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레메를 떠나는 날 아침, 다시 카파도키아의 아침을 촬영하다>

<아침마다 기구들이 둥실둥실~>

 

괴레메에서 앙카라행 버스를 예매할 때 괴레메의 버스 회사 간이 사무실에서 분명 오전 7시까지 오토가르에 와 있으라고 했는데, 그럼 적어도 7시 전에는 사무실 문을 열어놓아야 하는게 이론상 맞지 않을까? 아침부터 서둘러 10분 정도 여유있게 오토가르에 도착하긴 했는데 다른 버스 회사 사무실은 다 열었구만, 우리가 표를 끊은 이 회사의 사무실 문만 꼭꼭 잠긴 채다. 우리 생각으로는 우리가 타야할 버스가 네브쉐히르에서 오전 7시 30분에 출발하는 버스라고 했으니 7시에는 세르비스 버스 따위로 우리를 네브쉐히르까지 태워다줘야할 것 같은데…

 

결국 기다리다 못한 내가 오토가르 앞 인포메이션 센터에 가서 표를 보여주며 왜 7시가 다 되었는데 우리 버스 회사 사무실이 문을 안 여는지에 대하여 물으니 인포메이션 아저씨가 다짜고짜 우리가 표를 끊은 버스 회사 욕을 하며 그들이 우리를 속인거란다. 아저씨 말인 즉, 이 버스가 네브쉐히르에서 7시 30분에 출발하는 버스이므로 우리가 탑승 시간 전에 네브쉐히르 오토가르까지 가 있어야 하는데, 이 시간엔 네브쉐히르까지 가는 버스가 없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무조건 택시를 타고 네브쉐히르까지 가야하는데 택시 기사들이 최소 20리라 이상 택시비를 부를 테니(뭐냐.. 버스비도 20리라/인인데) 그런 사실을 미리 안 알려준 버스 회사의 잘못이 크다는 소리지.

 

이 이야기를 들으니 참 난감하다. 안 그래도 괴레메 오토가르에 있는 버스 회사들 중 ‘네브쉐히르’라는 이름의 버스 회사가 이런 식의 장난으로 악명이 높아 일부러 우리는 그 회사를 피해 Kent라는 버스 회사를 이용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위안이 있다면,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일정이 빠듯한 탓에 버스 회사의 못된 장난질에 당하고도 어쩔 수 없이 따지러 되돌아오지 못하고 가려던 길을 계속 가야하지만, 우리 같은 경우야 생각하기에 따라서 남는 게 시간이니 -_-; 여차하면 그냥 이번 버스를 보내고 이 사무실이 문 열 때까지 좀 더 기다려보거나 혹은 그냥 숙소로 되돌아갔다가 이따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마음에 드는 대답을 얻을 때까지 사무실을 엎어놓을 수 ^^; 있다는 것이 그 장점 되겠다. 어쨌거나 사무실을 뒤집는 것은 그 다음 문제고, 지금 당장으로는 1분 1초가 이렇게 절절히 느껴질 수가 없는데, 이럴 땐 어쩔 수 없이 경쟁사 아저씨라도 지푸라기마냥 붙들어 보는 수 밖에. 그런데 경쟁사 아저씨왈, (워낙 경쟁사끼리도 서로에 대해 말을 막 한다고 하여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걱정 말란다. 곧 버스가 올거라나? 그런데 오려면 진작 왔어야지. 지금 시간이라면 택시를 타고 가도 7시 30분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애닳아 하고 있는데 우리 버스 회사 사무실 직원이 눈을 비비며 부시시한 머리를 하고 나타났다. 때는 7시 15분이 마악 넘어가고 있고. 오라, 너 잘 만났다. 전투태세를 갖추고 그에게 다가서니 우리를 발견한 그 왈, “앙카라 가는거지? 그 버스 금방 오니까 기다려”. 엥? 버스가 오다니? 옆에서 김원장이 묻는다. “버스가 언제 오는데?”, “5분 안에 와”

 

그러더니 정말이지 아주 큰 Kent 버스가, 그러니까 세르비스나 돌무쉬와는 다른 정식 앙카라행 버스가 7시 20분경 괴레메의 오토가르로 들어온다. 이게 어찌된 일인지? 연유야 잘 모르는 일이지만 여하간 이 버스가 네브쉐히르에서 앙카라로 가는 버스가 맞다. 그런데 마치 세르비스처럼 괴레메에서 우리를 먼저 픽업하기 위해 들른 모양이다. 근 30분을 걱정과 긴장 속에서 보냈던 탓인지 그만큼 무사히 버스에 올랐다는 안도감이 크게 느껴진다. 게다가 우리가 미리 예약해 둔 버스 좌석 번호는 1, 2번. 전망이 끝내주는 맨 앞자리였던지라 기쁨이 배가 된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언덕을 날 듯 달려 네브쉐히르 오토가르를 향해 달린다. 그 곳에 도착하니 7시 30분이 마악 넘어가고 있다. 그리고 다시 네브쉐히르에서 사람들을 마저 태운 뒤 앙카라로 향한다(7시 40분 넘어 네브쉐히르 출발). 중간 중간 사람들을 더 태우긴 했지만 그래도 오늘 우리가 탄 차의 총 승객은 열 명 남짓. 지나온 나라들의 상당수가 정해진 시간없이 사람이 꽉 차야 그때서야 차를 출발시키는 시스템이었는데, 이렇게 크고 편안한, 나름 정시 운행 버스에(참, 이 버스는 지난 버스들과는 달리 일제였는데 김원장 왈 벤츠 버스보다 승차감이 나은 것 같단다) 고작 10명 가량이 타고, 그것도 차장 총각의 멋진 서비스를 받으며 달리고 있자니 한 나라가 잘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중동을 여행하면서 새삼 국민들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하는 우리나라가 얼마나 훌륭하고 좋은 나라인지 다시금 되새기게 되고.

 

 

앙카라에는 12시쯤 도착했다. 터키의 수도답게 외곽에서부터 지금까지 터키의 어떤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수많은 차들이 드나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앙카라 시내를 가로지르는 넓직한 대로나 그 어마어마한 규모의 터미널은 또 어떻고(그새 촌년 촌놈이 다 되어 야~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같다~하며 히히덕거렸다는). 개인적으로는 오늘 앙카라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사프란볼루를 갔다가 이스탄불로 가고 싶었지만, 김원장은 이미 괴레메에서 푹 쉬었는데 사프란볼루에서 굳이 또 늘어질 필요가 있냐며 내일 그냥 이스탄불로 곧장 가자네. 오늘의 맨 앞좌석이 너무 마음에 들었던 탓에 내일도 맨 앞좌석이 가능한 시간대로 이스탄불행 버스티켓부터 미리 예매한 뒤 터미널을 벗어난다.

 

터미널 안내소의 아저씨와 돌무쉬 운전사 아저씨의 안내로 앙카라에서 저렴한 호텔들이 몰려있다는 구시가의 Ulus Meydani(울루스 광장)에 도착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우리와 함께 돌무쉬에 타고 있던 할아버지(말은 한 마디도 안 통하나 너무나 친절하신)가 우리를 알아서 지극히도 저렴해보이는 -_-; 숙소들 앞으로 안내해 주시는 바람에 다시 마음에 웬만큼 드는 수준의 숙소를 찾을 때까지 무거운 배낭을 맨 채 광장 근방을 돌고 돌아야했다는… 그리하여 결국 짐을 풀었을 때는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아이고… 하루하루 체력이 다르다니까. 역시 배낭여행도 젊어서 해야하나보다.

 

 

처음 터키에 들어와서는 지금까지 지나온 중동의 나라들과는 다른, 너무나 유럽에 가까운 모습에 문화적 충격까지 살짝 받았는데, 열흘 정도 지난 지금에 와서는 터키가 말 그대로 유럽과 아시아, 좀 더 세분화시키자면 유럽과 중동의 모습이 혼재된 국가가 맞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이 나라가 정확히 어느 편에 더 어울리는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쉽게 판단내릴 수 없지만(거의 EU 자동차 번호판과 흡사한 터키의 자동차 번호판 디자인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나오곤 한다는, 혹자 말로는 터키의 신지폐도 EU의 유로화 디자인과 매우 흡사하다는데) 아무래도 '사람'들만큼은 여전히 ‘중동’인에 가깝다. 이방인에게 친절하고 젊은이들 대부분은 (많이 날라리스럽긴 하지만 어쨌거나) 분명 종교를 물으면 무슬림이라 답할테고 (비록 술은 마실지언정 돼지고기는 여전히 안 보이는 이 나라) 가족애가 진하고 등등…

 

그러나저러나 앙카라 이 곳, 역시 대도시는 우리 취향이 아니구나.

 

@ 숙소 : 론리플래닛에 첫번째로 소개된 Hotel Ogulturk은 3성급으로 자그마치 70유로/더블룸을 부르더라. 가격을 듣자마자 우리가 돌아서니 얼른 60유로(120리라)로 내리기는 했다만 그래도 넘 비싸서 후퇴. 그 근처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그래서 가장 조용할 것으로 사료되는 호텔 중 하나인 Elif Hotel 트윈룸을 70리라에서 65리라(조식 포함, TV)로 깎아 투숙하기로. 로비에서 무선인터넷이 가능하다.

 

@ 인터넷 : 터키 전역에서 그랬듯 앙카라에서 역시 PC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앙카라의 경우 1시간에 1.5리라. 속도 맘에 듬.

 

@ 신나게 체리(이 동네 말로는 키라즈)를 사다먹고 있다. 처음 시리아에서 넘어와서는 두 배에 달하는 가격에 허걱, 해서 한동안 안 먹었는데 어느새 터키 물가에 웬만큼 익숙해졌는지 달콤한 키라즈의 유혹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다는. 요즘 1Kg에 3.5~4리라 정도니까 우리 돈으로 따지면 3000~3500원 정도 하는 셈이다. 반나절이나마 앙카라를 둘러보면서 느끼는 체감 물가는 한 나라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실제로는 이스탄불이 그 자리에 어울린다 할지라도) 관광지에 비교하면 당연 물가가 저렴하다는 것(배낭족용의 저렴한 숙소 찾기가 어려운 거야 뭐 그렇다치고) 

 

 

(다음은 읽거나 말거나) 

@ 앙카라와 따로 떨어뜨려놓고 생각할 수 없는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 파샤 :

 

[초기생애와 경력]

무스타파는 1881년 오스만 제국 하에 있던 그리스 살로니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터키 가계는 미미했다. 어머니는 쥐베이데 하님이었고 아버지는 정부의 말단관리인 알리 리자였다. 초등학교 재학 중에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그녀의 형제와 함께 시골로 내려갔다. 후에 살로니카로 돌아온 무스타파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오스만 군대의 장교가 되기 위해 군사중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그와 똑같은 이름을 지니고 있던 그의 수학적 재능을 칭찬해주던 한 교사가 그에게 무스타파 케말(성숙과 완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중등학교를 마치고 그는 모나스티르에 있는 군사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터키인들에 대한 마케도니아 그리스도교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1899년 그는 이스탄불의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으며 거기에서 정치에 열렬한 관심을 기울였다. 1902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참모대학으로 진학했는데 이곳에서도 정치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지속되었다. 육군대위로 대학을 마친 그는 다마스쿠스의 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이것에서 몇몇 동료와 함께 '조국과 자유'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으나 별다른 진전은 보지 못했다. 살로니카로 돌아온 그는 대다수의 동료 장교들과 마찬가지고 비밀조직인 '연합과 진보 위원회'에 가입했는데 이 조직은 전군에 혁명활동을 퍼뜨렸으며, 1908년의 헌법선포를 유발했다. 그후의 몇 년간 그는 모든 시간과 정력을 바쳐 직무에 충실했다. 1911년 이탈리아가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트리폴리를 공격하자 그는 동료장교들과 서둘러 현지에 도착했으며 토착민들로 부대를 구성해 적에 대한 성공적인 게릴라 습격을 감행했다. 같은 해에 그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1912년의 발칸 전쟁 때 그는 갈리폴리 반도의 방어책임을 맡았는데 그 임무는 이 중요한 지역의 전략적 형세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1913년 대사관 무관으로 소피아에 부임한 그는 그곳에 체재하는 동안 서구인들의 취향과 예술에 관한 규범과 상류 사회에서의 남녀관계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었다. 그는 뒷날 터키의 사회생활을 개혁할 때 이때의 지식을 잘 활용하였다. 소피아 주재 시에 그는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차나칼레의 19사단장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갈리폴리에서 영국 군을 2번이나 격퇴했으며 터키 언론으로부터 '이스탄불의 구세주'라는 칭호를 얻었고 대령으로 진급했다. 1916년 동부전선에 근무하면서 그는 남하하던 러시아군의 전진을 막아내고 주장으로 진급했다. 1918년 팔레스타인에 있던 제7육군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가 임무를 맡았을 때는 영국과의 전쟁은 이미 거의 끝나 있었고 적군은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북진하고 있었으며 또 아랍 게릴라들은 터키 군에게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제7육군 전군이 포로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는 알레포 북쪽으로 병력을 후퇴했다. 무드로스의 휴전이후에 터키에 주둔하던 독일군 장교와 사령관들이 본국으로 철수하자 그는 동남전선에 있던 모든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휴전조항의 실시에서 영국과 의견대립을 보이자 그는 육군부로 전보되었다. 이스탄불에 도착한 그는 3국동맹의 함대가 항구에 정박해 있는 것을 보았다. 휴전조항은 강경했으나 3국동맹 국가들의 비밀합의에 의해 오스만 제국 영토가 분할되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더구나 이스탄불과 기타지역에 있던 소수민족들이 이 기회를 이용해 투르크족에 대항하는 조직을 구성하려 했다. 터키의 국민들은 평정의 수단을 강구했는데 일부 지방에서는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권리방어를 위한 연합'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활동] 이스탄불에는 터키의 장래에 대해 2가지 안이 떠돌았다. 즉 황제와 그의 지지자들은 터키를 영국의 보호 아래 두려고 생각했으며, 터키의 몇몇 저명한 언론인과 지식인들은 터키를 미국의 위임통치령 아래 두기 위한 선전을 퍼뜨리고 있었다. 2가지 안 모두다 오스만 제국의 통일될 구조를 유지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케말은 자국의 경계 안에 사는 독립된 투르크 민족을 오랫동안 구상하고 있었으며 터키가 새로운 투쟁에 임한다면 이 안이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다. 행동방침을 결정하기 전에 그는 술탄과 그의 대신들을 비롯한 국내외의 많은 고위자들과 만나 대담을 나누었다. 그 다음 그는 그의 동료들과 토의했는데 지휘관이던 그들 모두는 휴전조항에 의해 오스만의 군대가 해체되는 것에 쓰라린 환멸을 느꼈으며, 아나톨리아에서의 독립전쟁이 해결책이라고 보았다. 절호의 기회가 곧 다가왔다. 3국 동맹국들은 터키 정부에 압력을 넣어서 동부의 주들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폭동에 대비하도록 했다. 술탄은 케말을 에르주룸의 제3육군 감독관으로 임명했으며, 그에게 군 당국자와 문관들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1919년 5월 15일 그가 에르주룸으로 떠나기 직전에 그리스는 이즈미르를 점령했다. 술탄을 비밀리에 알현한 후 케말은 많은 참모 장교들을 수행하고 이스탄불을 떠나 5월 19일 삼순에 도착했다. 아마시아에서 지역 군단 지휘관의 동의를 얻어 발행한 그의 6월 22일자 비밀회람에서 그는 국가가 처한 위기를 설명했다. 즉 이스탄불의 정부가 얼마나 나약하게 점령군에 굴복했으며 어떻게 해서 구원의 유일한 희망이 해방을 위한 민족의 투쟁에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첨가하기를 그러한 투쟁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것을 민족 자체의 결정으로 하기 위해 각 주에서 3명의 대표자가 참가한 민족의회가 시바스에서 개최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터키군의 해체에 관한 휴전조항을 무시하고 모든 단위 지휘관들에게 병력을 강화할 것을 명령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군 당국자와 문관들에게 이후로는 그로부터 명령을 받아야한다고 경고했다. 그의 요구는 군을 소멸로부터 구원하는 것이었으므로 군부에 의해 열정적으로 수행되었다. 군은 아나톨리아의 모든 우편, 전신, 통신을 장악했으며 그의 명령에 저항하려 했던 문관관료들을 순응시켰다. 시바스로 가는 길에 방문했던 모든 마을과 도시에서 그는 지도적인 시민들을 만나 독립을 위한 민족적 투쟁에 대해 그의 견해를 설명했다. 그는 그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호의적인 집회 속에서 시바스로 도착했으며 시의 명사들과 요담을 마친 후에, 3국동맹으로부터 그의 즉각적인 이스탄불 귀환을 요구받고 있던 술탄 정부의 모든 명령을 무시하고 에르주름으로 향했다. 에르주름에서는 7월 23일 '동부 아나톨리아의 권리 방어를 위한 연합'에 의해 의회가 소집될 예정이었다. 한편 에르주름의 군과 문관 당국자들은 그를 체포해서 이스탄불로 이송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이 이행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가 시작한 민족적 투쟁의 지도자로서 좀더 자유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군에서의 직위를 사임했다. 그는 단순한 대표자로 의회에 참가해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의회는 그의 제안에 따라 민족의 계약을 수용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맹세로서 조국의 분할불가와 민족적 운동의 성공적인 완수를 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9명으로 상임위원회가 구성되고 그는 의장에 지명되었다. 9월 4일 시바스에서 민족의회가 개최되었는데 그는 또 다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민족의회는 에르주름 의회에 취해진 모든 결정들을 채용했으며 미국의 위임통치 아래 터키를 두려 했던 안을 결정적으로 기각시켰다. 아나톨리아에 새로운 국가를 창설하자는 제안을 물리치고 그는 권리 방어를 위한 연합의 모든 지부를 통합해 '아나톨리아와 루멜리아의 권리방어를 위한 연합'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이 수용되어 정당의 초기 형태가 조직되었다. 페리드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내각과 그 이후 계속된 오스만 정보는 국민운동을 반역으로 간주했으며 케말의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근대 터키의 창설과 개혁에서의 역할]

12월 27일 케말은 그의 목적을 위해 더 편리한 장소라고 생각했던 앙카라로 투쟁기지를 옮겼다. 한편 이스탄불의 오스만 하원 총선에서 케말의 지지자들은 압도적 다수로 당선되었으며 하원으로 하여금 민족의 계약에 있던 행동지침들을 원 자체의 결정으로 선포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들은 케말을 군으로부터 해임한 정부의 이전 포고령을 파기하도록 해다. 오스만 제국의 정책에서 이런 변화의 조정들에 당혹해진 영국은 1920년 3월 16일 공식적으로 이스탄불을 점령하고 하원을 해산했다. 케말은 영국 정부의 행동에 격렬히 항의했으나 사실 오스만 수도의 점령 특히 의회의 해산은 그의 목적에 극히 유용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아나톨리아에 민족정부를 수립함에 있어 이스탄불을 점령하고 하원을 해산했다. 케말은 영국 정부의 행동에 격렬히 항의했으나 사실 오스만 수도의 점령 특히 의회의 해산은 그의 목적에 극히 유용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아나톨리아에 민족 정부를 수립함에 있어 이스탄불 정부가 그에게 제기하고 있던 법적인 장애물을 제거해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하원의원을 선출한 후 4월 23일 앙카라에서 터키의 대민족의회를 개원하고 그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의 제안에 의해 국명을 터키로 바꾸고 주권과 행정권이 대민족의회에 의해 대리로 행사될 것임을 규정한 헌법이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총리직과 국가 원수직을 떠맡았다. 이로써 터키에서 중세로부터 지속되어 온 이슬람 형식의 정권이 종식되고 프랑스 혁명의 경우처럼 터키는 절대왕정과 칼리프의 통치로부터 갑작스러운 전이를 했다. 이 중요한 변화는 일부 지역에 심각한 폭동을 유발했으나 민족 세력에 의해 곧바로 진압되었다. 케말은 이제 당시 점령 하에 있던 국토를 되찾는 일에 열중했다. 먼저 동부에서 아르메니아인과 그루지아인을 격퇴하고 러시아의 중재로 그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터키는 1878년에 잃었던 영토까지 되찾았다. 광범위한 게릴라전 끝에 남부에 있던 프랑스는 터키 영토에서 철수해 시리아로 후퇴했으며 앙카라에 있는 민족 정부의 합법성을 인정했다. 영국은 앙카라를 전면 무시하고 오스만 정부로 하여금 세브르 조약에 서명하도록 했다. 민족 정부가 이러한 조건의 조약을 합법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자 그리스 군이 점령지역을 확대해 앙카라로부터 50km 지점까지 육박해왔다. 이 엄청난 위기의 시간에 의회는 케말을 특권을 지닌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22년 8월 26일 케말 자신에 의해 계획되고 지시된 총공격으로 그리스 군은 패배했으며 2주일 안에 아나톨리아를 완전히 철수해야만 했다. 이 결정적인 승리와 3국동맹국들의 중재에 의해 모든 터키의 영토로부터 그리스군의 철수를 규정한 휴전협정이 그리스와 체결되었으며 영국은 차나칼레와 이스탄불을 국민 정부에 양도했다. 오스만의 마지막 술탄 바히데딘은 해외로 도주했으며, 케말의 제안에 의해 의회는 터키에서의 오스만 600년 통치를 종결시켰다. 1923년 7월 24일 조인된 로잔 조약은 터키 국경의 보존과 완전한 독립을 규정했으며 오스만에 의해 유럽 제국에 부여되었던 모든 특권이 파기되었다. 이로써 케말은 오랫동안 '유럽의 병자'로 유럽 열강들의 분쟁 대상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대신해, 완전히 독립한 터키 민족국가의 창설이라는 그의 꿈을 실현했다. 1922년 그는 이즈미르 출신으로 부유한 집안의 딸 라티페 하님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의 결혼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오랜 독신 기간에 형성되어 온 독립적인 생활 습관을 그가 포기하기 어려웠고, 그의 아내도 참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1917년에 그는 자신에게 능력과 권한이 있다면 터키의 사회생활을 단번에 바꾸어 놓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그 기회가 찾아왔음을 간파하고 개혁 일정에 착수했다. '아나톨리아와 루벨리아의 권리 방어를 위한 연합'을 대체해서 국민당을 창당했고 그 지도자가 되었다. 로잔 조약의 체결 후 곧이어 실시된 총선에서 이 당은 터키의 유일한 정당으로 정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1923년 10월 23일 그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그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24년 그는 칼리프 제도를 폐지했다. 한편 그의 급격한 개혁방법에 반대하면서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진보에 관심을 두었던 일단의 그의 동료들은 '진보 공화당'을 발족시켰다. 케말은 그의 개혁일정을 계속 진행시켜 회교경전의 율법에 기초한 모든 기관들과 수도원, 교단을 폐쇄했다. 그는 '과학은 삶의 가장 믿음직한 안내자다'라고 말했으며 대부분 종교적이었던 전통교육 체제를 폐지하고 현대식의 탈 종교적인 학교들을 설립했다. 오스만의 모든 법체계가 현대화되었으며 새로운 민법전과 형법전이 채용되었다. 그의 개혁은 시민들의 일상생활에까지 침투했다. 종교적 의미를 함축했던 동양식의 의복은 유럽식 의상으로 대체되었으며 댄스, 무도회 및 그 밖의 남녀가 함께 즐기는 오락들이 권장되었고, 계몽된 계층에서는 유럽식 생활 방식을 받아들였다. 케말의 개혁이 도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동부 아나톨리아에서는 세이 사이드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이슬람 경전의 율법을 회복하려 했다. 이즈미르에서는 케말을 암살하려던 예비 음모가 발각되었다고 전한다. 또 모자 사용에 반대하여 몇몇 지방에서 반란기도가 있었다고도 한다. 케말은 이런 운동들의 모든 주도자들을 강력히 처벌하고 진보공화당을 해산시켰으며 이전의 권위주의적 체제로 복귀해 그의 개혁일정을 밀고 나갔다. 남존여비를 주장했던 구시대의 모든 법률과 전통을 폐기하고 그는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포함한 남녀의 완전한 평등을 수립했다. 1928년 그는 터키에서 수세기 동안 사용되어졌던 아랍 문자를 대신해 로마자를 도입했으며 터키에 서구의 고전 음악과 극장을 대중화하려고 노력했다. 1930년 그는 자유공화당의 창설을 허용함으로써 다당제를 도입하려는 2번째 시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당은 곧 반개혁적인 안과 행위들이 중심이 되었고 진보공화당과 동일한 운명을 맞이했다. 그는 또 터키의 언어와 역사 분야에서 대규모 연구일정에 착수했는데 이로써 그는 고래의 종교적 유대를 대신해 사회에 민족적 정서의 유대를 강화하려 했다. 1933년 성의 사용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국회는 그에게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수여했는데 이 이름은 곧 널리 보편화되어 그의 이전의 이름과 칭호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의 외교정책은 '국내에서의 평화, 세계에서의 평화'라는 그의 표어로 요약된다. 경제에서 민족 경제 정책을 추구한 그는 외국인의 모든 상회와 기업들을 국유화했다. 터키의 산업화 문제에 있어서 그는 한동안 사적인 국내 자본에 희망을 걸었으나 그것이 불충분함을 깨닫고 국가사회주의를 권장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서도 중요한 성공을 성취하지 못했으며 한두 가지 외교정책을 제외하면 그의 마지막 5년간은 점진적인 침체에 들어갔다. 그는 마지막 해를 중병으로 보냈으며, 1938년 11월 10일 이스탄불에서 죽어 그곳에 묻혔다.

그는 정치, 법률, 문화 분야에서 터키에 주요한 개혁을 수행했으나 그 영향은 관료들과 도시의 소수 부유층에 그쳤다. 빈곤층 특히 여전히 중세형의 농업적 질서 속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농민들은 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계속했다. 하지만 식자층에서는 서구식 생활방식에 젖어 구시대의 생활 방식으로의 복귀가 불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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