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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일이면 드디어 루마니아의, 아니 동유럽의, 아니 전 유럽을 통틀어 가장 인.심.이. 살.아.있.다.는 소문이 난 시골 마을로 기어들어 갈 것이다. 과연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라고 거창하게 마무리를 짓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이예우드로 간다. 어제 저녁에 구입한, 정육점에서 직접 통고기를 얇게 저며 썰어온 베이컨을 구워 아침 반찬으로 먹고 오전 11시, 시게투 마르마찌에에서 떠나는 이예우드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버스 정류장 앞에는 아마도 시게투 마르마찌에에서 제일 규모가 클 대형마트가 있었는데 승객들 분위기로 미루어보아 며칠에 한 번씩 여기 시내에 들러 장을 봐 돌아가는 시골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맨 뒤에 자리를 잡은 후 혹시나 해서 옆 좌석에 앉으신 할아버지께 이예우드까지 차비가 얼마냐고 여쭈어 보고(여기서 필요한 바디 랭귀지 : 이예우드 지명을 반복하며 돈을 들어 눈 앞에서 흔드는 동작) 미리 차비를 준비해 뒀는데 차장이 와서는 1인당 1RON씩이었나, 하여간 조금씩 더 요구하는 바람에 그 할아버지가 우리 대신 차장과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뭐 그런다고 해서 우리 차비가 할아버지가 말씀해주신 가격으로 깎인 건 아니었으니 할아버지가 헛갈리셨다거나 혹은 노인 요금이 따로 존재했을런지도 모르는 일이다(이후 할아버지가 계속 우리에게 뭔가를 설명해 주셨지만 끝내 이해 불가였다 -_-;). 

 

차는 좁은 시골길을 달리며 나타나는 작은 마을들마다 승객들을 조금씩 부려놓는다. 풍경은 완전 다르지만 예전 중국 여행할 때 생각이 물씬 나는 길이다. 그 때, 용승에서 삼강 가는 길, 우리가 탔던 로칼버스는 삼강까지 내내 멋진 강을 끼고 달리며 가다서다를 반복하면서 하교길 아이들을 각자의 집 앞에 내려주곤 했었는데... 워낙 차편이 드문 모양인지 막다른 마을 Poienile Izei와 Botiza 쪽으로 들어갔다가 도로 돌아나오는 식으로 이예우드까지 운행을 한다(이예우드 역시 종점은 아니었던 듯 마찬가지로 일단 이예우드까지 들어왔다가 다시 차를 돌려 나갔다). 덕분에 이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오래된 목조 교회들을 신나게 구경하면서 이예우드까지 올 수 있었다. 이예우드 마을이 둥글게 생겼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포장된 메인 도로를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어 중심지를 쉽게 알아낼 수 없었던지라 어디서 세워달라고 해야할지 좀 망설여야 했다. 결국 차가 돌아나갈 때까지 지켜보다가 적당해 보이는 아무 곳에나 내렸다.   

 

 

민박집을 예약하고 오지 않았기에 무작정 이 길 저 길을 따라 걸어 보았다. 민박집이 몇 없으면 어쩌나 살짝 걱정했지만 생각보다는 제법 민박을 알리는 안내판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 걷다가 가이드북에서 소개하는 민박집도 발견했는데, 안내된 가격에 비해 겉모습이 그닥 끌리지 않았다. 그러다 눈에 띄는 아무 민박집에 들어가 방 구경을 해보기도 했는데, 아주머니는 무척이나 친절했지만 김원장에겐 방이 너무 어두웠다. 거절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돌아 나오다가 분위기가 괜찮아 보이는 집을 또 하나 발견하고 방 구경. Okay, 오늘은 여기서 잔다.   

 

 

펜션 이름은 오로라(Aurora). 걸어놓은 표지판 상으로는 그럴싸한 뭔 인증까지 받은 것으로 보이는, 별 두개짜리 펜션이다. 은퇴한 노부부가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1층은 당신들이 사용하고 2층 방 3개를 손님들에게 내어주고 있었다(손님용 화장실 공용). 아직은 비수기였기에 방 3개 모두 비어 있었고, 다 둘러본 후 김원장이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방으로 결정했다(위성 TV 포함). 이 동네 민박집들은 특성상 half board나 full board로 운영하는데 우리는 오늘 저녁 식사와 내일 아침까지를 포함한 하프 보드로 1박 140레이/2인을 지불했다(처음엔 방 시설에 비해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비수기이기도 했거니와 중간 소개소 없이 직접 찾아온 덕에 나름 저렴한 가격을 받은 것 같더라). 두 분 모두 영어를 잘 못 하셨지만, 그래도 우리가 원하는 저녁 식사 시간이 몇 시인지를 물어보시는데는 아무 문제 없었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2층의 안락한 방에서 잠시 뒹굴다가 배가 슬슬 출출해져 오는 것 같아 아까 숙소를 찾아다닐 때 보았던, 얼핏 보기에는 이예우드 유일의 수퍼마켓으로 보이는 곳을 찾아갔는데 어라, 종류도 그렇고 선반에 물건들이 몇 없더라. 엄마가 저녁 식사 준비하다 말고, 어머, 갑자기 소금이 떨어졌네, 요 앞에 가서 얼른 소금 좀 사와라~ 할 때나 유용하게 이용할 만한 곳이랄까. 어울려 놀던 동네 아이들은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마찬가지로 몇 종류 안 되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빨고 있다. 

 

도로 방으로 후퇴한 다음 김원장이 축구를 보겠다고 TV를 틀었는데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주인 아저씨를 불렀다. 여기저기 만져보고 사방팔방에 전화를 넣어본 뒤 아저씨가 마침내 내린 결론은 수상기나 컨버터의 문제가 아닌 송신업체의 문제라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서로 통하는 영단어가 몇 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의사 전달이 잘 되었다는게 신기할 정도다.

 

여하튼 이예우드 마을에서 (겨우) 하룻밤 민박을 하면서 얻은 결론이라면,

누가 뭐래도 식사 대접만큼은 정말 짱이라는 거다(이 식사를 떠올리자면 오히려 숙박비가 저렴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우리의 조금 이른 시간의 저녁 식사 모습. 장소는 민박집 안 마당의 이름 모를 나무 그늘 아래. 

 

 

보시다시피 아직 음식들이 등장하기 전 세팅인데 탄산수와 함께 등장한 저 검은 액체가 바로 루마니아의 유명 증류주, '쭈이꺼'다. 

 

 

살짝 라벨을 들여다 보자. Tuica(쭈이꺼) 뭐시기라고 쓰여있고 그 아래 Prune이라는 단어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자두 따위로 만든 술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닥에 얌전히 쓰여진 50도. 오냐, 그렇구나.

 

여기서 잠깐! 정확한 출처를 알 순 없지만 쭈이꺼에 대한 간단한 소개글을 참고 삼아 덧붙여 보자면(워낙 정리해 둔 쭈이꺼에 대한 긴 글은 이미 밝혔다시피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 그의 고향은 바로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지방이란다. 루마니아는 주신(酒神)의 고향답게 ‘쭈이꺼’라는 유명한 과일주가 있다. 이 술은 마시고 난 다음 날 머리가 전혀 아프지 않아 ‘배신을 하지 않는 술’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고급술로 통한다.

 

란다. 다음 날 머리가 아프던 말던 이렇게 세팅 초장부터 짜잔 깔아주는 것으로 보아 루마니아인들이 매우 애착을 가지고 마셔대는 술이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어 처음 등장한 수프.

 

 

 

김원장 말로는 수프 안의 저 덩어리들이 감자를 갈아 밀가루랑 혼합해서 만든 그 무엇일 것이라고 하는데, 하여간 익숙하지 않은 모양과는 달리 맛은 제법이었다. 입안에 덩어리를 쏘옥 넣어보면 살살 녹는다(여기서 살살 녹는다는 매우 맛있다는 의미보다는 사르르 부서짐을 표현하는 말이다). 신나게 퍼먹었다.

 

 

연이어 가져다 주신 샐러드. 샐러드는 뭐랄까, 불가리아에서보다 훨씬 열악한 느낌이다. 하긴 불가리아에서는 일반 가정에서 만들어주는 저녁을 먹어본 적이 없으니까. 보는 바와 같이 양배추랑 토마토가 식초 같은 소스(그리고 아마도 올리브유 따위가 더해진)에 절여져 나오는데 독일의 사우어크라우트 가져다 놓고 동시에 먹어보며 한 번 비교해 보고 싶었다. 샐러드지만 익숙치 않은 기름기 때문에 조금 느끼했던 기억. 여하튼 이미 나에겐 쭈이꺼가 있다. 뭐가 나오든 상관 없다. 에헤라~ 부어라, 마셔라 ㅋㅋ

 

 

짜잔, 오늘의 메인. 저 숟가락 같은 물건이 매우 큰거지, 결코 고기가 작은 게 아니다. 깜짝 놀랄만큼 풍성하게 나와서 나중에 배터질 때까지 먹었다. 아, 정말이지, 이 때 정말 행복했는데...(역시 나는 뭣보다도 먹어야 좋아라~ 한다) 

 

 

 

마지막으로 놓아주신 후식이다(그 많은 고기를 다 먹느라 빵은 몰래 방으로 싸와야 했다). 여기가 루마니아라는 것도 좋았고, 이름 모를 시골 마을이라는 것도 좋았고, 눈부신 햇살 살그머니 수그러드는 야외 식당도 좋았고, 우리 둘만을 위해 주인 아주머님이 시간 맞춰 요리해서 정성스레 가져다 주시는 것도 좋았고, 음식도 맛있고 에헤라디야 술도 있고, 말이 잘 안 통해도 맛은 괜찮냐, 더 먹어라 인심 쓰시는 것도 좋았고... 

 

터져오는 배를 두들기며(더불어 알딸딸 올라오는 술도 깰 겸 ^^;) 이제야 제대로 된 이예우드 산책을 나서본다. 이 마을 역시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집들과 목조 교회가 유명하다(면 유명하다). 

 

http://www.romanianmonasteries.org/maramures/ieud-deal 

 

 

 

 

 

 

 

 

날씨만 좀 더 선선했어도 하루 더 머물며 마을 뒷산에 올라갔을텐데...(낮에 그러기엔 넘 덥다) 그렇다. 우리는 이예우드 마을 산책을 하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냥 내일 이 마을을 떠나야겠구나, 자연스레 마음 먹고 있었다.

 

 

 

  

 

 

  

 

평소 하듯 느긋하게 온 마을 구석구석 싸돌아 다녔는데, 중동 같으면 여기저기서 놀다 가라거나, 먹고 가라거나, 이야기 좀 나누자거나, 아니면 악수라도 청하거나, 몇 번이고 그러고도 남았을텐데, 여기 사람들은 꼬마 아이들마저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기는 해도, 그 이상의 접근은 하지 않는다. 전 유럽을 통틀어 가장 인심이 살아있다더니, 이 문장에서의 핵심 단어는 '인심'이 아니라 '유럽'이었던 겐가? 그리고 그 유럽식 인심이란 오직 식탁 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란 말인가? -_-; 이미 지난 3개월, 중동식 인심에 푹 젖어있다가 와서 그런지, 아니면 우리가 여기 너무 짧게 머물러서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너무 늦게 찾아와서인지(앞서 밝힌 바 있지만 내가 이 동네 인심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벌써 10여년 전 일이다)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우리의 이예우드 방문에 대해 점수를 매겨보자면 기대 이하라 하겠다. 기대가 워낙 컸기 때문에 당연히 그만큼 실망할 확률도 높았겠지만, 쩝.

 

긴 산책을 마친 뒤 내일 이예우드를 떠나기로 확정짓고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께 내일 아침 이예우드에서 시게투 마르마찌에로 나가는 버스 시각을 물으니 오전에는 6시 45분 차 한 대뿐이란다. 헉, 6시 45분? 잠시 고민하던 우리는 아침 식사를 포기하더라도 그 차편을 이용하기로 한다. 내일의 최종 목적지가 시게투 마르마찌에라면 모를까, 상황 봐서 다른 도시로 몸을 옮길 계획을 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아무래도 그 편이 유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 우리가 그 차를 탈 예정이라는 것을 재차 확인해 보시더니 그럼 아침을 몇 시에 준비해줄까? 물으신다. 헉, 그럼 우리를 위해 그렇게 일찍도 차려주실 수 있으시다는 말씀? 이렇게 감사할데가! (다시금 먹을 거에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

 

사실 유럽에서는 그 어느 대륙보다도 민박집을 이용할 기회가 많다. 그리고 그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게 될 경우도 가끔 있고. 하지만 여기처럼 그들이 차려주는 현지식 저녁 식사를 먹어볼 수 있는 기회는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내가 만약 이예우드를 다시 가게 된다면 아마도 그 때문일거다. 그 때도 성수기를 피해서,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의 사려깊은 관심을 듬뿍 받으며 우리 둘만의 행복한 정찬을 즐길 수 있었으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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