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결국 와디럼의 일출도 나만의 몫이었다. 김원장은 텐트 안에 아무렇게나 깔아놓은 매트리스 위에서 담요 덮고 자는 동안, 나는 체코 커플과 함께 캠프 뒤 얕은 언덕에 올라 일출을 맞이했다.

 

어제 체코 커플이 우리보고 lovely couple이라며(얘들도 우리만큼이나 영어가 짧은지라 일명 한 쌍의 바퀴벌레라 불리는 우리에게 저런 극찬을 ^^) 러시아로 향해 올라가다가 체코에 꼭 들러 자기네 집에 놀러오라 초대하더라. 이들은 결혼한지 4년차로 프라하와 브르노 사이 중간 마을인 이흘라바(Jihlava)에 살고 있는데, 주변으로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곳이 세군데나 있어 당일치기 여행하기에 매우 편리한 마을인데다가 내가 체코 맥주 감브리너스 왕팬이라고 하니까 맥주하면 또 자기네 마을을 빼놓을 수 없다며 열라 꼬셔대더라고(마음 약해지기시리 ^^;).

 

아닌게 아니라 중동을 여행하면서 이 땅에 사는 친절한 사람들을 많이도 만났지만, 이렇게 같은 여행자 신분으로 잠시 스쳐지나가면서 우리에게 진지하게 초대를 해온 이들 또한 처음인지라(게다가 솔직히 걔네야말로 lovely couple이었다. 선남선녀에 성격은 또 어찌나 순한지) 화악~ 그 제안에 끌려들었다. 하지만 사실 처음부터 이번 여행 일정을 짤 때 너무 빡빡하게 짜온지라, 지부티와 수단을 건너뛰고도 앞으로도 제껴질 나라가 꽤나 있을 것 같은데 거기에 계획에도 없었던 체코를 가려면 아무래도 무리지 싶다. 그러나 망설이는 우리를 눈치 채고 얼른 “러시아랑 체코랑 안 멀어”를 외치는 그들을 어찌 매몰차게 뿌리칠 수 있으랴. 일단 챙겨온 예쁜 자기 마을 엽서에 적어주는 이메일과 전화번호, 주소를 챙겨두긴 했으나 정말 그들을 만나러 이흘라바를 찾아가 이들과 체코 맥주(!)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는 아마도 시간이 더 흘러봐야 확실해지겠지(갈 곳은 많아도 오라는 곳은 없고 ^^;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거니까).


<이 안에 김원장 있다>

 

우리 셋이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열심히 일출을 기다렸건만(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꿈나라), 지단 캠프 뒤의 언덕에서 바라보는 태양은 사막의 지평선에서 둥실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커다랗고 거친 바위산 위로 떠오를 모양인지 생각했던 그림이 안 나온다. 결국 원하던 멋진 사진을 못 건지고 텐트로 돌아와 여태 누에고치마냥 이불 속에 파묻혀있는 김원장한테 이런저런 상황을 보고하니 내 그럴 줄 알았다나 ㅋ

 

아침을 먹고 오늘 아침 와디럼을 떠날 일행이 다시 꾸려진다. 어제 우리와 함께 했던, 일명 오줌싸개 스페인팀은 오늘 캠프에 하루 더 머물며 하이킹을 하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고(독일팀이 주변 하이킹이 무지 멋지다며 꼬셨다는 소문), 대신 그 자리를 낙타팀인 미국+캐나다인이 차지했다. 지단 아저씨는 우리 일곱을 다시 태우고 와디럼 마을을 향해 신나게 질주한다. 어제는 꼬불꼬불 사막을 달리며 하루종일 포인트들을 들러 구경을 했는데, 오늘처럼 사막을 가로 질러 엉덩이 얼얼하도록 마을까지 달려오니 캠프에서 마을까지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아카바로 향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는 반대 방향 암만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와디럼에서 암만으로 가는 교통편이 좋지 못하다며 지단은 일단 우리에게 아카바로 갔다가 암만으로 다시 갈 것을 권한다. 이거야, 원. 다시 예상치 못했던 아카바로 가게 생겼네. 게다가 여기서 아카바까지는 1시간도 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인데도 지단이 마련해 준 세르비스 택시는 1인당 5디나르를 내라고 한다. 참나, 5시간을 넘게 타도 5디나르 남짓이요, 3시간을 타도 5디나르요, 2시간을 타도 5디나르요, 1시간을 안 타도 5디나르라니.

 

다시 아카바로 돌아와 지난 1박 2일을 함께 했던 네덜란드 남성, 체코 커플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끝까지 체코에 꼭 놀러오라고 신신당부를 하던 ^^) 우리는 그 길로 곧장 다시 암만행. 이번엔 김원장이 승합차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지라 담배 연기에서 해방인가 싶었으나 웬걸, 운전사 아저씨가 체인 스모커였다. -_-; 다시 김원장은 씨발씨발하면서 암만까지 와야했으니 ^^;

 

그렇게 5시간을 너구리굴에서 보내고 난 김원장, 암만에 도착,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한 마디 일갈을 지른다.

“내 다시는 버스 안 탄다”

그럼 앞으로 어쩌려고? -_-;

 

택시를 타고 며칠 전 묵었던 바 있던 팰리스 호텔에 찾아와 다시 짐을 풀었다. 김원장은 샤워를 하자마자 머리가 아픈지 침대에 드러누워 뻗는다. 그렇게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온 몸에 흡혈충의 공격을 받았네. 그 침대에 뭔가 사는게다. 이래저래 김원장의 수난 시대다.

 

상태가 좋지 않은 김원장을 끌고 근처 PC방에 들러 이스라엘과 레바논 정국을 살펴본다.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이지만, 레바논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 현재 다시 내전이 벌어지고 시리아 다마스커스에서 레바논으로 들어가는 국경도 폭탄 테러위협 때문에 닫혔다고 한다. 이래서는 이스라엘도 레바논도 모두 포기해야 할 것 같다(상황이 이렇다면 레바논에서 다녀오려고 마음먹었던 사이프러스까지 덩달아 안녕이네). 슬쩍 김원장 앞 모니터를 보니 프랑스 파리에서 푸조 리스를 하여 터키까지 여행하는 것으로 마음이 더 쏠린 모양인지 푸조 리스에 관한 정보가 가득 띄워져 있다. 아무래도 이 동네에 대한 애정이 예전보다 식은 모양이다. ^^; 그런 김원장에게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지금 이스라엘도 레바논도 여행하기 적당치 못한 것 같다 이야기를 건네니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 선뜻 그럼 일단 내일 시리아로 가자고 한다.

 

숙소로 돌아와 시리아로 가는 차편에 대해 물으니 마침 내일 시리아 다마스커스행 세르비스 택시가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가격도 국제버스와 동일한 1인당 10디나르라니 오히려 편하고 빠르게 갈 수 있는 셈이다(버스를 안 타고 싶다는 김원장의 요구에도 부응할 뿐더러 ㅋㅋ). 오케이. 우리 둘도 내일 다마스커스행에 추가요~ 

 

이렇게 내일 시리아로 넘어간다. 이스라엘과 레바논을 포기했지만, 고로 일정에서 예루살렘과 발벡이 날아가 버렸지만, 적어도 현재로서 느끼는 아쉬움은 없다. 원한다면 나중에 다시 올 기회를 만들 수 있겠지. 기왕이면 그 때, 내 다시 이 곳을 방문했을 때,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 답답해져오는 팔레스타인 문제나 레바논 내전 문제 모두 다 잘 해결되어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저러나 오늘은 내가 살신성인의 자세로 아까 김원장이 잤던 흡혈충 침대에서 자던지, 아니면 좁지만 내 침대에서 모로 누워 둘이 같이 자던지 해야겠다. 나름 좀 산다는 요르단 암만에서마저 웬 흡혈충이람(참, 내가 그 이야기를 했었나? 중동의 숙소가 보유한 2인용 방에는 대부분 트윈 침대가 있다. 더블 베드 보기는 하늘의 별 따기. 처음엔 더블 베드가 없어서 다소 아쉬웠는데, 이 동네 침대 매트리스가 종종 가운데가 푸~욱 꺼져있음을 알게 된 이후로는 오히려 트윈 베드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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