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했지만 유명세만큼 특별한 것을 못 찾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법 오래 머무른 벨리코 터르노보를 떠나 루마니아와의 국경 마을인 루세이(Ruse)에 도착했다.

 

벨리코 터르노보의 숙소 주인 아저씨가 전화로 불러준 택시를 타고 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2시 15분. 워낙은 12시에 체크 아웃을 하여 시내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가서 1시에 출발하는 루세이행 버스를 타면 딱이겠다 싶었는데, 주말이라서인지 다른 때보다 시내 버스 배차도 뜸한 것 같고, 숙소에서 터미널까지의 거리도 제법 된다길래 주인 아저씨께 택시를 불러달라 부탁을 했었다. 재미난 것은 역시나 주인 아저씨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하고, 나는 불가리아 단어라봐야 딱 몇 개만 책 보고 흉내낼 수 있을 뿐인데도 결국 대화가 다 되더라는 이야기. 아예 한국말로 부탁했어도 아저씨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랄까(실제로 헤어질 때 ‘안녕히 계세요’ 한국말로 인사하고 왔다는 ^^;). 

 

정작 택시를 타니 쌩~하니 터미널에 도착(4레바 지불. 거리에 비하면 약간 더 나온 것 같기도 하지만 콜택시니까)하는 바람에 1시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버렸다. 승강장 벤치에 자리 잡고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앞 벤치에 앉은 젊은 것들이 거참, 눈꼴 사납게도 물고 빨고 한다. -_-; 버스 티켓을 구매하고 오느라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배낭과 자리를 지킨 김원장의 보고에 따르면, 어찌나 요란하게 빨아대는지 어지간히 떨어진 거리의 김원장 귓전에도 그 쪽쪽 소리가 울리더라나? 어허…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구혼의 아저씨, 아줌마 앞에서 저런 남사스러운 짓이라니, 돈이라도 많으면 옛다, 여관비다, 하고 얼마간 건네주고 싶다만… 가만있자, 그런데 여기도 우리나라처럼 러브모텔 개념의 잠깐 쉬었다(?)가는 숙소가 존재하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1시에 출발한다는 차는 오지 않았다. 그 바람에 결국 1시 30분 차를 타고 루세이로 와야했는데 터미널에서 1시간을 훌쩍 넘게 기다린 뒤 차를 타고 또 2시간을 달려야 했던지라 이미 김원장의 컨디션이 적당히 떨어진 터였다. 그런데 그렇게 도착한 루세이의 찍어둔 저렴한 숙소를 찾아가 보니 이런, 방이 없다네. 이 곳 말고 가이드북에 소개된 루세이의 다른 숙소들은 우리 예산을 벗어나는 것들 뿐인데…

 

마침 6년 전, 불가리아를 여행했을 때 구입했던 예전 버전의 가이드북이 있어 뒤져보니 그나마 걸어갈 만한 거리에 그나마 가격이 다음으로 저렴할 것 같은 대형 호텔이 소개되어 있다. 지난 세월 동안 숙박료가 그다지 많이 인상되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_-; 다시 무거운 배낭을 메고 그 호텔을 찾아가 본다. 다행히도 호텔 이름은 바뀌었지만 건물은 호텔 그대로의 용도로 아직 사용되고 있었다. 로비로 들어가니 그다지 고급은 아니더라도 대형 호텔 특유의 규모에서 오는 위압감이랄까, 그런 것이 물씬물씬 풍겨나네. 리셉션 앞에 붙어있는 방 가격부터 확인해보니 더블룸이 70레바, 허걱. -_-; 하지만 어쩌랴, 오늘은 토요일이니 저렴한 숙소를 소개해준다는 여행사도, 인포메이션 센터도 모두 문을 닫았는데…(중동의 금요일보다 유럽의 주말이 배낭 여행자에겐 더 무섭다) 그냥 이 가격에라도 일단 하룻밤 자고 내일 가뿐한 몸으로 저렴한 숙소를 찾아보는 수 밖에.

 

그런데 다 웃기는 소리였다. 이 커다란 호텔방이 오늘 모두 찼단다. 그야말로 방이 있을거라 지레 짐작하고 혼자 쇼를 한 셈. -_-; 그럼 근처에 다른 호텔이 있을까? 리셉션의 친절한 언니로부터 근처 숙소 하나 위치 정보를 얻고 더불어 무거운 배낭도 잠시 맡겨놓고 호텔문을 나선다. 그러나저러나 이게 다 무슨 일인가, 루세이에 무슨 대규모 행사라도 열리고 있는 중인가?

 

지도를 보니 언니가 알려준 호텔은 오히려 올드타운과 점점 멀어지는 외곽 방향인지라 에라, 모르겠다, 우리는 그 정보를 무시하고 무작정 올드타운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유럽을 두 발로 여행하면서 올드타운과 먼 곳에 묵는 것은 피곤한 짓이다. 아니나다를까, 올드타운에 들어서니 고전미를 풍기는 또 다른 호텔 안내판을 발견한다. 화살표 방향으로 따라 들어가보니 옛 건물을 개조한, 생각보다 아담한 규모의 펜션형 숙소가 나타난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작은 안 마당은 바(bar)를 겸하는지 저녁엔 조금 시끄러울 듯도 싶다. 하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니까.

 

 

그러나 불행한 예감이 맞았다. 여기도 방이 없단다. 루세이에 분명 뭔 행사가 열리고 있는게 틀림없어, 우리끼리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내린다. 주변을 두리번거려보니 현대 발레복 같은 것을 입은 남녀가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 포스터들이 보이고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날짜는 분명 오늘, 내일을 가리키고 있다. 어쩜 범인이 바로 이 행사일까?

 

 

 

거리를 좀 더 걷다가 또 다른 게스트하우스 안내판을 발견한다. English Guesthouse. 영국인이 하는 곳인가? 그 곳을 찾아가본다. 사장님 국적을 물어보진 않았지만 이렇게 유창한 영어를 –나의 수준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_-;- 뿜어대는 주인 아저씨라면 분명 영국인일거다(와이프는 불가리아인인듯). 다행히도 방이 있다. 그것도 발코니가 딸린 넓직한 2층 방으로 제법 근사한(아마도 이 집에서 제일 좋을). 비록 화장실이 공용이긴 하지만 방문 바로 앞이고 가격도 45레바/박(그런데 영국인이 주인이면서 왜 아침은 안 주는거야 -_-)으로 적당한 수준이다(무선인터넷 가능-열라 길고 복잡한 암호는 사장님께 받아와야 한다).

 

방을 예약하고 다시 짐을 맡겨두었던 호텔로 돌아가 배낭을 짊어지고 겨우 찾아낸 숙소로 돌아온다. 여행을 하다보니 이렇게 어떤 날은 차로 2시간 거리 이동하고 이 한 몸 누일 침대 하나 찾느라 하루 온 종일을 보내게 되기도 하는구나. 비록 딱히 한 일이 없어도 괜시리 몸은 피곤하다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단.순.하.게.도. 하루를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마음에 든다. 한국에서는 왜 남의 일로 그리 복잡하게 머릿속을 채워왔던거지? 여행을 나와 지극히 단순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본인 스스로와 더욱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꽃집을 찍다가 문득, 엇, 저것은 중국집 간판? 불가리아에선 RESTAURANT을 "PECTOPAHT"라고 쓴다>

<그 중국집에서> 

<탕슉과 볶음밥(이라고 생각되어 시킨 것)

 

그건 그렇고 다시 한 번 느끼건데 여기 불가리아는 술과 담배를 즐기기에 정말이지 천국같다. 누구든 유럽땅에서 유럽의 분위기를 느끼며 오직 나 이외 다른 이에게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술과 담배에(거기에 맛난 안주까지) 편안한 마음으로 푸~욱 젖어들고 싶다면 어서 불가리아로 오라! 

 

<간만에 만난 다뉴브 강변에서. 루세이는 다뉴브강으로 루마니아와 국경선을 삼은 도시>  

 

 

<뭣 좀 잡히시나> 

 

 

@ 벨리코 터르보노~루세이 직통 기차 : 6시 34분, 10시 27분, 13시 54분, 17시 15분 / 약 3시간 30분 소요 / 시내와 멀리 떨어져 있는 기차역까지 갈 필요없이 시내 중앙 인포메이션 센터 뒤의 릴라 사무소에서 예매 가능. 물론 탑승은 멀리 떨어진 기차역까지 가야지.

 

@ 벨리코 터르보노~루세이 버스 : 7시, 7시 30분, 13시, 13시 30분, 15시, 16시, 17시, 18시 30분 / 약 2시간 소요 / 시내 서부 외곽의 Avtogara Zapad(자파드 버스 터미널)에서 탑승 가능. 예매 시스템 없이 터미널에서 티켓 구매(8레바/인)

 

 

@ English Guesthouse : 앞서 밝혔듯 우리는 올드타운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안내판을 발견하고 기어들어온 숙소인데 방을 정하고 이 숙소에서 제공하는 무선 인터넷으로 혹시나하며 이 집 정보를 찾아보니 론리플래닛 웹사이트를 비롯(아마도 다음 버전의 가이드북에는 이 숙소가 실릴 듯) 여기저기 루세이에서의 추천 숙소로 소개된 나름 유명한 곳이었다. 어쩐지 처음에 주인 아저씨가 본인의 숙소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고 묻더라만(나야 물론 그런 사연을 알 길이 없었으니 심드렁하게 길거리에서 너희가 내건 표지판보고 들어왔다고 대답했지만 ^^;). 캐릭터 파악이 쉽지 않은 주인 아저씨는 숙소와 차 렌탈 등 여행자에게 필요한 서비스도 제공하지만 정작 본업은 부동산 중개업이 아닌가 싶다.

http://buying-properties-in-bulgaria.co.uk/index.php?action=page_display&PageID=5

 

 

### 그러고보니 신기하게도 지나온 벨리코 터르노보 또한 불가리아의 다른 곳에 비해 유달리 부동산에서 내건 물건들이 많이 보였다. 매물에 대해 영어로 된 안내판도 제법 눈에 뜨이는지라 막연히 불가리아의 EU 가입후 서유럽 자본이 몰려와 투기 바람이 불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는데 루세이 역시 유서 깊은 건물들을 목하 복구 중인 것처럼 보인다. 저런 대규모 복구라니, 모두 다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 아니던가. 그간 불가리아에 대체 변화의 물결이 얼마나 몰아친건지 ###  

 

 

<좀 부러운 유럽의 광장 문화, 오늘은 다같이 유로 2008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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