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될(곧 둘째를 출산할 예정이다) 그녀가 당시 큰 결심을 했다. 본인의 휴가를 이용해 여행 중인 우리와 조인하기로 한 것.

 

나는 그녀와 진작 괌에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 혼자 경유편을 이용하여 그리스에 도착, 우리가 머물고 있는 아테네 숙소까지 찾아오기엔 다소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테네에 머물다 그녀가 온다는 날짜와 시간에 맞춰 그녀를 마중하러 공항버스를 타고 나갔는데, 그러자니 마치 내가 아테네 주민이라도 된 듯 싶었다.

 

평소 그녀의 어리버리함(?)이 이번에도 발휘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녀는 다른 승객들에 비해 조금 늦게, 무리의 뒤에 쳐져 두리번두리번거리며 나타났다. 이렇게나 반가울수가. 그야말로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가 아닐쏘냐. 

 

우리는 다시 함께 공항버스를 타고 아테네로 돌아와 미리 그녀 몫으로 예약해 둔 방을 내어주고 우조부터 마셨다(우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는 우조 맛을 잘 모른다. 여하튼 우리가 반갑다는 핑계로 그녀에게 우조를 여러 잔 권한지라 그녀는 그리스에 도착한 첫 날부터 벌게지더니 결국 뻗고 말았다).

 

그녀까지 셋이 되어 다시 오르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그 주변.   

 

 

 

 

 

 

 

<나랑 그녀랑 : 학교 다닐 때와는 반대로 학구적인 분위기가 물씬물씬> 

 

 

아테네 구경을 마친 뒤 우리가 방문한 곳은 에피다우로스. 개인적으로는 수니온 곶에 가서 일몰의 포세이돈 신전을 보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으나, 이미 김원장이 예전 그리스 여행시 다녀온 곳이라 이번엔 에피다우로스로 가기로 결정했다. 마을의 언덕 꼭대기에 3인용 숙소를 구해놓고는 오르락 내리락 하느라 땀흘렸던 기억이 난다(김원장이 아무리 예전부터 봐오던 후배라지만 그래도 이젠 함께 방쓰기 불편하다고 투덜거렸던 기억도 난다. 그래서 그럼 김원장은 숙소에서 혼자 좀 쉬어라, 나랑 그녀랑만 시내로 나가 이것저것 사먹고 술 마시고 그랬었지. 어째 친구가 온 뒤로는 거의 매일밤 부어라 마셔라 분위기가 형성 -_-)  

 

 

에피다우로스에서는 우리 인생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 하나 발생하는데, 그것은 바로 김원장의 여권 분실이었다. 에피다우로스의 숙소에서 역시 다른 여느 숙소처럼 투숙객의 여권 하나를 데포짓 삼아 요구했고, 체크 아웃하면서 다시 여권을 손에 쥔 김원장은 이미 꾸린 짐을 다시 푸르기가 번거로운지라 그냥 바지 주머니 깊숙히 여권을 넣어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테네로 돌아와 신타그마 광장에서 피레우스 항구 행 지하철을 탈 때까지는 분명히 그 자리에 있었는데 어랍쇼, 그 이후 주머니 속의 여권이 없어진 걸 알게 된 건 다음 날 아침이나 되어서였다. 이에 대해선 다음에 다시 밝히기로 하고.

 

 

<그녀의 사진 1>

 

그녀의 사진 1에서 보는 것처럼 그녀는 자그마치 그리스(!)에 온다고 중고였나, 여하간 마~악 디지털 캠코더를 구입해 들고 왔더랬다. 물론 평소의 그녀 성격답게 작동법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그냥 들고 온 듯 싶었다. 역시 예상대로 좀 버벅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나의 후진 디지털 카메라에 비하면 훨씬 있어보이는(실제로도 고가인)데다가 ^^; 막강 동영상 화질을 가진 그녀의 캠코더는 제법 성능을 발휘하여 그리스 여행을 보다 풍요롭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녀의 사진 2>

 

우리의 다음 목적지였던 크레타. 김원장이 예전 추억을 곱씹는다며 다시 밤새 바다 위를 헤엄쳐 크레타로 나아가는 페리편을 구했고, 우리 표는 당연 -_-; 입석(그러니까 밤새 캐빈이 아닌 덱을 이용해야만 하는) 비슷한 놈이었기 때문에 돈을 더 많이 지불한 캐빈 승객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될 때까지 찬 밤바람을 맞으며 갑판을 어슬렁거려야 했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더욱 쌀쌀해졌는데 그 와중에도 그녀는 지중해를 가르는 이 배의 동영상을 찍겠다며 캠코더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오오 이런,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만 그 캠코더의 밧데리가 지중해의 컴컴한 바닷속으로 퐁당, 떨어져버리고 만 것이다. 어머어머 이를 어째...(뭐 어찌 생각하면 지극히 그녀다운 짓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어쨌거나 당시 우리는 좀 당황했다. 물론 곧이어 물에 빠진게 밧데리니 망정이지, 본체가 떨어졌음 더 황당했겠다며 낄낄거렸지만) 

 

 

그날 늦은 밤을 틈타 우리는 내부로 잠입해서, 나의 침낭을 바닥에 쫘악 깔고 김원장의 침낭을 펼쳐 덮고 안 입는 옷가지를 꺼내 얌전히 접어 어설픈 베개도 만든 후 셋이 나란히 나란히 복도 구석에 누워 잠을 청했다. 김원장은 우리와 같은 티켓을 끊은 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밤을 보낸다고 했지만, 사실 모양새가 좀 우습긴 했다. ㅎㅎ 그래도 김원장과 나, 그리고 그녀, 이렇게 딱딱한 바닥에 누워있으려니 그 옛날 김원장이 복무중이던 양양에 단체로 MT가서 마찬가지로 누구 누구 누구 눕고 김원장 눕고 그 옆에 내가 눕고 다시 내 옆에 그녀가 누웠던 기억이 나더라. 그 때는 나 혼자 김원장을 짝사랑할 때였는데(그래서 같이 갔던 선후배들이 모두 김원장 옆자리를 내게 양보해준지라 ㅋㅋ), 이제는 wife의 신분으로 옆에 누워있다는 생각을 하니 이런 저런 예전 기억들이 앞다투어 솟아났다. 생각도 많고 할 말도 많고 잠자리도 불편해서 어찌 이 밤을 보내나 싶었는데, 언제 잠이 폭 들고 말았는지 아침을 맞은 캐빈의 승객들이 웅성웅성 복도를 나다니는 덕에야 눈을 겨우 뜰 수 있었다. 일어나 보니 머리마다 까치집을 지은 양이 영락없는 노숙자들 꼴일세. ㅋㅋ

 

이불을 개고(?) 짐을 대충 꾸려 다시 갑판으로 나선다.

 

아, 저 섬이 바로 크레타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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