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아직은 경쟁력이 남아있는 늙은 부부였던지라 ^^; 하룻밤새 어제의 불평불만은 크게 줄어들어 "반 크라팅"이나 "더 쿼터"에 대한 아쉬움이 한결 사라졌다. 기왕 적응되가는 것, 그럼 수준을 더 낮춰볼까? 오늘은 빌라 드 빠이로 옮기자! 

 

빌라 드 빠이 Villa de Pai (그저께의 리뷰)

홈페이지 : http://www.villadepai.com/ 

가격 : 각 방갈로 수준/크기에 따라 200/300/400/500밧. 즉 200밧은 컴퓨터가 없고, 300밧은 컴퓨터가 있어 인터넷이 되고, 400밧은 3명까지 자고, 500밧짜리는 4명도 잘 수 있다고 한다. 딱히 쓸모는 없을 것 같지만 방갈로 내부에 미니 2층이 있고 그 위에 올라가보면 매트리스 한 장이 깔려있다. 모기장이 설치된 침대.

특이사항 : 속도는 모르겠지만 방갈로 안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는 - 300밧의 저렴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 다른 숙소에는 없는 차별화된 장점 보유(이래서 이 숙소가 장기체류에 좋다고 했나?). 강변쪽 라인 방들은 프라이버시가 괜찮아 보임(우리가 숙소 구경을 갔을 때는 이미 어두워진 후라 방에서 바라보는 바깥 전망이 확인 안 됨). 반대로 단점이라면 강변 라인쪽을 제외한 나머지 방갈로들은 뷰도 없고 프라이버시도 뽕이라는 것.

 

우리가 (그제 방문으로) 진작 내린 평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어째 빌라 드 빠이는 인기가 꽤 높은 편이어서 오늘도 겨우 300밧 짜리 방갈로 한 개만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한다. 어차피 우리가 원하는 방갈로도 인터넷이 가능하다는 300밧 짜리였으니까 군소리 없이 그 방으로 짐을 옮긴다. 만약 여기서 하루 종일 인터넷을 한다면 방값 뽑고도 남겠는데? -_-;

 

우리가 짐을 부리는 동안 잠깐 부시시 잠을 깬 그 때 그 청년(우리에게 이 숙소를 강추했던)과 우연히 마주친다. 우리 방갈로 컴퓨터에도 이미 한글을 깔아 놓았으니 편히 쓰실 수 있을거라는 인사를 필두로 하여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그의 빠이 장기 체류 생활은 대략 다음과 같이 이루어지더라.

 

1. 오후 4~5시쯤 기상

2. 어슬렁어슬렁 저녁 식사

3. 비슷한 한국 여행자끼리 모여 부어라 마셔라 술 퍼먹기

4. 늦은 밤 방갈로로 돌아와 밤새 인터넷 하기

5. 새벽녘 잠들기

 

오호라, 이게 그의 "빠이에서의 하루"였구나. 여행자로서 이보다 더 게으를(?) 수는 없다! -_-; 오늘은 얼마간 함께 광란의(?) 밤을 보냈던 한국 여행자 하나가 빠이를 떠나는 날이라 배웅차 잠시 일찍 -_-; 일어났다고 한다. 이따 저녁때 시간이 맞으면 같이 저녁 식사나 하러 가자는데... 슬쩍 김원장 눈치를 보니 써억~ 안 내키는 눈치. 30대 초반의 한국 청년이 태국의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장기체류를 하고 있다고 말로만 들으면 '오오, 멋진걸' 했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그의 벗겨진 실상을 접하고 나니 꽤나 실망이다. 그는 본인을 절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왜 나는 그가 루저로 보이는걸까. 세상살이에 정답이 어디있다고, 나는 왜 그를, 떠나온 그 세상의 잣대로 다시 재려고만 드는걸까. 쩝.

 

 

 

빌라 드 빠이의 300밧 방갈로는 땅바닥에서 약 1m 이상 높이 지어져 있어 바닥으로부터 기어들어오는 악화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대비를 한 듯 하다. 하지만 안쪽으로 만들어진 욕실은 천장이 거의 오픈되어 있고 벽과 바닥마저 듬성듬성 이어진터라 썩 쾌적하지는 않다. 게다가 청소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김원장은 혈흔이라고 우기고 나는 그렇지 않다고 애써 부인하는 얼룩이 세면대 곳곳에 묻어 있고, 앞선 투숙객이 생산해 냈을 화장실 쓰레기통의 가득찬 쓰레기도 비워져 있지 않고, 침대와 침구 모두 낡고 지저분하고, 2층에 마련된 공간은 먼지 투성이고... 뭐 그랬다. 그래도 생각보다 인터넷 속도는 쓸 만했고, 사방 팔방 모든 문을 다 열어놓으니 모기는 좀 들어와도 맞바람이 통해 예상보다 많이 덥진 않은 편이었다. 아니, 결론적으로 말해 300밧의 가격에 이 정도라면 아주 훌륭했다. 그러니까 경비가 충분치 않은 여행자라면 빌라 드 빠이는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그 청년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 부담스럽다는 -_-; 이유가 더해져 우리끼리 이른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오늘의 메뉴는 피자와 스파게티. 찾아간 곳은 빠이에서 피자를 제일 맛나게 굽는다는 Da Christina. 무엇을 물어도 멋쩍게 웃기만 하고 대답은 회피하는 직원들을 제외하면 분위기도 좋고 맛도 기대 이상 훌륭하고 가격도 그만큼은 하는 곳.     

 

 

 

테이블 아래로 모기향을 피워주긴 했지만 그동안 열심히 몸 사려온게 허탈할 정도로 이 곳에서 한 끼 식사를 하는 동안 모기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당했다. 으으~ 간지러워라. 모기만 아니었으면 보다 천천히 음식을 즐길 수 있었을텐데 달려드는 모기때문에 서둘러 먹고 자리를 떠야했다. 

 

빌라 드 빠이로 돌아와 의미 없는 인터넷 써핑을 하다 문득,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반 나절전 이 곳에서 그냥 하루하루를 때우고 있는 30대 청년을 보면서,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나가는 한국의 생활을 따라가지 못해 도피해 왔다 여기지 않았었나. 그리고 그런 그를 오지 여행가나 모험가나 아니, 이도저도 아니라면 자아를 찾기 위해 떠나왔다거나 뭐 그렇게 여기지 않고, 능력도 없고 가진 것도 없을 것이라며 은근 무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의 내 모습 역시 그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순간 섬뜩함을 느끼는 것이다. 나도 여기 빠이에 머물면서 볼거리나 할거리 혹은 의미마저 찾지 못하고 그저 시간을 죽이고 있지 않은가.

 

아아,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제아제바라아제, 집으로! 

 

 

@ 오늘의 영화 : <박수칠 때 떠나라> 아 쓰벌, 잘 나가다가 뒤로 가면서 무서워 혼났네(난 공포영화를 밤에 보면 꼭 꿈에 나오는게 문제다). 하필이면 비바람 들이치는 한밤중의 방갈로에서 봐설라무네. 대체 제목과 내용과의 연관성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그리고 김지수와 신하균의 정확한 관계는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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