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에서 그랜드 캐년으로 달리던 중 하늘이 한껏 흐려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계획해온 여정중 마지막 국립공원 방문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내 공덕이 약간 부족했구나. 보통 나와 같은 시계 방향으로 돌아 그랜드 캐년을 마지막 방문지로 삼은 여행자들 대부분이 앞서 방문했던 국립공원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개년이 캐년이 그 캐년같다, 그랜드 캐년에 실망했다, 캐년랜즈가 낫다 등등 후기를 읽은터라 큰 기대는 안 하고 왔다만, 그래도 East Rim으로 진입해 그랜드 캐년 빌리지로 들어가는 마당에 East Rim의 뷰포인트들을 하나도 안 보고 들어가기에는(그렇다. 우린 우산도 없었다) 영 찝찝한지라... 심혈을 기울여 두 개만 골랐다. 하나는 Desert View Watchtower, 다른 하나는 Grand View Point. 


그나마 데저트 뷰 워치타워 뷰포인트에서는 빗줄기가 가늘어져 그나마 사진이 나왔지만,

아쉽게도 그랜드 뷰 포인트는 눈으로 찍는 게 훨씬 낫지, 똑딱이 사진기 렌즈는 따라오지를 못 할 정도의 운무로 가득했다. 





설상가상이라고 해야하나, 지금껏 만난 국립공원 매표소(?) 직원 중 가장 친절했던 쪼글쪼글 할머니는 우리 국적을 묻더니 원더풀! 하고 한국어로 된 신문 같은 걸 주셔서 오오, 이런 걸 다 구비해놓다니, 하고 잠시 감격했는데, 그 때 짐작을 했어야했다. 그만큼 여기 그랜드 캐년에 한국인들도 많이 온다는 것을. 


내가 미국 숙소들을 예약하면서 국립공원 내에서 잘까 말까 갈등했던 세 곳이 있는데, 요세미티, 자이언 캐년, 그리고 그랜드 캐년이 그 곳이다. 앞선 두 곳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내적 갈등 끝에 공원 근처 마을에서 자기로 했지만, 그랜드 캐년의 브라이트 앤젤 롯지가 그랜드 캐년이 잘 보이는, 바로 그 뷰포인트 절벽 위에 있다는 글을 읽고는, 여기는 아무 생각없이 바로 그냥 팍 질렀다. 어머 이건 사야돼, 심정으로. 

그런데 바로 그 놈의 훌륭한 입지 덕에, 이 숙소 주차장이 전세계 패키지팀 버스가 끊임없이 드나드는 용도로도 쓰이고, 이 숙소 로비가 구경나온 그들로 북적이며, 이 숙소의 앞마당이 그들로 점령된다는 것까지는 몰랐다. 짧은 영어와 다른 때에 비해 부족했던 준비 시간이 죄라면 죄. 하여간 우리가 숙소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쯤이었는데, 로비에 들어갔다가 완전 깜짝 놀랐다. 여기가 한국이야 어디야. 나중에 알고보니 공교롭게도 주차장에 서 있던 버스 두 대 모두 한국 패키지팀의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나선 뒤로 처음 만나는 한국인들의 행렬에 잠시 당황하고, 국립공원내 숙소답게(?) 체크인 시각인 오후 4시에 오세요라는 말을 들어 또 황당하고(지금까지 내내 일찍 도착했지만 시간 맞춰 오세요라는 말을 들은건 요세미티 이후 처음이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한국말에 김원장은 빨리 어디로든 자리를 옮기고 싶어했는데, 비도 흩뿌리는 이 마당에 어디로 가야하나 1분 23초 정도 생각하다가 빌리지내 수퍼격인 Market Plaza가 생각나 그리로 차를 몰았다(아니, 몰라고 시켰다 ㅋㅋ). 거기까지 가는 동안 김원장은 내내 저런 패키지라면 돈 받고도 안할거라는 둥 그동안 패키지로 보내드린 양가 부모님들이 얼마나 불편하셨겠냐는 둥 뭐라뭐라 혼자 흥분해서 오버하더라.   


마켓 플라자내 식당에서 주문한 닭고기 수프와 칠리 핫도그. 역시 미국에선 햄버거를 먹어야 한다는 교훈을 준 식사.


체크인은 한국인팀이 사라지고 프랑스팀이 그 자리를 메꾼 3시 30분쯤 했다(그나마 카드키 머신이 고장났다나 뭐라나 일단 직원이 문을 열어줄테니 들어가 쉬다가 이따 적당한 시간에 프론트로 전화를 걸어 카드키 머신이 고쳐졌다고 하면 그 때 키를 가지러오라나 뭐라나 하여간 나를 셤에 들게하는 고난이도의 영어 클래스를 통과한 끝에). 비가 와서 그런지/지대가 높아서 그런지/11월 이 맘때 기온이 원래 그런지 몰라도 제법 쌀쌀했고, 그래서 히터를 켰는데 낡은 히터에서 나는 소리가 김원장 심기를 살짝 거스르는 듯 보였고, 숙소 앞 마당에 앉아 일몰에 물드는 그랜드 캐년을 바라보며 맥주 한 캔 하려고 했던 내 오래된 계획이 무너지게 되어 나도 나대로 아쉬웠고... 뭐 그런 날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우리끼리 셀프 마무리를 했느냐... 


쿨하게 다음에 다시 오기로 ㅋㅋㅋ 

그리고 그 때는 공원 밖 남쪽 마을 투사얀의 민간업체가 운영하는 새삥 숙소에서 자기로 ㅋㅋㅋ  


하여간 결국 히터는 끄고 잤고, 그 때문인지 김원장은 다음날 아침에 춥다고 일어나기 싫다고 했고, 나 혼자 일출이라도 볼테야, 하고 씩씩하게 나갔는데 간밤에 비는 그친 모양이지만 힝, 아직도 흐려. 그것도 몹시 흐려. 삼각대 들고 중무장하고 나온 청년 하나 달랑. 너도 나처럼 헛걸음했구나. 걔 앞에서 방에서 타들고 나온 커피만 한 잔 홀짝 마시고 메모리만 잡아먹는 의미+영혼 없는 셔터질 몇 번 하다 컴백홈.


밍기적거리다 오전 9시쯤, 게으른 보람(?)이 있었는지 극적으로 해가 들길래, 김원장과 Yavapai point 까지 가벼운 트레일을 하기로. 








이건 뭐...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그랜드"했다. 아이맥스 저리가라. 미국에선 이 정도는 되야 그랜드를 붙이는구나. 













까마귀 찬조출연 



이제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랜드 캐년을 떠날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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