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세운 계획으로는 오늘 오전에 기자 피라미드, 오후에는 이집트 박물관을 방문해야 하는데, 전날 잠이 부족했던 탓인지 아니면 나라를 이동하는 것 자체가 피곤했는지 오늘 아침, 피라미드를 찾아가기엔 다소 늦은 시간에 일어났다. 기왕 이렇게 된 것, 그럼 오전에 박물관부터 가고 오후에 피라미드를 가는 것으로 바꾸자! 고 전에 한국에 전화부터 한 통 넣고~ 역시나 에티오피아에서의 연락 이후로 소식이 없었던 우리를 걱정하고 계시는 양가 부모님들. ^^;

 

그러고보니 이제야 태국에서 가라로 만들어온 국제학생증 ^^;이 그 위력을 발휘할 시간이 왔다. 이집트는 유명한 볼거리가 워낙 많은 만큼 입장료를 내야하는 곳도 많고 게다가 그 가격대를 서유럽 기준에 맞추기라도 했는지 이집트 현지 물가에 비하면 입장료가 상당히 센 편이다.

 

 

Egyptian Museum 역시 외국인 요금이 50파운드로 우리 돈으로 따지자면 거의 만원에 해당한다(물론 우리는 학생증 내밀어 그 반 가격인 25파운드씩을 내고 들어갔지만). 여기에 더해 박물관 내에 있는 파라오들의 미이라실에 들어가려면 100파운드씩을 별도로 내야하고.

 

숙소에 비치된 한글 가이드북도 열심히 눈에 바르고(그러나 내용이 어려워 결국 챙겨 들고 오고), 이 날을 위해 준비해 온 이집트 관련 다큐도 살짝 봤는데 여전히 이집트 박물관의 어마어마한 전시물들은 내 기를 팍팍 죽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 점은 김원장도 마찬가지였는지 박물관 입구에서 혹 자세한 안내서를 따로 판매하느냐, 한국어로 설명해주는 헤드폰은 없느냐며 아쉬워한다.

 

 

박물관의 전시물들도 대단하지만 박물관을 찾은 사람들 역시 볼 만하다. 잘은 모르지만 관람객들 하나하나 붙들고 국적을 확인해본다면 어림잡아 30개국은 되지 않을까? 그들이(또한 이들이 고용한 현지 가이드들이) 뿜어내는 수많은 각국의 언어들이 전시되어 있는 고대 이집트 유물들 사이로 가득 울려퍼지는 모습 또한 매우 인상적이 아닐 수 없다.

 

처음에는 열의에 차서 전시물 하나하나 열심히 들여다보고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가이드북에 특별히 언급된 전시물들만을 찾아다니게 되었고(어째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의 기억이 오버랩 -_-;), 나중에는 안 되겠다, 투탕카멘에 올인하자, 했다가 결국 투탕카멘 전시실에서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만다. -_-; 이후로는 발길 닿는대로 전시물들 사이를 아무 생각 없이 누비다가 썸씽 스페샬스러운 것이 눈에 들어오면 다가가 슬쩍 확인해 보는 수준으로 수직낙하(비록 비싼 파라오의 미이라실엔 들어가질 않았다만 각종 동물들의 미이라실은 나름 흥미롭더라). 허허허.

 

 

특별히 땀 흘려가며 움직인 일도 없는데 이집트 유물에 기를 빼앗기기라도 했는지 김원장이 오후에 피라미드까지 구경하러 가는 것은 무리일 것 같다고 한다. 그럼 카이로에 하루 더 묵지, 뭐. 이런게 빡빡하게 꾸려진 일정에 쫓기지 않는 장기 여행의 장점 아니련가.

 

 

더운 한낮엔 숙소에서 쉬다가 더위가 한풀 꺾일 무렵 숙소를 빠져나와 시내를 돌아다닌다. 이집트의 맥도날드는 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양이다(이 또한 지나온 나라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어제는 맥도날드 위치 설명을 듣고 찾아봐도 안 보이더니 오늘은 그냥 카이로 거리를 정처없이 돌아다니다 두 곳이나 발견한다. 뿐인가, 여기저기 걷다보니 여행 정보글에서 추천되었던 맛집들이 척척 잡히고 우연히 들어간 과일주스 가게에서 끝내주는 딸기주스를 먹기도 한다.

 

 

 

아, 그래, 이집트에선 ‘엘도하’라는 이름의 쌀이 우리나라의 그것과 흡사하다고 했지. 이렇게 막연히 쏘다닐게 아니라 이 쌀을 구해봐야겠다. 준비해 온 정보와 한국어 가이드북을 뒤져 어제의 우체국 근처에 제법 큰 재래 시장이 있음을 확인한다. 어쩐지 여기로 가면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장은 생각보다 규모가 크다. 처음엔 다양한 전자제품 골목을 지났고 이후로는 잡화상들을 지나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정육점 골목 속으로 들어간다. 정육점들이 즐비한 골목 사이에서 드디어 쌀을 판매하는 작은 가게를 하나 발견한다. 그러나 이 집엔 엘도하가 없단다. 아저씨가 가르쳐주는 방향으로 다시 나아가니 새로운 골목에 쌀집이 또 하나 더 있고 그 집에서 진열하고 있는 쌀 중에 우리나라 쌀과 흡사한 쌀이 있다. 이게 엘도하인가? 이 집의 총각들과 말이 잘 안 통하지만 결국 이 쌀이 엘도하가 아니라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총각들이 다시 알려주는 방향으로 찾아가니 이번엔 제법 큰 쌀가게가 등장한다. 그리고 1Kg들이로 보기 좋게 포장된 엘도하를 살 수 있었다(1Kg당 5.25파운드).

 

돌아오는 길에 맥도날드에 들려 무선 인터넷을 시도한다. 신호가 약하고 속도도 아주 빠르진 않지만 그럭저럭 쓸 만하다. 우리 노트북에 관심을 보이던 직원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그 직원이 김원장에게 축구를 좋아하냐며 오늘 저녁 유러피안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있음을 알려준다(물론 김원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 이집트도 축구가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 중 하나인가 보다.

 

방에는 TV가 없고 숙소 로비에서 보기에는 약간 부담스러운지라 경기 시간에 맞춰 TV가 있는 카페를 찾아 나선다. 마침 가이드북에도 나오고 숙소에서도 가까운 Zahret al-Bustan를 지나던 중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던 한 현지인이 이 카페에도 TV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아저씨의 도움으로 TV앞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 곧이어 경기가 시작하자 순식간에 구름같이 손님겸 관중들이 몰려든다. 오오, 우리의 박지성이 선발 출전이다. 우리야 당근 맨유 편이지만, 우리를 둘러싼 이집션 관중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바르셀로나팬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하다.

 

전반전을 볼 때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처음 우리에게 이 집에 TV가 있음을 알려주고 우리를 챙겨 가장 좋은 자리에 앉게 해주고 이후로도 내 옆에 나란히 앉아 함께 경기를 관람했던 아저씨가 문제를 일으켰다. 전반전이 끝날 무렵, 점원이 와서 손님들로부터 먹은 음료수값을 계산해 받아가기 시작했는데 우리가 우리 몫을 지불하려들자 내 옆의 아저씨가 극구 말리는 것이다. 그냥 편하게 앉아있다 경기 다 끝나고 맨 마지막에 내라며. 나는 그래도 되나보다 싶었는데, 김원장이 슬쩍 보아하니 오직 우리 셋만을 제외하고 모두들 돈을 내더란다. 그러니 김원장이 눈치를 챈거지. 김원장은 다시 점원을 불러 돈을 내려들었고 이를 본 아저씨는 다시금 김원장을 말렸다. 그러자 점원과 김원장 옆에 앉아있던 다른 손님까지 김원장에게 너희는 나중에 돈을 내라는 것이 아닌가?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안 이상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다. 김원장이 나를 끌고 벌떡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가자 내 옆의 아저씨가 얼른 우리를 따라나온다. 이게 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거지? 김원장을 발견한 다른 직원이 우리에게 다가오자 아저씨가 먼저 직원에게 이집트어로 뭐라뭐라 또 선수를 친다. 그 말을 들은 직원은 아저씨가 먹은 것까지 우리에게 내라네? 이 말을 들은 김원장이 뭐? 하고 큰 소리로 받아친다. 그러자 얼른 깨갱하고 꼬리를 내리는 가게 직원. ^^; 김원장은 우리 둘 몫의 주스값만을 지불한 채 가게 밖을 나선다. 대체 몇 명이 짜고 치는 고스톱인거야? 씩씩거리면서.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으면 일이 어드렇게 흘러갔을까? 모든 손님들이 돌아간 후 아무도 도와줄 사람없이 왕창 덤태기를 썼을까? 아니면 아저씨가 운영한다는(과연?) 화랑에 끌려가 강매를 당해야 했을까? 어쨌거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김원장과 함께 후반전 볼 곳을 찾아다닌다. 또 다시 맥도날드 당첨 ^^; 김원장이 후반전에 빠져들면서 다행히 화도 가라앉는 것 같다. 역시 이집트는 만만한 동네가 아닌걸까?

 

@ 오늘의 다큐 : <2부 투탕카멘의 저주> 완전 이집트 특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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