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률, 그 모순
 
 
한 사람의 죽음이 이처럼 한국사회를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에 관한 집단적인 사색에 빠뜨린 적이 있었던가. 삼성그룹 총수의 막내딸은 자살을 택함으로써 다분히 철학적인 수수께끼를 던졌다. 생계수단을 잃은 가난한 가장, 비리수사로 명예를 잃은 고위공무원의 죽음과는 달리 일반적인 인과율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삶의 수수께끼를 던진 것이다.
 

죽음에 이른 직접적인 동기가 무엇으로 밝혀지든, 분명한 것 하나는 가족 내에 의사소통의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이해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여류 시인 실비아 플라스가 자살한 뒤 그의 친구였던 알프레드 알바레즈는 <자살의 연구>라는 책을 내면서 자살은 “치명적으로 불발된 ‘도와달라’는 외침”이라고 말했다. 굶주림처럼 외로움도 치명적일 수 있다. 또한 평탄한 길을 걸어온 사람은 작은 돌부리에도 넘어져 크게 다칠 수 있다.

 

단 하나의 일자리가 없어서 일가족이 거리로 나앉는 경우가 적지 않고, ‘펀드’만 있으면 ‘런칭’할 아이디어를 가진 채 속절없이 늙어가는 사람이 대한민국 성인남자의 절반이다. 그런데 “이건희의 딸로 태어나서 무엇이 아쉬워서? 무엇이 부족해서?”라고 사람들은 묻고 싶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부족’이 부족했던 것 아닐까. 결핍은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며 열등감이 성취욕을 자극한다. 그래서 결핍의 교육효과라는 것도 있다.

 

체감고통 일정의 법칙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사는 모양은 천차만별이지만 각기 피부로 느끼는 고통의 총량은 대개 엇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은 행운에 금세 익숙해지고 또한 불운에도 금세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낙관주의심리학, 긍정심리학을 유행시킨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무수한 사례연구들을 통해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해고나 승진 같은 중대한 사건도 석 달만 지나면 행복도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평균적으로 부자는 가난한 사람보다 조금 더 행복할 뿐이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지난 50년 간 실질소득은 급증했지만 생활만족도는 그대로다. 그는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22명을 연구했는데, 그들은 복권에 당첨된 뒤 더없이 행복했지만 대개 시간이 지나면서 이전의 행복도로 되돌아갔다. 만성우울증이었던 한 이혼녀는 200억원짜리 복권을 탄 뒤 백화점 점원을 때려치우고 침실 18개짜리 대저택에 최고급 승용차를 구입했지만 1년도 채 가기 전에 다시 만성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양귀자의 소설 <모순>은 바로 그런 얘기다. 쌍둥이 자매의 한쪽은 무능한 술주정뱅이 남편 대신 새벽부터 밤까지 생활전선에서 악다구니 치는 반면 다른 쪽은 대저택의 안주인으로 우아하고 세련되게 살지만 ‘무덤 속 같은 평온’에 지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핀란드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웨덴 같은 유럽의 잘 사는 나라들이 전통적으로 자살률이 높으며 아시아나 아프리카 저개발국들의 자살률이 낮은 것도 모순이다. 한국은 지난해 그 전통적인 자살강국들을 제치고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자살률 1위가 됐다. 자살률이 1982년 10만명당 6.8명에서 2004년 24.2명으로 늘어났다. 보상의 차별이 자본주의의 동력이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나가서, 빈부격차가 과도해서, 지나치게 ‘약 올리는 사회’가 돼서, 구성원들을 세상 바깥으로 내모는 것, 그것이 지금의 한국사회다. 한쪽에선 결핍이 지나쳐서 죽고 다른 쪽에선 결핍이 결핍돼서 죽는다.

 

한국은 지난 20년 동안 경제규모가 크게 팽창했지만 자살률 역시 3.5배나 늘었다. 점점 부자가 돼가는데, 게다가 사상 최고의 자유를 누리는데, 왜 점점 불행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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