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 쯤 같은 신문에 실린 한비야님의 남부 수단 사태에 대한 글을 읽고 한동안 우울 모드였던 기억이 난다. 어제 실린 아랫 기사는 우리 부부에게 '과연 행복이란 무엇인지',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이 세상에 얼마나 훌륭한 분들이 많은지' 등에 대해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다. 신부님이 항상 건강하시기를, 그래서 언젠가 톤즈에서 직접 뵈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남수단서 사랑의 의술 피는 이태석 신부


△ 사진 이종근 기자

전쟁·질병·하루 죽 한끼‥
죽음 가까워도 생명은 피고

로마의 살레시오 신학대학교 졸업을 앞둔 여름 방학때였다. 아프리카 선교를 꿈꾸던 이태석(43) 신부는 케냐의 나이로비로 답사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나이로비는 유럽 도시의 축소판이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아프리카의 아픔과 상처’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실망했다. 그때 30여년간 남수단에서 활동해온 제임스 신부를 만났다. 그는 이 신부에게 남수단을 권했다. 나이로비에서 2800km 떨어진 곳이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하는 것이 나에게 하는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사람이 저렇게도 가난할 수 있구나, 저렇게 죽음 가까이서도 살 수 있구나….“

45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잘 해야 하루에 수수 죽 1끼만 먹는 사람들, 여기저기 깔린 지뢰에 팔다리가 날라간 사람들, 간단한 열병이나 맹장염에도 죽어가는 아이들. 10여일간 지프를 달려 도착한 남수단 톤즈에서 그는 보았다.

수단은 22년째 내전중이다. 정권은 북쪽의 아랍계가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수단의 2/3를 차지하고 있다. 수단의 원주민들은 제 고향에서 쫓겨나 척박한 남쪽으로 이주해야 했다. 그런데 거기에 석유가 잔뜩 매장돼 있을 줄이야. 북수단은 원주민을 남수단에서마저 내쫓으려 했다. 이에 맞서 남쪽 주민들도 무장했다. 이른바 ‘반군’이다. 미국은 남수단에 매장돼 있는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북수단 정부를 지원했다. 남수단을 쉽게 먹어치울 것으로 기대했다. 북수단은 남수단 사람들을 아예 말려 죽일 생각으로 남부 지역을 철통같이 봉쇄했다. 남쪽 사람들은 북쪽에서 옷가지 하나 반입할 수 없다. 모든 물자는 남쪽으로 2800km 떨어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육로로만 들여올 수 있다.

그러나 내전은 장기화됐다. 세계 여론도 나빠졌다. 그러자 미국은 최근 남북 수단의 평화회담을 중재하는 양의 탈을 뒤집어 썼다. 내전은 2년째 소강상태다. 그러나 북수단은 회담을 진행하면서, 다른 한편에선 야금야금 남부에 대한 인종청소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3300만 주민 가운데 200만여명이 죽었다. 300만여명이 제 고향에서 쫓겨났다. 20여만명이 국경을 넘었다.

“너무 불공평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저들이 왜 저토록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는 건지. 영양 상태만 좋으면 쉽게 이길 수 있는 말라리아나 홍역으로 죽어가고, 배앓이로 죽고, 지뢰를 밟아 죽고, 총 맞아 비명횡사합니다. 아이들이 열병에 걸려 신음하면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마당에 물을 뿌려놓고 열이 내리길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지난 3월엔 홍역이 돌았다. 감염된 아이들의 20%가 사망했다. 5살 이하 아이들은 거의 모두 감염됐다고 한다.

의대 졸업후 사제의 길로‥로마 유학중 수단 참상 목격
하루 200명 환자 보살피며 아이들 음악교사·밴드도 운영
“해주는 것보다 받는 행복 커”


△  남수단 톤즈의 아이들과 함께 폼 잡은 이 신부. 수원교구 제공

이 신부는 로마로 돌아와 본부에 톤즈를 선교지로 신청했다. 소속도 서울에서 아프리카 관구로 옮겼다. 그곳에 뼈를 묻을 작정이었다. 그곳엔 이미 제임스 신부와 피터 신부, 그리고 수녀 3명이 원주민과 함께 살고 있었다. 2001년 서울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뒤 곧 톤즈로 날아갔다. 그에게는 간호 수녀 2명과 함께 진료소가 맡겨졌다.

늦깍이 신부인 그는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의대에서 인턴과정까지 밟았다. 어릴 적부터 사제가 되기를 꿈꿨다. 그러나 성직자 혹은 수도자로 형과 누나를 보내며 어머니가 마음 아파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의대(인제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군의관 생활을 마찬 그는 결국 91년 살레시오 수도회에 들어갔다. 92년 광주 살레시오 신학대를 거쳐 로마 살레시오 대학에서 성직자 수업을 받았다.

톤즈엔 하루 200여명의 환자가 찾아오는 진료소가 있고, 나환자 병동이 따로 있다. 전쟁고아와 기숙학생 등 150여명이 함께 생활하는 기숙사, 800여명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가 있다. 그는 이곳 이외에 1주일에 한번씩 넓디넓은 관할 구역 오지마을을 찾아다니며 이동진료를 한다. 그가 찾아가는 날은 마을의 모든 주민이 모이는 날이 되었다. 아파서 모이고, 심심해서 모이고, 구경하고 싶어 모인다. 물론 아이들이 가장 많다.

아이들은 그가 나타나면 ‘쫄리, 쫄리’라고 연호하며 몰려든다. 세례명 요한(존)에 성 이(리)씨를 합쳐 그들의 발음으로 부른 애칭이다. 그는 아이들의 우상이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톤즈의 아이들은 낮 2-3시면 어김없이 그의 진료소로 몰려온다. 거기서 아이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논다. 때론 다함께 음악극도 한다.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았지만 밴드도 운영한다. 피리 오르간 드럼 베이스 기타 등 갖출 것은 갖췄다. 그는 아이들에게 음악선생이다. 악기와 노래를 가르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아이들이 부를 노래를 만드는 것도 그의 몫이다.

그가 지은 가스펠송 ‘꼼보니’는 이제 톤즈의 시민가요가 되었다. “즐거운 노래, 찬미의 노래를 다함께 불러요. 꼼보니는 평화의 사도, 꼼보니는 아프리카의 아버지, 고통을 즐거움으로 승화시켰네….” 아이들 2-3백명이 몰려와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는 모습은, 전쟁터 속의 한 작은 낙원을 구현한다. 평화회담에 맞춰 ‘평화를 이루려면 다함께 손을 잡아야 한다’는 내용의 <너에게 평화를 주리라>도 작곡했다.

“나환자 병동에 레지나라는 환자가 있습니다. 손가락 발가락이 다 떨어져 나간 말기환자입니다. 가진 거라곤 저주받은 병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항상 행복합니다. 작은 것에 고마워하고, 항상 즐겁게 삽니다. 다른 환자들과 잘 어울리고, 그들을 보살피려 합니다. 레지나에게서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내가 그들에게 해주는 것보다 그들이 내게 돌려주는 행복과 가르침이 더 큽니다.”

아프리카의 아득한 황무지에 붉디붉은 노을이 깔리면, 그의 하루도 저문다. 저녁기도 시간이다. 아주 멀고 험한 곳에 가 있는 아홉번째 자식을 위해 기도하고 계실 어머니와 가족, 따듯했던 교회 식구와 친구들을 생각하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처럼 그 자신이 좀 더 겸손해지기를 간구한다. 노을이 땅거미로 바뀔 때까지, 오로지 신만이 이룰 수 있는 하늘의 평화가 가난과 전쟁과 죽음의 땅 수단에 깃들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목마르다’고 하신 예수의 모습을 떠올리며 목마름의 묵상을 한다. 사는 것 자체가 목 마르고 배고픈 톤즈 사람들이 거기에 있다. sdbgiolee@inmarsat.oci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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