고도를 높였다, 이거지~ ㅋㅋ (방금 지나친 다나큐만 해도 해발 고도가 2,300m에 이른다. 외국 여행에서야 가끔씩 밟아보는 높이지만, 한국에서는 한라산보다도 높은 곳이 아닌가) 스스로 기특한 마음이 들다가 갑자기 깨갱 주저앉는다. 이번 여정에서 내가 넘어야 할 최고점의 높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5,416m. 나 지금 겨우 그 반도 안 올라온거니, 정말 그런거니...(거기에 더해 시작 높이가 840m였던 것을 고려하면 더욱 우울해진다) 

 

 

 

이 구간에선 나만 힘든 게 아녔는지 나름의 깔딱 고개가 끝나는 지점에 이렇게 작고도 엉성한 간이 매점이 있다. 외산 초컬릿, 삶은 달걀, 밀크티를 비롯한 음료수 등이 그들의 판매품 목록 전부. 뜻밖에 이 매점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린 아이들이다. 마침 아이들의 아침겸 점심 식사 시간인지 아이들은 물건을 파는 일보다 어우러져 먹기에 여념이 없다. 슬쩍 들여다보니 그야말로 단촐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는 식단이다. 하지만 이 동네 아이들이 늘 그렇듯 아무도 반찬 투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표정들로만 보자면 이 것도 없어서 못 먹는다는 얼굴들이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먹으면서도 서로 장난치느라 낄낄낄, 키득키득,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듯 하다. 이들 얼굴만 보면 정말 그렇다. "안 먹어"라는 말을 가장 먼저 배운 내 두 살짜리 조카보다는 멀건 죽 한 사발에 지극히 만족스런 표정으로 코박고 먹는 여기 아이들이 더욱 행복해 보인다(참고로 내 조카가 구사하는 또 하나의 말은 "안아줘"라고 한다).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 누가 이들의 행색만 보고 불행하다 말할 수 있으랴.

 

이 구간 이후 티망(Timang) 근처까지는 "아니, 숲 속에 이런 길이!" 감탄할 정도로 우리네 임도와 같은 길이 쫘악 펼쳐진다. 아마도 저 산 아래 길과 이 임도를 잇는 공사는 어렵겠지만, 이 구간만큼은 당장 차가 다닌데도 무리 없을 것 같다. 물론 언젠가 예정대로 저~멀리 마낭까지 찻길이 완성된다면, 지금의 이 피톤치드 넘쳐나는 숲은 그 모습을 잃고야 말겠지만 말이다. 아아, 이런 길은 정말이지 마차로 달려주면 안 될까. 이 아름다움에 엔진 소리며 배기 가스는 너무 잔혹한 일이다.

 

 

다라파니에서 다나큐까지는 내가 가진 지도에 표시된 대로 얼추 비슷한 소요시간을 거쳐 이르렀기에 자만하고 있었는데, 오르막 경사가 제법 되는 다나큐에서 티망까지는 예측이 완전 빗나갔다. 지도에는 30분이면 된다고 했는데 뱁새인 우리에게는 자그마치 1시간 30분이나 걸렸으니... 아마도 이 정도 오르막길은 휙휙 날아다니는 황새 산꾼 기준의 소요시간이었나보다. 오호, 갑자기 이 단벌 지도에 대한 신뢰도가 파박 떨어지네. 과연 오늘 계획대로 차메까지 갈 수 있으려나. 게다가 티망이 가까와질수록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기까지 한다. 일단 모자를 덮어쓰고 발걸음을 재촉해 보는 수 밖에.

 

 

흠... 아무래도 안 되겠다. 여기 티망에서 잠시 레몬티라도 마시며 비는 피하고 가자. 어라, 그런데 풀만이 식당에 들어온 김에 여기에서 밥을 먹었음~하는 눈치다. 앞으로 갈 여정에 마땅한 식당이 없는건지, 아니면 아침을 제대로 못 먹고 출발했는지 그 깊은 이유야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단 하나, 우리 풀만이 지금 배고프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그 이야기는 우리가 이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어주지 않으면, 풀만은 꽤나 비싼 밥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40분, 다라파니를 출발한지 3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번 여정의 출발 전, 우리 고집 없이, 우리 의견 버리고, 포터 꼴리는대로 일정을 꾸리기로 하질 않았나. 그래, 그럼 우리도 간단하게나마 뭘 먹어보자. 따끈하고 달달한 레몬티를 마시다 말고 메뉴판을 받아든다. 음... 그런데 마땅히 먹을게 없다. 죄송하지만 그냥 맨밥이랑 물만 주세요~ 주문을 받는 아줌마도 못마땅한 눈치지만, 어쩌랴, 배도 안 고픈데 이것저것 시키기엔 돈이 아까운 것을. 우리는 맨밥 한 그릇에 장조림을 반찬 삼아 둘이 노나 먹는다. 김원장은 (아까운 -_-) 장조림을 남기더니 아까서부터 옆에서 침 흘리며 떠날 줄 모르는 이 집 개에게 인심 후하게 쓰기도 한다.

 

풀만의 뜻대로 밥까지 먹으며 티망의 작은 식당에서 한 시간을 보냈는데도 빗방울은 더 이상 가늘어지지 않는다. 흠, 이 정도면 제법 내리는데? 우리는 1000원샵에서 집어온 일회용 우비를 꺼내 입고 가기로 결심한다. 예전에 입어보니 누가 일회용 아니랄까봐 한 번 입고나면 쫙쫙 잘도 찢어지길래 꼭 필요한, 결정적인 순간에 쓰려고 꼭꼭 박아둔 우비다. 오늘이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이기를 바라며 각자 노랗고 파란 우비를 챙겨 입는다. 자, 전투력도 보강 됐겠다, 다시 출발해 보자구! 

 

생각보다 얇은 비닐 우비 한 장 걸쳐 입고 적당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물에 빠졌다 기어나와 온 몸을 흔들어대는 강아지처럼 가끔씩 우비 위로 고인 물들을 털어내며 한 발짝씩 산길을 걷는 일이 나름 즐.겁.다.(다른 트레커들의 우비에 비해 우리 우비가 너무 없어 보이긴 하지만). 물론 여기서 비가 더 내린다면 그 때는 이러쿵저러쿵 생각할 여지없이 스톱, 그 자리에서 오늘의 일정을 마쳐야겠지만, 지금은 뭐랄까, 일견 상쾌하고 재미있기까지 하다. 다만 안 그래도 내리막길이 쥐약인 내게 미끄럼이 더욱 심해진다는 치명적인 단점은 존재하지만. 이 쯤에서 나를 지나치는 포터들을, 그리고 그만큼이나 무거운 짐들을 짊어진 현지인들을 살펴보니 오히려 맨발로 쓰윽쓰윽 적당히 미끄러져 가면서 그 구간을 돌파한다. 차라리 맨발이면 덜 미끄러질까? 하지만 저 길 바닥,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을 뾰족할 그 무엇이 두려워 차마 그들을 따라하진 못 한다. 원숭이 꽃신을 신은 나, 문득 생각나는 바 있어 김원장에게 묻는다.

 

"우리 풀만이 배낭을 멘 채 이런데서 미끄러져 뒹굴기라도 하면 어쩌지?"

"너나 걱정하셔"  

  

 

티망을 떠나 우중산행을 한지 1시간 정도 지나 탄촉(Thanchok)이란 작은 마을을 만난다. 내 지도에는 거의 비중 없이 표기된 마을이라 별 기대 없었는데, 들어앉은 자리하며 짙은 운무 속에서 모락모락 풍겨나는 분위기가 정말 멋지구리하다. 그리고 그 멋진 분위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동네 롯지마다 내리는 비를 피하며 나름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 트레커들도 제법 보인다. 꼭 오늘 같은 날이 아니더라도, 하늘이 총총 맑은 날 찾아와봐도 옹기종기 들어앉은 집들이며 꼬불거리는 마을 길이 기억에 오래 남을 이미지를 만들어 낼 듯 싶다. 흠, 기억해 둘 마을이 또 하나 더 생겼군.  

  

 

 

반갑게도 탄촉을 지나면서부터는 어느새 빗줄기가 약해져 있다. 길도 더불어 부드러워지고. 우리는 약 한 시간을 더 걸어 또 하나의 체크 포인트가 위치한 코토(Koto)에서 젖은 우비도 말릴 겸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한다(나는 왜 사람 많은데서 같이 쉬는게 싫을까. 사람이 많다는 건 다 그 만큼의 이유가 있을텐데). 걸을 땐 몰랐는데 막상 식당 의자에 앉으니 다시 감기 기운이 도지는 듯 싶다. 다리 근육의 긴장이 풀려서 그러는걸까? 때문에 이미 오전에 한 잔 마셨지만 나는 또 한 번 레몬티를 주문하기로 한다. 당연 이런 산중에서 싱싱한 레몬을 직접 짜 만들어 주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감기에는 밀크티보다 그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이 집 아이들인지 코흘리개 둘이서 텅 빈 식당의 테이블이며 의자 밑을 기어다니며 서로 장난을 치고 있다. 그 모습이 참으로 평안하다(한편으로는 쟤네 둘다 축농증이 아닐까 직업병이 도지기도 한다 -_-;).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무심히 김원장에게 묻는다.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어? 김원장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산길을 걷고 있는데 문득 지난 삶에 있어 최악의 인연을 맺은 인간들이 하나 둘씩 차례로 떠오르더란다.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그들과의 악연들이 연이어 끊이질 않고 계속 떠올라 최소 한 시간은 그야말로 끔찍한 마구니에게 시달렸다고. 이런 그림같은 풍경 속에서 김원장에겐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까? 어쩜 정화의 한 과정일라나? ㅋ    

 

30분간 따끈한 티타임을 가지고 마지막 피치를 올려본다. 등산화에서 풀어놓았던 두 발이 고새 부었는지 다시 축축한 신발 속에 들어가기 싫단다. 꾸역꾸역 밀어넣고 재차 신발끈을 조여 맨다. 막판 늑장을 좀 부렸지만 이제 오늘의 목적지인 차메가 여기서 멀지 않다. 박영석 대장님이었나,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산에서는 한 걸음의 힘이 무섭다고, 까마득히 멀리 보여 언제 저기까지 가나 싶다가도 한 걸음 한 걸음씩 걷다보면 어느새 그 자리에 와 있다고, 뭐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하신 것 같은데, 정말이지 어느새 오늘의 그 "모든" 길을 지나 차메를 지척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달궈진 두 발에 다시 시원한 기운을 불어 넣는다. 아, 어느새 잊고 있던 설산마저 다시 눈 앞에 나타나 우리를 응원한다. 

 

<이 근방은 람중 히말(Lamjung Himal)권이다. 람중 히말은 거의 7,000m에 육박한다>

 

그리고 15분, 저 앞에 차메를 알리는 입구가 나타나 또 한 번 나를 즐겁게 한다. 어제에 비하면 거의 한 시간 반이나 적게 걸은 셈이지만, 그래도 비오는 와중의 산행이었으니 나름 기특하다 칭찬해주고 싶더라(실제로 김원장에게 잘 따라걷고 있다는 칭찬을 매일 받고 있다 ^^).  

 

 

 

오후 2시 25분, 차메를 마악 들어서는데 바로 마을 입구 오른편에 위치한 한 2층짜리 롯지에서 어제의 그 포터들 - 한국말을 몇 마디 구사하는 - 이 또 우리 일행을 불러세운다.

 

"여기 좋아요~"

 

잠시 망설이던 풀만이 그 숙소로 들어간다. 우리도 그를 따라 졸졸졸.  

 

명칭 : 황당하게도 이 숙소에 대해서는 이름도 기억하지 못 하거니와 사진 한 장 없다 -_-;  

트윈룸 숙박비 : 150루피 (사실은 트리플룸인데 트윈룸이 full이라며 이 방을 트윈룸 가격에 쓰라고 했다. 방은 지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나름 깨끗하다) 

공용 화장실 및 샤워실 : 마당의 공용 샤워실에서 샤워 가능

특이사항 : 친절한 이 집 어린 아들(?) 하나가 홍금보를 닮았다(이게 특이사항이냐? -_-)

 

마음 같아선 오후에 차메를 구경하러 나설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널찍해서 그런지 다소 썰렁한 방에 들어와 이런저런 짐을 부리고 나니 몸에서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이런, 아무래도 오늘 빗속에 무리했나? 김원장이 오늘이 또 마지막이 될 지 모른다며 머리를 감는다고 아랫층으로 내려간 사이, 나는 옷을 모두 껴입고 침낭을 꺼내 기어들어간다. 아이고, 목이 점점 더 아파오는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 어제의 감기가 살짝 수그러들었다가 지금 다시 부글부글 올라오는 모양이다. 

 

미지근한 물로 머리를 대충 감는데 성공했다는 김원장이 돌아올 때까지 계속 누워있다가 아프다는 핑계로 김원장을 시켜 늦은 점심을 (식당이 아닌) 방에서 먹기로 한다. 김원장이 권하는대로 아침에 사온 바나나며 꿍쳐두었던 사과부터 챙겨 먹는 동안 김원장은 뜨거운 물 한 병을 주문하고 돌아온다. 그 덕에 뜨끈한 김치 사발면도 먹고 북어국까지 만들어 국물삼아 후르륵 마시니 햐아, 정말 온몸이 따끈해져오는 것 같다. 역시 이럴 땐 한식이 최고라니까. 그리고는 김원장이 얻어다준 담요를 뒤집어 쓰고 그대로 잠에 빠져든다.

 

얼마나 잤을까, 자고 일어나보니 몸이 한결 개운하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서산에 걸려있다. 날은 벌써부터 꽤나 서늘한 것이, 하늘은 맑게 개었어도 오늘 밤,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오늘 밤 다시금 춥게 자면 정말이지 내일은 못 걸을지도 몰라. 내 우려를 들은 김원장이 그럼 그 덕에 하루 푹 쉬었다 가면 되지, 뭐 걱정이냔다. 하긴 맞아, 그러면 되지, 뭐. 하지만 그렇게 되면 김원장한테 좀 미안할텐데... 

 

이런저런 시나리오 속에 저녁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간다. 그러고보니 인식하지 못한 사이 전기가 또 언제 나갔는지 식당은 촛불 몇 개뿐 어두컴컴하다. 그래도 입구에 난로 불을 피워둔 덕에 방에 비하면 따뜻해서 좋다. 이미 난로에 가까운 자리는 한국말을 하는 포터들을 고용한, 유럽인으로 보이는 예닐곱명의 팀이 맡아둔지라 우리는 맨 끝 구석 자리로 간다. 잘 먹고 빨리 나을 수 있도록 야채 샐러드, 야채 튀긴 만두(fried momo : 모모는 티베탄 만두)에 참치 볶음밥까지 주문하고 미역국도 한 컵 만들어 둔다. 하지만 야채 샐러드는 무슨 기름으로 버무렸는지 너무 느끼하고 이상한 냄새가 나서 먹기 어렵고, 만두와 볶음밥은 너무 짠 편이다. 그래도 꾸역꾸역 먹어둔다(결국 밤에 한 병 가득 만들어 둔 녹차를 모두 들이킨다).

 

부른 배를 하고 식당 난로 곁에 앉아 몸을 충분히 덥힌 뒤 껌껌한 방으로 돌아온다. 아무래도 오늘 밤엔 불 들어오기 그른 것 같다. 헤드랜턴을 하고 이를 닦고 방 정리를 하고 마지막 화장실에 다녀온 뒤 창 밖 하늘을 바라본다. 아, 비구름들이 사라져가고 있는지 한 구석에 별들이 빼꼼이 등장했다. 가운데 빈 침대를 두고 둘이 양 끝 침대 위에 각기 누워 허공을 중개삼아 말을 섞는다. 

 

"몸이 좀 안 좋긴 하지만... 여하튼 너무 멋진 경험인 것 같아. 우리만 알긴 아깝다, 그치?"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이개협(비인후과 원의 의회의 약자. 김원장이 소속감을 지닌 유일한 온라인 모임) 회원들한테 소개해서 함께 단체 여행을 오면 어떨까?"

"오, 그 생각 좋은데? 이개협에 소개하자. 아, 아쿠아(www.aq.co.kr)는 어떨까? 거기에도 이 곳을 자세히 소개하면 오려는 사람들이 많지 생겨나지 않을까?"

 

우리는 신나서 계획을 마구 짜본다. 온라인을 통해 이 곳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모임을 꾸려 코드가 맞는 이들과 함께 어우러져 앞서거니 뒷서거니 이 길을 걷는 상상은, 그야말로 상상만으로도 절로 흥이 나더라. 그러나 우리의 열기는 그다지 오래 가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한 바퀴 도는데 적어도 20일은 할애를 해야한다는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휴가로 1년에 20일을 맘놓고 사용할 수 있는 직장인은 거의 없다. 하물며 한 여름 휴가철도 아니고 선선한 가을철에. 

 

결국 "그들 중 여기, 쉽게 올 사람 아무도 없다!"로, 허무한 결론을 내리고 나니 마음 한 구석이 다 휑~하다. 정녕 이 곳은, 우리 같은(?) 인간들만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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