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를 살짝 짜증나게 했던 물은 어젯밤 이후 잘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번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이 숙소도 날이 어두워져야 발전기를 돌리는 그런 숙소였나? 확인해보니 그렇지 않단다. 그야말로 아디스아바바 자체의 정전이라고. 이 숙소가 위치해 있는 곳은 나름 아디스의 요지 아닌가! 그러니까 당근 평소에는 중앙 정부에서 안정적으로(?) 공급해주는 전기를 사용하는 대신, 같은 이유로 따로이 발전기를 구비해두지 않았다고 한다. 음… 그러면 전기는 언제쯤 들어오는데? (우리는 전기가 들어와야 밥을 해먹을 수 있다 -_-;) 글쎄, 아마도 늦어도 오후 6시에는 들어오지 않을까? 헉… 이게 어인 일이란 말이냐. 저러다 두루치기가 상하기라도 하면 아까움이 사무칠텐데 -_-;

 

설상가상으로 아침으로 팬케이크를 골라 먹었던 김원장의 장이 다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_-; 나랑 같은 메뉴를 먹었으니까 아마도 평소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기름기가 많은 음식을 먹었을 때 나타나는 습관성 반응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일단 숙소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보기로 한다. 전기가 안 들어오니 TV도 볼 수 없고… 우선 컴퓨터를 통해 이런 저런 이집트 정보 글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컴퓨터 밧데리가 쫑이 난다. 이번엔 PMP를 꺼낸다. 그리고 낄낄거리며 영화를 한 편 본다. 어, 그래도 밧데리가 남네. 한 편 더 시도해 본다. 반 정도도 못 보고 PMP도 맛이 간다.

 

… 깔끔한 숙소에 반쯤 누운 편안한 자세로 기대있지만 전기가 안 들어오니 참으로 무기력해지는 느낌이다. 밥도 못 해먹고, 컴퓨터로 글도 못 쓰고… 그간 내가 얼마나 전력에 기대어 살고 있었단 소리야? 평소 한국에서 누리고 사는 것들에 대해 얼마나 당연시 여기고 있었는지 다시금 생각을 하게 된다.

 

둘의 장에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확실시되자 망고와 바나나 몇 개를 일단 먹어치우고 근처의 다른 숙소들을 구경해 보기로 한다. 혹시라도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발전기를 돌리는 곳이 있을지도 모르지. 볼레로드를 따라 공항쪽으로 걸으며 게스트하우스 안내판을 단 곳들을 찾아보고 괜찮은 곳이 나타나면 그리로 옮기자.

 

생각만큼 게스트하우스 간판이 눈에 잘 띄질 않는다. 주변을 돌아다니며 두 곳을 구경했는데 한 곳은 방 수준에 따라 조식포함 45/65불, 다른 하나는 조식포함 30(S)/50/60불을 부른다. 우와, 비싸다. 냉장고까지 갖추고 있는 방들은 분명 우리 방보다 나은 수준이지만 우리가 묵고 있는 방의 가격이 20불 남짓 되는 걸 고려하면 오히려 우리 방이 훨씬 경쟁력있는 셈이다. 결정적으로 이들 역시 현재 정전으로 어둠의 자식들이다. 그러니까 이 집의 TV도 우리 집처럼 안 나오고, 이 집이 추가로 갖추고 있는 온수기(우리 화장실에도 있긴 있다. 망가진 것으로 -_-;)나 냉장고도 현재로써는 아무 쓸모가 없는 셈이다.

 

우리 집이 최고다, 결론 내리고 돌아오는 길에 현지 젊은이들이 득시글거리던 <뉴욕뉴욕>이란 카페겸 레스토랑에 들러본다. 오오, 가격이 참으로 착하다. 그래, 우리가 여기 에티오피아가 아니면 어디서 또 스테이크를 이런 가격에 먹을 수 있겠는가! 나름 괜찮은 페퍼 스테이크와 음료 한 병을 마시고 43비르를 지불한다. 이 지역이 아디스아바바의 최고 중심가이고, 이 레스토랑이 나름 고급스러운 곳임을 고려해본다면 정말 믿기 어려운 가격이다. 전 세계에서 이 가격대로 스테이크를 썰 수 있는 도시가 또 어디 있었지? 네팔의 카트만두? 인도네시아의 발리? 잠시 세계 이 곳 저 곳을 떠올려보던 우리는 결심한다. 아디스아바바에 머무는 동안 식도락가로 변신하기로 ㅋㅋ

 

스테이크를 먹고 있는데 갑자기 식당에 불이 들어온다(그렇다, 이 곳도 당근 정전이었다 -_-). 엇, 그렇다면 여기서 그다지 멀지않은 우리 숙소에도 전기가 들어왔을텐데… 스테이크 하나만 시키기를 잘했다. 저녁으로는 어제 남겼던, 비장의 두루치기를 해치우리라.

 

룰루랄라 기대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이런, 우리 숙소는 여전히 깜깜무소식이다. 날은 어두워지고 있는데… 그렇게 오후 6시가 지나고, 7시가 지나고… 어라, 이젠 밖이 무척이나 껌껌하다. 숙소 직원은 양초에 불을 붙여 가져다 준다. -_-; 웃긴 것은 어제처럼 물이 안 나와도, 오늘처럼 전기가 안 들어와도 애를 태우고 짜증을 내는 건 오직 우리 둘뿐이라는 사실이다. 정작 이 땅에 사는 이들은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 마치 이게 일상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라는 듯.

 

-               : 오늘, 전기가 들어오긴 할까?

-               숙소 직원 : 글쎄, 그래도 밤 12시엔 들어오지 않을까?

 

12시라니. 그 시간에 누가 일어나 전기를 쓴다고. 하루 종일 전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다 지친(?) 우리는 결국 오늘의 전기 사용을 포기한다. 두루치기는 결국 버려야 하는가. 아까비…

 

저녁 8시, 오늘도 햄버거를 먹으러 나간다(버거+칩+음료=32비르/종류 다양함). 불도 안 들어오는데 햄버거 먹고 일찍 자자! 다행히 햄버거 가게는 발전기라도 돌리는지 조명이 커져있다. 테이블에 앉아 주문을 하고 햄버거를 기다리는데 이번엔 갑자기 햄버거 가게 전체의 불이 나간다 -_-; 그러자 식당 안의 모든 손님들이 각자 본인의 휴대폰을 조용히 꺼내 들어 액정 조명을 밝히고 식사를 계속한다. 우리 같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당황들 할 것 같은데… 이젠 이런 상황이 슬슬 재미있어지기까지 하는구나. ^^; 다행히 불은 곧 다시 들어온다. 햄버거를 코로 안 먹어도 되겠다.

 

햄버거를 먹고 나오자 어라, 우리 숙소 간판에 불이 들어와 있다! 때마침 나갔다 들어오던 숙소 직원 하나가 길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하루 종일 전기가 언제 들어오는지 궁금해했던 우리에게 큰 소리로 알려준다. 전기 들어와! 에휴, 이럴 줄 알았으면 30분만 더 기다려 보는건데…

 

또 언제 전기가 나갈지 모르니 전기가 들어올 때 웬만한건 뭐든지 해 두어야지. 우선 서둘러 두루치기부터 한 번 더 끓여두기로 한다. 그리고 밥도 좀 해둬야겠다. 아참, 컴퓨터랑 PMP도 충전해 둬야지.

 

햄버거도 배부르다고 남기고 왔는데, 새하얀 쌀밥도 지었겠다, 두루치기 냄새에 결국 또 굴복하고 밥솥을 껴안고 먹기 시작한다 -_-; 아, 이번 여행만큼은 진짜 살이 좀 빠질거라 기대했는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디룩디룩 쪄서 돌아가겠구나. 정신없이 맛있게 먹긴 했는데 꼭 배불러지고나면 이렇게 후회가 밀려온다.

 

@ 오늘의 영화 : <못 말리는 결혼> 젊은 커플이 사랑에 빠지는 계기가 좀 어설프지만 어쨌거나 이 영화는 김수미 주연이 맞다(압권이었던 ‘썅’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아~ 김혜자에 이어 김수미도 너무 좋다. 구 전원일기 멤버들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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