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작년 우리는 휴가를 가지 못했다. 그래서 2004년, 올해만큼은 휴가를 꼭 가야한다고 맘 단디먹고 있었다. 생업이 있는 만큼 올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장기간은 용써야 한 달 정도. 그래도 어디 사회 생활을 하는 일반 성인들이 한 달 씩이나 휴가를 갖기가 뭐 쉬운가? 나는 그 선에서 엄청난 만족을 느꼈다.

 

한 달이라는 주어진 기간 아래 내가 세운 계획은

  • 베트남 하노이 in - 캄보디아/라오스/미얀마 - 태국 - 서말레이지아 - 동말레이지아 코타키나발루 out

이었다. 물론 말레이지아 본토에서 싱가폴을 거쳐 인도네시아에서 out 하고 싶은 욕심이 더 컸지만, 그러기엔 이미 부족하다 싶은 기간에의 압박이 나를 눌러왔다. 그래서 이래저래 조율을 해 보다가 결국 싱가폴과 인도네시아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그렇게 정해 놓은 게 올해 초, 1월 정초부터 계획 세우기에 여념이 없었던 시절의 야그다. 그러나 2월, 전문의 시험이 끝나고 합격자 발표가 나고 우리 동네에도 하나 둘씩 'OOO 의원 개원 예정' 현수막이 팔랑팔랑 나부끼기 시작하면서 오빠의 정신적 스트레스가 언어로 화하여 나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봐라, 의사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이런 군 단위 지역에도 전문의들이 밀고 들어온다, 앞으로 점점 어두워지기만할 의료계의 현실이 두렵지도 않느냐 블라블라블라...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우리는 조만간 은퇴를 할 예정이다. 예상 시기는 2008년 초 즈음. 만 4년 정도 남은 셈이다. 그렇담 경쟁이 보다 덜 할때 열심히 도토리를 모아 두어야 하는 수 밖에 없다. 베짱이처럼 놀 거 다 챙겨 놀다간 나중에 후회한단 소리다. 쩝, 그렇다면 얼마나 시간을 줄래? 뭐? 토요일, 일요일 끼고 3박 4일?

 

아악~~~~

 

나의 한 줄기 절규에 오빠는 과감히 하루를 더 썼다. 그래, 그럼 토요일, 일요일 끼고 4박 5일...

 

4박 5일이라... 나는 편도 4시간 정도의 비행으로 발이 땅에 닿을만한 따뜻한 섬나라들을 손꼽아 헤아려 본다.

  • 사이판 / 로타 / 티니안
  • 필리핀 세부 / 팔라완 / 보라카이
  • 일본 오키나와

그러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가 본 나라들이라 영 흥이 나지 않는다. 상기 목록을 오빠 코 앞으로 쓰-윽 들이미니 저녁에 출발해서 되도록 꽉채우고 오는 일정으로, 게다가 직항으로 알아 보란다. 대신 다른 때보다 좋은 데서 재워 주겠단다. 그래? 그럼 로타 지우고, 티니안 지우고, 팔라완, 보라카이 다 지우고... 그러고 있는데 내 하는 양을 가만히 들여다 보던 오빠가 슬며시 세부가 맘에 든단다. 세부라... 난 한 번 놀다온 곳인디... 시꺼! 찍-

 

세부섬에 대한 모든 자료를 무섭게 섭렵하기 시작한다. 이런 건 안 시켜도 허벌나게 잘 한다. 예전 여행 당시 기억을 떠 올리며 가감삭제 해서 쏴악~ 정리한다. 세부에서 머무를 고급 리조트 몇 개를 간추려 낸다. 사족으로 우리는 카페트 깔리고 층층으로 이루어진 호텔형을 싫어한다. 후줄그레한 방갈로라도 단독 빌라형이 우리에겐 딱이다.

그러고 보니 마리바고 블루워터는 예전에 내가 머물렀던 곳이다. 그럼 지워야지. 오빠에게 두 리조트를 정리하여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오빠, 물끄러미 보더니 둘 다 싫단다. 풀크라는 일본아그들이 많아 싫고, 바디안은 공항에서부터 멀어서 싫단다. 아~ 어쩌란 말이냐... 투덜투덜...

 

그러던 중 갑자기 해결책이 눈에 띈다. 세부 옆에 위치한 보홀섬. 그 곳에도 고급 리조트가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엔 보홀을 뒤진다. 그것도 싹싹. 그리고 그 중에 팡라오 리조트를 골라낸다. http://www.panglaoresort.com 오빠, 어때? 팡라오 리조트 4박 5일 일정을 살펴보던 오빠에게서 회심의 미소가 피어난다. 그래, 이걸로 하자. 어라, 한국 지사 비스끄리무리한 것도 있네. 그 곳을 비롯, 몇 군데 여행사에 문의를 넣어 본다. 하루 이틀 기다리자 여러 곳에서 우리가 원하는 일정이 가능은 한데 아직 너무 이르니 5~6월경 연락을 다시 달란다. 그래, 그러지 뭐. 2004년 여름 휴가는 필리핀 보홀의 팡라오 리조트 자꾸지 안에서 보내게 되겠구나.

 

팡라오로 마음을 정하고 들뜬 마음으로 일주일 정도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펴든 신문에서 팔라우에 5~6월간 한시적으로 직항이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접한다. http://www.palaumore.com 럴수럴수이럴수가, 팔라우 직항이라니! 이번에는 팔라우를 한바탕 들었다 놓는다. 휘익~ 쿵! (들어올려졌던 팔라우가 떨어지는 소리) 게 중 가장 매력적인 것은 바로 무인도 캠핑 투어. 오빠와 나, 2인으로만 무인도에 내려놓는 일정으로 꾸려줄 수 있는지 문의한다. 둘만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 한 가운데 뿌려진 한 무인도에 남아 낚시도 하고, 스노클링이랑 다이빙도 하고, 밤에는 모닥불 피워 낮에 잡아올린 이름 모를 생선 구워먹고, 별보며 노래하다 파도 소리 들으며 텐트에서 퍼질러 자는 것이다. 햐~ 환상적이다. 다시 기다림의 시간. 며칠이 지나 답변을 받는다. 헉! 1인당 200만원 정도 들 것 같단다. 헐~ 장난하냐.

 

잠시 외도를 하긴 했지만 조강지처, 다시 본처인 필리핀 세부 옆 보홀섬 팡라오 리조트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미 삐질대로 삐진 그녀는 갑자기 세부-보홀간 경비행기 운항 중단이라는 이혼 서류를 들이민다. 대신 1시간 30분 가량 배를 타고 들어가란 야그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야, 내 미안하다 하질 않았느냐... 야멸찬 그녀는 그렇게 복수의 칼날을 내게 들이밀고 떠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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