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카고르카(Gorkha 혹은 구르카 Gurkha라고도 함)를 논하기에 앞서 네팔의 역사를 잠깐 들여다보도록 하자.

 

4∼5세기 리츠차비 왕조, 10∼18세기 말라 왕조의 지배 아래 이끌어지던 네팔은 1769년, ‘프리트비 나라얀 샤(Prithvi Narayan Shah)’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점령을 당하게 된다. 프리트비 나라얀 샤는 카트만두, 파탄, 바드가온으로 나뉘어져 있던 말라 왕국을 정복하여 카트만두를 네팔의 수도로 정하고, 네팔을 통일된 강력한 독립 국가이자 근대 국가로 건설하는데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이후 티벳 고원에서부터 히말라야 산맥 계곡의 상당 부분과 북인도의 타라이, 쿠마온, 가르왈, 심라, 시킴 지방에 이르기까지 점령하여 현재에 비해 거의 두 배나 되는 큰 영토를 다스렸던지라 가히 네팔의 광개토대왕이라 할 수 있다.

 

그 ‘프리트비 나라얀 샤’가 바로 고르카 왕국의 왕족이었으며, 그가 네팔 정복을 위해 여러 종족을 모아 만들어 이끌었던 군대가 바로 용맹하기로 이름난 고르카군(軍)이다. 하지만 히말라야 산맥이 바라다 보이는 이 네팔 중부의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조상 대대로 유전되어왔을 용감무쌍함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아무리 봐도 얼굴 한 가득 미소를 담은 채 고르카군이 사용하던 무시무시한 칼을 파는 행위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으니…

 

다시 역사로 돌아가볼까?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위대한 왕이 사망한 뒤에는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네팔 역시 1775년, 프리트비 나라얀 샤가 사망한 후로 1951년까지의 근 200년 간은 왕족과 몇 귀족 가문들 간의 끊이지 않는 분쟁 시기였다. 1846년부터 네팔을 지배하게 된 귀족 가문은 영국을 등에 업은 ‘라나’ 가문이었는데 1950년, 트리부반 왕과 동맹을 맺은 네팔 의회당(Nepali Congress Party ; NCP)이 이끄는 반(反)라나 혁명군의 혁명을 계기로 결국 1951년에 라나 가문이 무너지고 다시 왕정으로 복귀하게 된다(현재 네팔의 정식 이름은 Kingdom of Nepal).

 

그러나 오래간만에 권력을 되찾은 왕에게 민주주의적 전통이나 경험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1959년, 왕이 헌법을 승인한 후 치룬 총선을 통해 NCP를 창설한 ‘코이랄라’가 총리에 취임하게 되지만, 예정된 수순처럼 이번에는 총리와 왕 사이의 반목이 심해지면서 결국 1960년, 왕은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정당을 불법화하였으며 마침내 헌법까지 폐기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얻은 왕의 권력은 역시나 20년을 채 못 가서 체제 위기에 직면하게 되고, 이에 왕은 의원 직선제를 통한 정치 제도의 자유화라는 당근을 던져본다. 하지만 이에 만족할 수 없었던 좌파 세력은 ‘1990년 봉기’로 왕을 굴복시키고 같은 해 11월 입헌군주제와 양원제, 복수 정당제를 골자로 하는 신헌법을 제정하도록 이끌었다. 더불어 언론의 자유까지. 불과 10여 년 전의 일이다.

 

이미 다른 나라에 비하면 현저하게 늦은 민주화라고 할 수 있다. 고르카그러나 아직도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문제.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는 다수당이 없어 1999년, NCP가 다시 과반수를 넘는 의석을 차지하여 집권 여당으로 등극하기까지 9년 만에 8번의 단명 연립 내각이 떴다 사라지는 진통을 겪었다. 그러니 이런 생난리 통에 국민들의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닐 수 없다. 이미 1996년 초부터 왕정 타도와 인민 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그 존재를 드러낸 Maoist들(모택동주의 반군)이 그 단적인 예가 된다. 

 

앞서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요즘 Maoist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이들은 현재 무장한 채 정부군과 대치 중이며 신문에 종종 그들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저지른 살인이, 혹은 정부군이 그들을 대상으로 저지른 살인(보통 ‘진압’이나 ‘소탕’ 등으로 표현되지만)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곤 한다. 카트만두 외곽을 드나들 때마다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엄중하게 행해지는 검문, 검색도 Maoist나 그들의 동조 세력을 찾아내기 위한 이유에서이다. 아무리 기후도 적절하지 않은 때라지만, 이래서는 안전에 민감한 관광객들이 찾아 들리 만무하다(지난 달에는 불과 8,000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네팔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으로 비수기의 네팔 방문이 세 번째인 오빠 말로도 게 중 이런 비수기가 없었다고 한다. 정치적 불안이 그대로 다시 경제난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악순환이다. 게다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일 인도로 떠나기에 앞서 마지막 네팔 구경에 나섰다. 내리쬐는 햇볕이 너무 뜨거워 며칠 전, 순식간에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피하고자 포카라 시내에서 구입한 우산을 양산인 척 들고 나선 것까지는 좋았는데, 잠시 들른 식당 앞에서 우산을 접다가 그만 완전 분해되고 말았다. 역시 싸구려가 문제야, 몇 번 들지도 않았는데… 투덜거리며 식사 후 그냥 자리에 버려두고 산 꼭대기에 위치한 왕궁으로 발길을 옮기려는데 길가에서 오빠가 뭘 발견했는지 서둘러 식당으로 돌아가잔다. 그리고는 아까 우리가 앉았던 자리를 두리번거리더니 오빠가 식당 주인에게 묻는다.
“여기 두고 간 우산 못 보셨어요?”

주인은 벌써 식당 안 내실(內室)로 옮겨 고이 모셔둔 우산을 머쓱한 표정으로 들고 나온다. 아니, 저 박살 난 우산을 어디에 쓰려고… 오빠 손에 끌려 우리가 간 곳은 놀랍게도 우산을 고쳐주는 작은 가게였다.

 

작은 가게지만 큰 형은 신발, 둘째와 셋째는 우산에 있어 못 고치는 물건이 없나 보다. 그야말로 빨간 우산, 하얀 우산, 찢어진 우산에 이르기까지 우산의 용도를 다하지 못하는 우산들이 살은 살대로, 천은 천대로 분리되어 빼꼭이 들어서 있다. 우기라서인지 삼형제의 작은 가게는 우리를 포함, 우산을 고치러 온 4명의 손님들로 꽉 들어차고, 우리는 구석에 서서 그들의 장인다운 손놀림에 빠져든다.
“우리나라에서는 망가지면 그냥 버리고 다시 새 것을 사고 말잖아. 여기에서는 다들 고쳐 쓰나 봐. 그래서 식당에서 얼른 우산을 챙겼었나 보지?”
이런 나의 말에 이어지는 오빠의 아빠 조의 요즘의 한국 세태 비난에 대해서는 생략하련다.

 

형체를 알 수 없도록 더 분해가 되었다가 완전 새 제품으로 변신한 우산을 들고 뿌듯한 마음으로 다시 길을 나서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길 반대편에서 우리를 발견한 숙소 직원이 손짓으로 우리를 불러댄다.
“지금 어디 가셔요?”
“왕궁에 올라갔다 오려구요.”
“안 되어요. 요즘 고르카는 오후 7시 30분 이후부터 통금 이어요. 위험하다구요.”
통금이라니! 티벳에서 들어올 때부터 거쳤던 수많은 검문, 검색에도, 밤 9시 이후 카트만두의 타멜 거리에 총을 든 군인이 등장해도, 나가르코트의 군인들이 실전 훈련을 받고 있어도, 포카라 한국 식당이 Maoist들에게 영업 금지 압력을 받았다 해도 실제적으로 느끼지 못했던 그들의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

 

최근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전제 정치에 시달려 온 네팔의 민주화는 생각보다도 훨씬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오늘 한나절에 고친 우산처럼 그렇게 뚝딱, 뜯어 고칠 수는 없는 것일까?

 

Tip

교통 : 포카라 - 고르카 / Local bus / 4시간 / 1인당 80루피 / 포카라 버스 정류장(Bus Park)에서 오전 7시, 오전 9시 25분, 오후 12시 30분에 걸쳐 1일 3회 운행 / 예매 가능(굳이 할 필요는 없는 것 같고 당일 조금 일찍 서두르면 문제 없을 듯)

* 고르카로 가는 직행 버스를 못 구했을 경우에는 카트만두행(카트만두에서는 포카라행) 버스를 타고 Abu Khaireni에서 내려 local minibus를 이용하면 된다. 우리의 경우 포카라에서 Abu Khaireni까지 2시간 30분이 걸렸고, Abu Khaireni에서 고르카까지는 1시간 30분이 걸렸다

숙박 : Hotel Gorkha Bisauni / 고르카 터미널에서 온 방향으로 200~300m 가량 내려가다 길 왼편에 자리잡은 숙소 / 천장의 fan과 개인 욕실이 딸린 더블룸이 흥정 끝에 200루피(호텔이라 수건과 비누가 딸려 나온다) / 호텔 내 레스토랑에서는 네팔의 다른 좋은 레스토랑과 마찬가지로 12%의 세금이 붙는다

* 김 원장은 이 호텔 앞에 서고서야 고르카가 예전에 여행했던 장소임을 알았다. 그 당시에는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왔었던 모양 ^^; (그 때에도 이 숙소에서 묵었었단다)

* 덧붙여 현지인들은 5~10루피 정도면 우산을 고치는 것 같았는데 우리는 45루피(우리 돈 750원이 좀 안 됨)나, 그러나 기꺼이 지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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