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달 보여?>

잠결에 알람을 듣고도 밍기적거리는데 김원장이 깨워서 비틀비틀 일어난다. 세수도 안 하고 옷만 걸친 채 눈 비비며 어제의 산길을 짚어오르자니(사실 산이라기 보다는 언덕에 가깝다) 여행 중 어떤 때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늘어져 있지만 ^^; 또 어떤 때는 지금처럼 밤잠도 설쳐가며 좀 더 좋은 풍경을 내 눈에 담아보겠다고 욕심을 부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주변은 대부분의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밝은 편이지만, 아직 태양은 지평선 위로 떠오르지 않은 상태다. 비록 지금은 물이 흐르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와디(wadi) 안이지만, 이 땅에 비가 내리면 삶의 유지에 필요한 물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마을과 마을 사이로 군데군데 구획지어져 경작된 밭들이 보이고 내 귓전에는 모기들이 윙윙거린다. 
 

 

 

 


일출을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태양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시간이 좀처럼 가지 않아도 지평선 너머로 코딱지만큼 작은 조각이 나오는가 싶으면 그때서부터 그 둥글고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는 순식간에 불과하다. 물론 오늘, 독특한 지형의 와디 하드라마우트 내에서 우리가 지켜본 태양을 가르는 선은 엄밀한 의미에서 지평선은 아니었지만. ^^ 

그리고 이쯤에서 다시금 드는 생각, 역시 올드 쉬밤은 멀리서(즉,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이렇게 바라보는게 제일 멋지다는 것.

가 지평선에서 똑, 하니 떨어져 나오는 순간을 뒤로 하고 다시 언덕을 내려온다. 어제 일몰시 올랐을 때는 아잔이 멋드러지게 울려주었는데, 오늘 일출시 올랐을 때는 온동네 닭들이 일제히 울어제끼는 것으로 대신한다. 외국을 여행하다보면 가끔 아무 때나 울어대는 미친 닭들을 만나게 되는데(곤히 자고 있는데 밤새 끊이지않고 목청껏 꼬끼오 울어대는 애를 만나면 정말이지 그 모가지를 확 비틀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_-;), 그 놈들에 비하면 여기 아이들은 본연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숙소로 돌아와 밥을 지어먹고 다큐멘터리를 하나 보고 또 다시 냉장고에 있는 먹거리들을 모두 털어 뱃속에 쑤셔넣는다. 망고가 저렴하긴 한데 그다지 맛은 없다. 오렌지도 실패. 남은 식빵은 모조리 올리브유에 토스트해서 먹어치운다.



그리고도 남는 시간을 어영부영 죽이다가 오후 1시, 숙소를 나선다. 누가 한낮 아니랄까봐 햇살이 끝내준다. 눈살을 잔뜩 찌뿌린 채 지도를 살펴보니 세윤 시내와 세윤 공항이 2~3Km 정도 밖에 안 떨어져있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 왔을 때의 가격 그대로 500리알에 가야지. 하지만 쉬밤 성문 앞 택시는 처음 불렀던 1000리알에서 600리알까지 내려와 주더니 더 이상 깎아주질 않는다. 100리알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접전을 벌이던 택시 아저씨가 갑자기 그럼 말아라, 하고 휙하니 가버린다. 어라,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면 안 되는데? 어제 샤이를 팔던 총각도 그러더니 이 나라는 ‘주인 맘대로’ 주의련가? 관둬라, 흥. 너만 택시냐?

그런데 걔만 택시였다. -_-; 오후 1시가 어떤 시간인가? 이 나라에서 1시란 오전 근무를 끝내고 메인 식사인 점심을 거나하게 먹고 캇을 줄창 씹어주는 시간이 돌아왔음을 뜻한다. 어제 왔다리갔다리할 땐 그리도 많던 빈 택시들이 오늘은 그 한 대가 가버리곤 땡~인 것이다. 우리를 어엿비 여긴 -_-; 성문 앞 행상 아저씨가 성 안에 택시가 없으니 건너편에서 세윤으로 향하는 차를 잡아보라는 시늉을 한다.

건너편은 그늘 한 점 없었다. 날은 덥지, 가방은 무겁지, 그래서 나는 인도변 턱에 걸터 앉기로 했다. 그랬더니 엄마아~ 엄마아~ 엉덩이가 (무지) 뜨거워~더라. 차라리 서 있는 편이 나을 듯 했다. 그렇게 얼마 서 있지 않았는데도 이래저래 힘들더라. 100리알이면 우리 돈 500원인데 그냥 그거 더 주고 탈 걸, 싶었다. 예전 인도에서 김원장이 우리 돈 백얼마 가지고 릭샤 아저씨랑 언성을 높였던 생각도 났다. 그 때도 나중에 후회했었지. -_-; 고집 부리지말고 이제 택시 잡히면 600리알 주고 그냥 갈까? 그런데 새로 잡힌 택시 역시 또 1000리알을 요구한다. 덴장. 인간성 시험하냐? 따지고보면 우리가 정작 기분 나빠하는 건 돈 몇 백원, 몇 천원 더 내는 게 아니다. 누군가 나를 속이려고 들고, 내가 거기에 속아넘어갔다는 사실이 더 기분을 더럽게 만든다.  

결국 그 택시도 무시해 버렸다. 시계는 어느덧 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시까지 공항에 가 있으라고 했는데, 그럼 지금쯤은 타 줘야 하는데... 혹시 늦었다고 비행기를 안 태워주는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그러고 있는데 성 안에서 트럭이 한 대 나왔다. 트럭 아저씨는 우리 앞에 차를 세우더니 어설픈 영어로 세윤을 가냐고 묻는다. 세윤 시내가 아니라 세윤 공항엘 가는뎁쇼? 그래? 으흠... 그래, 이 차 타!

이게 트럭인지 택시인지 잘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아저씨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건데 아저씨는 세윤을 가는 중이지, 적어도 공항을 가는 중이 아니었음은 틀림없었다.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공항까지 얼만데요
 -      I don’t know.

아저씨의 아이 돈 노우… 그건 얼마인지 모른다는 뜻이 아니었다. 눈치로 때리건데 분명 돈을 안 받겠다는 말같았다. 내 뒤에서 별 기대 없이 서있던 김원장에게 얼른 손짓하며 외쳤다. 이 차 타! 김원장도 내게 물었다. 얼만데? 몰라, 안 받는다는 것 같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었던지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내릴 때 돈을 달라고 하면 500리알만 주고 내려야지, 야멸찬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를 태우고 공항을 향해 달리는 아저씨의 어투와 행동은, 비록 몇 마디 오가진 않았지만,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호의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고나 할까. 차에 올라탄 이후 앞 자리에 앉은 김원장과 뒷자리에 앉은 나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우리 둘 모두 알 수 있었다. 이 아저씨가 돈을 바라고 우리를 태워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20여분을 달려 우리가 탄 트럭이 공항에 다가섰을 때 나는 주섬주섬 비상식량으로 아껴두었던 오렌지 하나를 꺼내기 시작했다. 오렌지 하나로는 택도 없는 인사였지만 내가 가진 것 중에 새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것 밖에 없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김원장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어디론가 뛰어가 버리더니 공항 입구 가게에서 음료수를 사왔다. 아저씨는 내게 오렌지를 받을 때도, 김원장에게 음료를 받을 때도 몇 번이고 거절하며 이런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닌데, 하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우리는 그게 더 고맙고 미안했다. 단순히 고맙다는 말 외에 정말정말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은 아라빅으로 뭔지 이 순간 너무 알고 싶었다. 

공항이라 하기엔 너무 초라한 세윤 공항에는 요코상이 이미 와있었다. 오만 살랄라에서 함께 버스를 타고 예멘 국경을 넘었던 요코. 세윤에서 우리가 사나행 항공권을 구입할 때 여행사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던 그녀는 항공권 가격이 예산을 초과하는지 구입을 미룬 채 우리와 헤어졌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우리보다 먼저 와 있다니. 아마도 예멘의 장거리 버스 여행이 항공권 가격보다 더욱 부담스러웠나보다. 그간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얼굴은 더욱 창백해 보이고 초췌해져 있었다. 쯧쯧. 

세윤과 쉬밤에서 콧배기도 보이지 않았던 백인들 상당수가 하나 둘씩 속속 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어제 만났던 한국 여성도 공항에 나타났다. 그녀의 팀원이라는 프랑스인, 레바논인, 베트남인과 함께였다. 다시 봐도 인터내셔널한 멋진 여성이란 말이지. 우리는 어디선가 날아온 사나행 비행기가 도착하고 다시 승객들을 태우기 시작할 때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고로 론리플래닛의 예멘 Zabid 부분을 보면 “The old town was declared a Unesco World Heritage Site in 1993, and in 2000 was registered on the organization’s ‘Danger List’, requiring urgent funds for restoration”으로 설명을 맺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그녀가 그 프로젝트를 위해 이 곳 예멘땅을 찾은 것이라니 세상 참. 

다소 거만해 보이고 쌀쌀맞은 예메니아 항공 승무원들에게 얇디얇은 빵 쪼가리 하나와 팩음료를 받아든 것으로 50여 분간의 경치 좋은 비행은 끝났고(그나마 김원장 옆에 앉은 예멘 청년 하나가 비행기 안에서도 캇을 씹는데 여념이 없는지라 본인 식사를 양보해 주는 덕에 우리는 반씩 더 먹었다) 한국인인 그녀와도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언제고 인연이 닿아 한국에서, 혹은 제 3국에서라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서로 건강하기를 바라며. 

워낙은 공항에서 시내까지 버스를 이용할 계획이었으나 김원장이 피곤하다며 택시를 타자고 하더라. 그럼 우리, 유난히 힘들어보이던 요코도 태워서 가자. 그런데 요코가 어디 갔지? 보이질 않네. 어쩔 수 없이 우리끼리 택시를 타고(2000리알. 깎으면 1500리알까지도 가능하다길래 깎아봤는데 아저씨가 공항->시내는 2000, 시내->공항이 1500이라며 끝내 우기더라) 시내로 들어왔다. 사나의 해발 고도가 2,350m라고 했던가? 놀랍게도 사나의 날씨가 그야말로 끝내줬다. 이렇게나 시원한 바람이라니. 오호, 바로 이거야. 어쩜 1시간 비행으로 기후가 완전히 바뀌었네. 한동안 시골에서 보내서 그런지, 간만에 보는 도심이 반갑다. 사나에 대한 첫인상이 기대 이상이로구나. 느낌이 아주 좋다. ㅎㅎㅎ (뭐지? 이 저절로 나오는 음흉한 웃음은?)



     <가이드북 추천 사나의 생선 요리. 이런 모양으로 서빙될 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식탁위 비닐 한 장으로 따로 접시가 필요없는 빵>

@ 오늘의 다큐 : <세계걸작다큐, 신화와 영웅을 찾아서 1부 신비의 여인, 시바여왕>
시바 여왕의 자취를 찾아가보자니 에티오피아보다도 이 곳 예멘이 더욱 그녀의 땅스럽다. BBC에서는 이런 다큐 제작에 돈을 아끼지 않는 듯(아니면 유럽애들이 시바여왕 이야기를 동화처럼 좋아하거나). 어쨌거나 이걸 보자니 마립을 거쳐 사나로 가는 육로가 다시 땡기더라. 마립의 기존 유적지와 더불어 현재 발굴 중이라는 시바의 유적지 모두를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날은 언제나 오려나? 그러나저러나 너무 자세히(?) 보여주는 바람에 에티오피아 북부의 유적지들에 대한 흥미가 오히려 반감되는 것이 단점.

@ 사나의 숙소 : Emirates Hotel. 양변기는 없지만 화장실 포함한 더블룸 2000리알/박
예멘의 수도, 사나의 볼거리라면 뭐니뭐니해도 구시가인 Old San’a겠지만 올드 사나내 숙박 가격이 세다는 말이 있어 처음부터 우리는 아예 그 대안 숙박지라는 Tahrir 광장(Midan at-Tahrir/해방광장?)으로 찾아갔다. 워낙은 우리나라 여행자들이 추천한 Wadi Hadramout Tourist Hotel에서 묵으려고 했는데 도무지 이론상 있어야 할 자리(타흐리르 광장 맞은 편이라고 했는데)에 보이질 않더라. -_-; 어쩔 수 없이 차선책으로 광장에서 가장 가까운 가이드북의 두 추천업소 중 Al-Nasr Hotel보다 에미레이트가 보다 조용할 것 같아 후자를 선택했다. 세윤의 레이뷴 호텔과 수준이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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