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 크레타, 크레타...

 

김원장과 그녀와 내가 둘러앉아 커피를 마셨던 해변 노천의 카페촌. 

 

크레타에선 그간 머물렀던 유럽의 그 어떤 숙소보다도 근사한 복층 짜리 빌라를 빌려 놀았는데, 윗층 발코니로 나서면 작으나마 테이블도 마련되어 있고 저~ 멀리 한 뼘만큼이나마 바다도 보였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숙소를 즐기기엔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당장은 숙소를 누리기 보담,

나는 그녀와 그녀가 지중해 제물로 바친 캠코더 배터리를 구입할 수 있는 가게를 찾느라,

김원장은 뒤늦게야 본인의 여권 분실을 깨닫고 다시 항구로 쏘다니느라 모두 나름 부산스러웠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모든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

동영상을 못 남긴다 한들 어떠하리~ 

여권이야 아테네로 돌아가 재발급 받으면 되지~

마음을 그렇게들 먹자 다시 편안해졌다.  

 

우리는 이라클리온 시내를 쏘다니고,

크노소스 유적지를 안 헤매고 걸어다니고(이제 미궁의 모습은 찾기 어려우므로),

하니아까지 소풍을 다녀오기도 했다(http://blog.daum.net/worldtravel/11012625).

 

그러고 보니 하니아의 조용한 해변에선 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 하니아에서 전투를 치뤘던 기억에 다시 크레타를 찾아온, 이제는 주름이 가득한 한 독일 노인을 만났는데, 말로 풀어낼 수 없이 많은 기억을 담고 있는 그의 눈빛을 마주하다가 뜬금없이 영화 <지중해>는 왜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크레타와 관련된 그 모든 기억들 중 가장 강렬한 체험은,

적어도 내겐,

이 묘를 찾은 일이다.

 

바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 

 

 

서로 입 밖으로 말을 내어 의견을 맞춰보진 않았지만,

아마 우리 셋 모두에게 의미가 남다른 곳이었을 성 싶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

 

<그녀가 찍어준 우리의 사진. 흠.. 이 촬영 실력으로 캠코더를 들고왔으렸다~>

 

저거 맥주야? 내가 이 사진을 보며 김원장에게 지금 물으니

김원장이 설마 맥주였을까, 하더니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며 맥주네, 한다.

 

아마 김원장은 안 마셨을테고, 저 앞에서 마셨다면

(분명) 나랑 그녀랑 마셨을 것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묘를 바라보며

나는 그녀와 맥주를 마셨다.

희랍인 조르바를 안주 삼아(그리스인 조르바보다 희랍인 조르바가 왠지 정이 더 간다).

 

나는 자유

 

 

크레타에서 우리와 '함께' 며칠을 보냈던 그녀는 

이제 이라클리온 항구에서 '혼자' 배를 타고,

다시 피레우스에서 아테네로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

이번엔 아테네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간 뒤,

공항에서 수속을 밟아 다시 유럽 어딘가를 경유하여 한국으로 돌아갈 일을 막막해했다.

 

그런 그녀에게 약도를 그려주고 몇 번씩 각 구간의 절차를 설명해주고 연이어 복습까지 시킨 뒤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탄 배가 항구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손 흔들며 바라보며

마음 한 구석이 참으로 심란했던 건 부인못할 사실이다(그 이후 그녀에게 벌어지는 우여곡절은 다 그녀만의 몫이다).

 

그녀는 그렇게 크레타에서 떠났다. 그리스를 떠났다.

사실 그녀와 산토리니를 갈 수도 있었을텐데,

김원장이 이미 다녀온 곳이라 크레타로 정했었다.

지금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를 다시 들여다보며,

그녀와 산토리니가 아닌 크레타를 여행할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그녀가 크레타를 떠나고,

우리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아테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여권만 잃어버리지 않았어도 섬에서 섬으로, 그렇게 이어이어 터키로 넘어갈 생각이었지만,

여권이 없으니 그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동안 김원장은 여권을 분실한 곳이 페리가 아닌 지하철 속일거라 확신에 찬 결론을 내렸던 차라 아테네로 돌아갈 이유는 넘칠만큼 많았다.

 

아테네로는 국내선을 이용했고(이 때 크레타 공항에서 깜짝 놀랐다. 크레타까지 전세기인가를 동원해 날아온 중년 일본인 단체 여행객들을 보았기 때문에. 대체 이들을 따라가려면?), 담당자라는 이 사람 저 사람의 각기 다른 대답에 따라 지하철 역내 경찰서니 분실물 센터니 왔다리 갔다리 많이도 했다. 아직도 지하철 속에서 '타'에 강세를 넣어 울려퍼지던 신타그마, 신타그마~ ♪ 정거장 안내 방송이 생생하다.

 

불행히도 여권은 그 어디에도 없었고

그리스 주재 한국 대사관의 설명을 듣고서야 

그 여권이 소매치기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더불어,

그리스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는 여권 재발급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했다. 

 

여행을 계속 하려면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여권 재발급을 받아야했기에 우리에게 남아있는 선택은 귀국뿐이었다. 이미 론리플래닛 <이스탄불 투 카이로>편도 구입해 놓았고(당시 우리의 원래 계획은 그리스에서 터키로 넘어가 터키를 여행하고 중동을 거쳐 이집트까지 여행한 뒤 일시 귀국하는 9개월 짜리로 그게 1차였다. 그리스를 여행했던 시점이 출발한지 만 6개월을 거의 채워가고 있을때였으니까 얼추 계획대로 맞아가고 있었는데 나머지 3개월 분량이 계획에서 크게 어긋나게 된 것이다), 그녀편으로 엄마가 알뜰살뜰 꾸려보내준 한식도 많이 남았는데 -_-; (그러고보니 또 생각나는 그녀 관련 일화 한 가지. 울 엄마가 그녀가 나를 보러 간다고 하니 여러 한식 외에 김치까지 준비해 그녀에게 맡겼단다. 그녀는 익히지 않으려고 출발 전날까지 그 김치만 따로 냉장고에 넣어 보관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예상들 하시겠지만, 그녀는 역시나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김치를 놓아둔 채 우리에게로 왔다. 뭐, 지극히 그녀다운 행동이다. 나중에 예정보다 이르게 귀국하게 되었다고 엄마에게 국제전화를 하게 되었는데 엄마가 묻더라. 김치는 안 터지고 잘 갔냐? 나는 대답했다. 멀쩡하게 왔고 너무 맛나게 잘 먹었노라고)

 

막상 한국으로 돌아간다 마음 먹으니 한편으로는 다소 설레는 마음에 들뜨기도 했다. 그래서 귀국 항공편 준비도 신이 나서 했다. 문제는 아테네의 이름난 여행사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모든 항공편이 모두 full이라는 것이었다. 그 중 가장 신뢰가 가는 여행사에 티켓이 나오는 대로 예약해 달라고 부탁을 해놓고 우리는 아테네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섬으로 다시 떠났다.

 

그렇게 들르게 된 섬이 에기나였다.

 

 

 

 

남들은 피레우스에서 멀지 않아 1일 크루즈로 근방 몇 섬과 묶어 잠시 노닐다 가는 섬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방을 빌려 그냥 묵었다. 끓는 물에 담궈 먹는 즉석 밥을 사다가 엄마가 보내준 한식 반찬을 맛나게 까먹으며.

 

 

 

언제 봐도 재미나다고 생각하는 사진. 사진 속의 나는 (에기나의 숙소에서) 목하 밀린 여행 정보를 정리하는 중이다. 우리가 여행을 떠날 때 삼보컴퓨터에서 지원해준 노트북은, 인도의 불규칙한 전압 때문인지 그 곳에서부터 깜빡깜빡 맛이 가기 시작하더니 결국 폴란드에서 확실히 정신을 놓고 말았다. 우리는 그 애물단지를 내내 들고 다니다가(혹시나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하는 일말의 마음도 있었고 주로 작은 마을로 다니다보니 큰 도시로 일부러 나가지지가 않아서)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야 DHL을 이용하여 한국의 삼보컴퓨터로 수리를 위해 다시 보낼 수 있었다. 이후 헝가리에 머물면서 새 노트북을 받을 뻔하다가 결국 그리스로 찾아온 그녀를 통해서야 안전하게 받을 수 있었다. 받고보니 원래의 그 놈이 아닌, 완전 새 노트북이 왔더라(그러고보니 그녀가 우리를 위해 가져온 짐이 많았구나. 김치 빼먹은 것 용서해줄께 ^^). 그러니까 저 사진 속의 나는 폴란드에서부터 밀린 여행정보를 정리하는 중일거다.

 

<여행 정보가 얼추 정리가 되었는지 밀린 여행기를 시작한 내 모습> 

 

삼보컴퓨터 마케팅 부서에서는 우리의 3년 반짜리 여행 계획에 혹하여 실시간으로 여행기를 작성할 수 있는 노트북과 그 여행기를 올릴 공간(당시 삼보컴퓨터 홈페이지를 통해 연재)을 지원해주신 건데, 한 대 받고, 또 다시 새 노트북으로 교환 받고도, 우리는 만 6개월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 또 다시 나가지 못했다(물론 이미 우리 여행기는 마케팅 부서의 관심 밖인 것 같긴 했지만 -_-;). 나는 아직도 그 점이 삼보컴퓨터측, 특히 마케팅팀에 몹시 죄송스럽고 2005년엔가 삼보컴퓨터가 법정관리에 들어갔을 땐 남모를 죄책감까지 들었더랬다 -_-; (그러나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인지라, 나는 그 노트북을 불과 몇 달전까지 잘 사용했다. 그러니까 그 노트북을 그 후로도 5년 정도 사용한 셈인데, 그 동안 사용하면서 삼보측에 감사한 마음에 고장나면 고쳐서 계속 써야지 마음 먹었더랬다. 그런데 몇 달 전, 그 노트북이 결국 맛이 가서 서비스료를 지불해가며 여기까지 삼보 A/S 아저씨를 불러들였는데, 이것저것 살펴보던 아저씨왈, 고치려면 자그마치 100만원 정도 든다고 하더라. 차라리 하나 새로 사시라고 -_-; 그래서 결국 인터넷으로 제일 저렴한 요즘 노트북을 찾으니 Dell이라길래 그냥 60만원짜리 Dell을 샀다. 삼보 제품을 안 사고. 아아~ 이래저래 죄송하여라~)

 

<지금 보니 진짜 새까맣다. 발바닥만 하얗네 -_-;> 

 

잡설이 길었지만, 만약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 나는 블로그도 안 하고 있을 거다. 삼보와 계약을 맺으면서 여행기라는 걸 작성하기 시작했던 것이고, 여행을 다녀온 뒤 그 여행기가 사장되는 것이 스스로 아쉬워 블로그로 옮기게 되면서 이런 공간이 탄생하게 된 거니까. 결국 역사는 별 관련이 없어보이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될 수도 있는가 보다.

 

 

<에기나 숙소에서 바라본 풍경들> 

 

 

 

 

에기나는 문어가 유명해서 우리도 에기나 시장 뒷골목 어느 현지인 많은 작은 식당에 쑤시고 들어가 앉아 문어를 시켰다. 작은 시장 골목, 문어를 파는 식당마다 불을 피워 석쇠에 문어를 구어대는지라 문어 냄새가 동네방네 진동을 했더랬다. 생각과는 달리 엄청 통통하고 커다란 문어는 별 맛이 없었고(짭짤은 하더라만), 오히려 딸려시킨 생선 구이가 더 맛났다. 다른 테이블의 덩치 좋은 현지인 아저씨들은 역시나 문어를 안주삼아 먹고 있었다. 술은 물론 물과 섞여 뽀오얀 빛을 띄는 우조가 대세.

 

에기나에서 문어 말고 유명한 건 피스타치오다. 이 때만 해도 김원장이 견과류를 별로 안 좋아하던 때였나보다. 지금이라면 피스타치오를 이따마한 큰 봉다리로 샀을 것 같은데, 그 때는 그러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러고보니 문어고 피스타치오고 다 안주가 아닌가! 에기나는 착한 섬이군). 

 

 

<아테네로 돌아가기 전, 눈부신 에기나의 항구에서> 

 

 

<엑시트로 탈출하라>

 

그 보다 그 위의 엑소더스가 내 눈길을 붙잡는다. 저 문자가 바로 '엑소더스' (당시 불가리아를 여행하면서부터 그리스/키릴 문자 읽는 법을 독학했는데 물론 후딱도 잊어버렸다).

 

 

 

아테네로 돌아오고도 며칠 더 기다려서야 우리는 암스테르담 경유 한국으로 돌아가는 KLM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항에서는 그리스 공항에서는 당연히 문제시 삼지 않았던 맥가이버칼을 당연히 문제삼았고, 그래서 다시 그 놈만 따로 부쳤는데 이후 인천 공항에서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그 이후 우리 여행에 그만한, 보기 좋은 크기의 맥가이버칼은 사라졌다. 엄마한테 빼앗다시피 얻은 건데. 요즘엔 마찬가지로 엄마한테 얻은 새끼손가락만한 맥가이버칼로 대충 때운다). 귀국행 티켓을 한참 기다려서 그랬는지 경유지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암스테르담 시내 나들이를 삼간 채 그저 스키폴에서 죽쳤던 기억이 난다. 그 날 암스테르담 발 인천 행 기내식이 뭐였는지, 내가 너무 감동해서 다음에 혹 유럽을 갈 기회가 있으면 KLM을 타리라 했었는데... 그런 걸 보면 제법 근사한 한식이라도 나왔었나 보다. 

 

그렇게해서 2002년 4월 8일, 우리의 결혼 기념일에 결혼 기념일 선물로 떠났던 한국이

2002년 10월 10일, 이번엔 내 생일 선물로 돌아와 안겼다. 

 

우리는 그렇게 만 6개월 간의 여행을 마치고 귀국했으며, 5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원장실 책장 한 구석에는 그 날의 론리플래닛 <이스탄불 투 카이로>가 펼쳐질 날만을 기다리며 꽂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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