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럼 증명사진도 찍었으니 허드슨 피크를 향해 가볼까?  

 

 

처음에는 평탄하다 말할만한 고원지대를 걷게 된다. 바닥에는 가축들 똥이 많고 땅굴을 뚫어 생활하는 짐승의 흔적이 널렸다. 이후 폴의 손가락 끝을 따라 그 짐승이 뭔지를 발견했는데, 티벳이나 파키스탄에서 봤던 마멋(Marmot)처럼 생겼다. 그래, 여기가 너희들이 사는 곳이지. 지대는 높고 보통은 척박해보여 뭔가가 살고 있을까 싶은 곳이면 여지없이 나타나는 너희들. 폴의 설명에 의하면 이들은 마멋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흔히 우리가 말하는 마멋보다는 몸집이 작으며(미니어쳐 마멋) 자기들은 스노우 랫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준다. Snow rat 이라.. 그 또한 맘에 드는 이름이다. 아프리카에서 무슨 눈 타령이냐고? 주변을 둘러보면 듣던대로 레소토의 고원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들 머리마다 하얀 눈이 보이는 걸? 2년 전 동아프리카에 다녀왔을 때도 사람들은 무지 더웠겠다, 라고 반응했기에 부연 설명을 해야했는데, 레소토라는 다소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는 얼음이 얼고 눈이 쌓여있다고 이야기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라나?  

 

<스노우 랫 마을>

 

이후 야트막한 언덕을, 그러나 힘겹게 - 벌써 산소가 희박한 것일까? - 잠시 오르면 드디어 우리가 오늘 오를 허드슨 피크의 모습이 보인다. 아니, 그런데 저게 허드슨 피크란 말인가?

  

 

나는 오른쪽의 다소 완만해 보이는 커다른 봉우리가 허드슨 피크인 줄 알았더니 폴은 왼쪽의 뾰족한 봉우리가 허드슨 피크라고 알려준다. 엥? 그럼 지금 우리가 저 뾰족한 봉우리를 올라간다는 소리야? 올라가기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쩝.

 

 

 

사진 상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오른쪽 커다란 봉우리에는 자연이 만들어 낸 작은 구멍이 나 있는데, 왼편의 작은 허드슨 봉우리를 악어의 코로 보고 그 구멍을 악어의 눈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정말이지 커다란 악어 한 마리가 레소토 고원지대에 떡~하니 누워있는 것처럼 그럴싸하게 보인다.

 

<뉴질랜드에 이은 또 한 번의 반지의 제왕 배경. 말을 타고 달리면 끝내줄 것 같다>

 

<허드슨 피크와 그 주변의 산이 연이어 빚어내는 커다란 라운드가 산 아래에서 보면 거대한 U자 모양의 컵처럼 보인다고 해서 Giant cup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려진다고 한다. 바로 거기에서 Giant cup trail이라는 트레킹 코스가 나왔으며 말 그대로 산 아래에서 이 곳까지 걸어올라오는 코스를 말한다>

 

 

<허드슨 피크 아래 Giant cup변에 머리가 닿은 김원장>

 

 

 

고도가 있어서인지 다리가 무겁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언덕에서는 몇 발짝만 걸어도 숨이 차올라온다. 게다가 대기 역시 무척이나 건조하기 때문에 - 남아프리카에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아랫동네서부터 입술이 갈라지던 터라 사니 패스 입구 언더버그 수퍼에서 립밤을 하나 사둔 터였다 - 물 역시 많이 마시게 된다.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지그재그 폴의 꽁무니를 따라 허드슨 피크 바로 아래 언덕까지 오르니, 와, 장쾌하게 펼쳐지는 봉우리 반대편 모습에 할 말을 잃고 만다.

 

"꼭대기에 올라가면 360도로 펼쳐지는 멋진 장관을 볼 수 있어" 

 

힘을 북돋는 폴의 한 마디. 그래 힘내자, 힘!

 

 

 

 

봉우리를 향한 마지막은 급한 경사로 언뜻 봐서는 올라서는 길이 보이지를 않는다. 내 짧은 다리로 한 번에 올라서기 힘든 구간도 있고, 길 폭도 몹시 좁기 때문에 겁이 많은 나로서는 좀 무서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 짧은 구간만 지나면, 어느새 오르는 내내 나의 시선이 향해있던 악어의 코 끝에 성큼 다가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정상까지 이제 겨우 몇 걸음>

 

그리고 드디어 정상!(3,256m) 사진이 실제보다 훨씬 못 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허드슨 피크에서 바라보는 전경을 함께 즐겨보자(이렇게밖에 사진을 못 찍어온 스스로를 한참 탓했음 -_- 날씨는 폴이 몇 번이나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우리를 향해 행운이라고 할 만큼 좋았는데도). 개인적으로는 올라오면서 남아공 측의 모습을 내내 즐겼으므로 정상에서 바라보는 레소토 측의 전경을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남아공 측의 전경이 훨씬 멋졌다. 물론 레소토 측도 만만치 않게 장관이긴 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이 경험이 이번 여행의 최고일거라는 확신이 재차 든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곳 중 하나에서 먹는 점심>

 

살짝 미끄러질 뻔 했지만 그래도 내려가는 길은 역시나 올라가는 길에 비하면 껌이다. 올라갈 때 만났던 양떼와 목동들(서로 신기해하는 -_-;), 그리고 주인이 분명 있겠지만 자기네들끼리 어울려 밥을 찾아 먹고 있는 말들을 다시 만난다. 

 

 

이쯤에서 예민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김원장이 두통을 호소한다. 마일드한 고산병이 아닐까 싶은데.. 어쨌든 우리 앞에 남겨진 길은 이제 내리막길이므로 일단 타이레놀 먹고 견뎌 보기로 한다. 폴의 커다란 가방에는 비상약도 들어있는지 혹 우리 약이 모자라면 자기 약까지 주겠다며 걱정해 준다. 폴의 계획으로는 돌아가는 길에 살짝 다른 루트로 틀어 멋진 경관을 더 보고 갈 거였다는데 김원장이 힘들면 올라왔던 길로 빨리 곧장 내려가겠다고도 한다. 무슨 말씀, 당연 그 멋지다는 루트로 가야지.

 

<그리하여 그 루트로 접어든 우리. 뭔가를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폴>

 

폴이 말하길, 최근 남아공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바에 의하면 전국민의 48%가 에이즈 양성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애들 빼고 노인 빼고, 그리고 이 숫자가 '공식'적 임을 고려해보면 비공식적으로는 성인의 거의 대부분이 에이즈 환자라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단다. 게다가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그 숫자 역시 증가 추세에 있다고 한다. 남아공은 다른 아프리카에 비해 좀 나을까 싶었는데 폴의 말대로라면 전혀 아닌 듯 싶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프리카 전역이 어느 순간 엄청난 인구의 감소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폴 역시 엄청난 문제라고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지만,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까? 

 

 

 

 

 

 

폴의 안내로 목동들이 임시로 사용하는 거처를 찾아갔다. 방목철에는 몇 개월씩 이 곳에 머물며 양을 친다고 한다. 세상 어디나 그렇듯이 이 임시 거처 역시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모아 만든 집이었다. 얼기설기지었지만 추위를 막아줄 수 있는, 불을 지켜줄 수 있는 홈.

 

 

입구는 무척 작고, 들어가보니 당연 그냥 흙바닥 뿐이지만 불 피운 흔적을 찾아볼 수있다. 아무리 일 년에 몇 개월만(!) 지낼 집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좀 쫙 펴고 누울 수 있게 좀 만들 것이지. 그렇게 구부리고 밤새 자면 아침에 무진장 찌뿌둥할 것만 같이 작게도 만들었다. 하긴 이런 곳에서 거의 혼자의 힘으로 이런 돌집을 만들어 올리는 것도 절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집 안에서 그들이 외로이 보냈을 몇 달간의 깜깜한 밤을 생각하니 가슴 한 편이 저려온다. 이런 곳에서의 이런 삶을 두고 무공해 밤하늘의 별이 참으로 아름답네, 양들이 평화롭게 노니네, 목가적이고 낭만적이네 어쩌구는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표현일 것이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나같은 여행자에게나 이 세상에 다시 없을 절대 비경일 뿐, 매일같이 보는 풍경이 뭐 그리 색다르고 아름다울까. 더구나 말이 그렇지, 그림 속 풍경 같은 곳에서 사는게 그림처럼 아름답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런 풍경 속에서 사는 사람들 중 내게 "이 곳 정말 근사하죠?"라고 말을 건네오던 사람들은 모두 관광객을 상대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앞서 밝혔지만 레소토인들의 특징적인 패션이라면 바로 저런 담요 패션이다. 아마도 날이 추워서 저렇게 둘러 싸고 다니는 것이라 짐작은 가지만, 만나는 사람들 모두 담요를 하나씩 두르고 있으니 스타워즈에 나오는 어느 작은 행성에 떨어진 것 같기도 하다. 더불어 왼편의 목동이 신고 있는 하얀색 장화(이 곳에선 보통 gum boots라고 부른다) 역시 이 지역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지만 많이들 신고 있다.

 

이들은 앞서 만났던 수줍음 많은 다른 목동들과는 달리(그리고 그들은 폴과 그들의 언어로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했다. 폴이 내게도 인삿말 몇 개를 알려줬는데 남성과 여성에게 하는 인사가 각기 달라서 헤맸다는) 우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걸었다.

 

"Give me some sweets" -_-;

 

이럴 때 이들에게 뭔가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들 하지만, 그 이론보다 이들과 어떻게든 접촉해보고 싶은 나의 욕망이 앞섰다. 게다가 나의 가방 속에는 점심 도시락이었던 샌드위치 중 배가 불러와 전혀 손 안 댄 놈과 맛있어 보여 나중에 아껴 먹으려고 남겨둔 파운드 케�이 있었다(숙소에서 미리 주문을 받아 원하는 종류의 샌드위치와 사과, 주스, 파운드 케�을 넣은 도시락을 만들어 준다). 얼른 가방을 열어 그들에게 모두 나눠 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내 손에서 그것들을 건네받은 그들이 저렇게 등 돌려 사라지고 나서야 아, 몇 마디 더 나누어 볼 것을, 하고 후회했다.  

 

 

김원장의 두통은 약을 복용한 뒤 좀 나아지는 듯 보였으나 시간이 흐르자 다시 치고 올라오는 듯하다. 뭐니뭐니해도 고산병에는 고도를 낮추는 것이 특효. 워낙은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 온 뒤 바로 옆 <사니 탑 샬레 펍>에서 차라도 한 잔 하고 내려오는 일정이었으나 우리는 서둘러 하산하기로 한다. 

 

시간을 계산해보니 일정표 상에 소개한대로 점심 시간 및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 총 4시간 가량 걸은 것 같다(이 중 오르는데 2시간 반 정도 소요되었다). 나름 그래도 잘 걷는다고 생각했는데 4시간 가량 걸린 것으로 미루어보아 본인 체력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좀 더 시간 여유를 두고 계산하여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내리막길 운전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 폴의 눈빛>

 

김원장이 아파서인지 내려가는 길인데도 올라오던 길 마냥 한참이다. 어쩌면 길이 너무 험하여 올라오던 길이나 내려가는 길이나 차의 속도가 거의 같았을런지도 모른다. 차는 계속 덜커덩거리는데 김원장은 점점 더 힘들어한다. 하지만 지구는 도는 것을 잊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결국 우리는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다(김원장은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누워 뻗어버렸다. 1시간 정도 낮잠을 자더니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부활했다는 ^^; 고산병이 맞나보다). 이제 숙소 앞 마당에 서서 바라보는 남부 드라켄스버그 산맥의 길다란 모습에서 허드슨 피크를 얼른 찾아낸다. 그렇게 바라보는 허드슨 피크의 모습이 예전과 같지 않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고 하지 않더냐.

 

# 사니 패스의 숙소

 

만약 이 멋진 사니 패스에서 묵고 싶다면? 다음 사이트에서 본인의 지갑 사정에 맞는 곳을 골라볼 수 있다. http://www.wheretostay.co.za/kzn/dr/accommodation/sani-pass.php

 

사니 패스를 오르기 전, 우리가 묵었던 <사니 롯지>와도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급 숙소인 <사니 패스 호텔>에서는 골프장 건설에 한창이더만.. 부지도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이상 특별한 매력점을 찾지 못한 곳이고, http://www.sanipasshotel.co.za/

 

오히려 사니 패스 꼭대기, 즉 사니 탑에 위치한 <사니 탑 샬레>라면 한 번쯤 자보고 싶다.

http://www.sanitopchalet.co.za/index.htm

 

사진상으로는 샬레라 하기엔 너무 특징없어 보이는 심플한 외관을 지니고 있지만, 건물 너머 그래도 샬레라 칭할만한 그럴싸한 건물들이 숨어있는데다가 뭐니뭐니해도 들어앉은 위치 하나만큼은 끝내주니까.

 

<오른편의 울타리가 사니 탑 샬레의 야외 커피샵인데 'The highest pub in Africa'로 유명하다>

 

다른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원래 우리의 허드슨 피크 일정에도 트레킹 후 이 곳에서 차 한 잔 마시며 풍경을 즐기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우리의 경우 김원장의 두통으로 인해 잠시 샬레 구경만 하고 얼른 내려왔다(이 곳에서 스키 역시 가능한지 스키 장비가 많았다. 이런 곳에서 타는 스키라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듯. 그렇다, 아프리카에서 스키를 탈 수 있다 ^^). 한국에서 알아봤을 때는 숙소의 가격이 상당한 것 같아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 와서보니 또한 이 곳까지 차를 끌고 올라오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 막상 입구에 붙어있던 가격표는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공식가보다 저렴하여 짠순이 나에게도 매력적인 가격이었다. 혹 이 곳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미리 contact하여 좋은 가격을 받아 가는 게 유리할 성 싶다. 덧붙여 이 곳은 4륜 구동으로 올라와야 하지만, 우리가 모든 일정을 마치고 차를 타고 내려갈 때즈음, 놀랍게도 우리와 같은 숙소의 캠핑장에 묵었던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여기까지 올라왔다(안 그래도 그 추운 날 밤, 혼자 유일하게 캠핑장에 1인용 텐트를 치고 자던 아저씨라 머릿속에 확 박힌 터였다 -_-;) 오늘 아침, 라운지에서 페치카 앞에 같이 앉아 있던 나름 인연이라 할 수 있는 사이인데, 내가 하이킹을 하는 동안 그는 내내 저 자전거를 타고 그 길을 영차영차 올라왔나보다. 불거진 다리 근육만큼이나 배도 상당히 나왔두만.. 인간 승리라고 할 밖에.

 

이마저 부담스럽다면 좀 더 저렴한 옵션이 있다. 출입국 관리소 같지 않은 관리소 뒤로 작은 마을들이 보이는데, 이 곳에 배낭여행자를 위한 숙소(말 그대로 backpackers) 팻말이 걸려있다.  

 

 

 <배낭여행자용 숙소가 이 중 하나겠지 -_-; >

 

우리가 차를 타고 오르는 동안, 어제 폴의 차를 타고 이 곳까지 올라와 여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사니 패스를 걸어 내려오는 여행자 둘을 만났다. 단언컨데 그런 식의 조합 여행도 분명 멋질 것이다.

 

# 가계부

 

1. 허드슨 피크 데이 투어 : 280R X 2(인) + 폴에게 팁 50R (너무 친절해서 안 줄 수 없었다) = 610R

2. 숙소 : 420R (기분도 째지는데 어제 잤던 좋은 방에서 일박 더 하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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