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요리도 안 하면서(못 하면서?) 좁은 주방을 탓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깔끔하지 못한 성격 덕에 그나마 있는 접이식 식탁은 온갖 잡다한 물건을 내팽겨쳐두는 선반으로 이용하고, 평소 집에서 뭔가를 먹을 때에는 작은 찻상을 들고 침대 위에 둘이 기어 올라가 TV를 보며 먹었다. 그러다보니 <으레 먹는 장소 = 침대 위>였고, 침대보는 하루가 멀다하고 김칫물이 벌겋게 들기 일쑤였으며 심지어 개미가 종종 기어다니는 운동장이 되기도 했다. 또한 침대는 김원장이 몇 번씩 TV와의 무기한 절교를 선언할 때를 제외하곤, 훌륭한 소파가 되어주기도 했다. 먹다 자고 보다 자고...

 

여행에서 돌아와 우편물 함을 열어 보니 밀린 고지서 외에 찢어진 종이에 급히 휘갈긴 핸드폰 번호와 다음과 같은 짧은 문장이 쓰여져 있었다. "집 주인입니다. 이 글을 읽는 대로 연락 바랍니다." 집 주인? 전세 만기가 다가오니 나가란 소리인가?

 

수화기를 통해 구구절절 한참을 돌고돌아 집 주인이 힘들게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파악해 보니,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집의 전세가(a)가 주변에 비해 낮으니 돌아오는 만기를 기해 얼마간의 돈(b)을 더 지불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으흠, 안 그래도 요즘 들어 벽에 금이 가고, 베란다 천장에서 비가 오고, 현관문은 진작에 망가졌고, 욕조가 내려 앉아 물이 새고, 호수를 나타내는 푯말도 떨어져 우리 집은 호수도 없는, 그냥 3호와 5호 사이의 집이며, 변기도 급수통 내의 줄이 닳아 끊어지는 등 노후로 인한 문제들이 하나씩 하나씩 심기를 불편케 하고 있던 차였는데 돈까지 올려 달라?

 

나는 심각하게 '이사'를 고려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우리는 벌써 근 1년이 넘도록 근방의 괜찮은 전원주택을 찾아다니던 차였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물건은 주인이 맘을 바꾸기 일쑤였고, 주인이 매달리는 물건에는 단점이 훨씬 더 많았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새 아파트"로 가자!

 

알아보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서 걸어서 갈 만한 거리에는 최근에 지어진 아파트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가장 빨리 입주할 수 있는 아파트 단지로는 6개월 뒤, 그리고 1년 뒤, 이렇게 두 번에 걸쳐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면 좀 떨어져 있어도 요즘 입주하고 있는 아파트를 찾아보자, 하고 뒤져보니 차로 15분 거리에 새로이 조성되어 막 입주가 시작된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지도를 봐가며 도착한 그 곳은 새 아파트 단지답게 모든 게 다 휘황찬란하도록 달랐다. 게다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평수(c)와는 달리 단지 내 최소 평형(d)조차 우리에겐 너무나 운동장스러웠다. 현관문에 붙어 있는 디지털 도어락부터가 범상치 않더니 고급스러운 체리 브라운의 원목 자재로 마감한 인테리어, 자전거도 들어간다는 전실, 세 개의 방, 시원한 거실, 두 개의 화장실, 큼지막하고 전망 좋은 베란다, 넓고 깨끗한 주방, 여기에 김치냉장고와 식기세척기도 빌트인이라고요? 눈이 다 핑핑 돌아갔다.

 

집 구경을 신나게 하고 돌아온 우리는 장단점 분석과 여러가지 옵션에 대해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선 우리가 꼽은 새 아파트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1. '새' 집이다. 처음 살아보는 '새'집인 것이다. 새집증후군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 진짜 번쩍번쩍하더라.

2. 베란다 전망이 좋다. 바로 앞의 산을 마주보고 있는 동이라 전원주택 분위기가 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운치가 있을 것 같다. 

3. TV를 작은 방에 몰아 넣고, 뭔가 다른 생산적인 활동을 할 기회를 찾을 수 있다.

4. 식탁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 주방도 넓어서 어수선한 나에겐 큰 도움이 된다. 더불어 이제 시댁에서 김치를 왕창 가져다 김치 냉장고에 저장해 놓고 오래오래 먹을 수 있다.

5. 욕실에 비데를 설치할 수 있다. 오랜기간 필요하다 생각하던 것 중 하나이다.

6. 김원장의 야간 산책에 좋을 깨끗한 천변이 멀지 않다. 김원장은 저녁 식사후 혼자서 1시간 이상 동네 산책을 하는데 현재 살고 있는 동네는 산책하기엔 좀 시끄럽고 차가 많이 다닌다.

 

그런데 단점도 만만치 않았다.

 

1. 현재 집보다 직장과 더 멀리 떨어져 있다. 고속도로로 10분 + 일반 도로로 최소 5분 = 최소 15분씩, 왕복으로 매일 30분 이상을 길에 버려야 한다. 게다가 고속도로로 달리면 사고 위험에의 노출 빈도가 더 커진다.

2. 추가 비용(e)이 많이 든다. 새 집이거니와 전세로 나와 있는 평수(f)가 거진 두 배에 달하기 때문에 돈을 깔고 자야한다. 돈 방석도 아니고...

3. 문명의 편리함에 익숙해진다. 주거 공간이 편리할수록 그만큼 잃는 것도 많아지게 된다. 만약 크고 좋은 집에 살게 된다면 조만간 우리는 빈대나 벼룩이 나오고 침대 매트리스의 스프링이 허리를 찌르는 침대에서는 자지 못할 것이며, 뜨거운 물을 틀었는데 녹슨 찬물이 쫄쫄 흘러나오는 세면대에서 세수도 못할 것이고, 바닥에 얼마나 쌓여있는지 모르는, 도무지 숨을 쉴 수 없는 중국식 화장실에서 용변도 보지 못할 것이다(쓰고 보니 주로 여행 나가서 겪게되는 일들이다 -_-; 어쨌든 이역만리 타국에서 편안하고 쾌적한 집을 그 자체로 그리워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뿐인가? 축축한 베란다는 기분을 나쁘게 만들 것이고, 시어 꼬부라진 김치는 훽~하니 갈등 없이 쓰레기통에 버려 버리겠지.

 

우리는 이 중 3번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고자하는 방향에 대해서, 우리가 삶에 대해 공유하고 있는 가치관에 대해서, 우리의 지나온 경험에 대해서... 물론 잠시 이 3번 사항이 "장을 못 담그게 하는 일종의 구더기"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건 사실이지만, 결국 우리는 새 집으로 이사를 안 가기로 했다. 비록 현재 우리가 사는 집이 낡고 덥고 작긴 하지만 좀 더 살아 보기로(현재에 만족하는 방법을 찾기로? 사실 우리 집은 "우리 집"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금까지 우리에게 어디에서든 되돌아올 공간이자, 따뜻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충분히 존재해 왔다), 그리고도 정 마음에 안 들면 6개월 뒤 근방에 새로 생기는 아파트로 이사 가기로, 그 동안 전원주택이나 더 열심히 알아보기로...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먹은 순간, 돈을 올려 줄거냐며 귀신 같이 집 주인 아저씨가 재차 확인 전화를 하셨다. 예, 올려 드릴께요.

 

그래도... 새 집은 다분히 매력적이더라. 나도 여자이고 아줌마였던 것일까??? 그러나... 지금 다시 바라보게 되는 우리 집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더없이 포근한 공간임에 틀림없다. 나는 이 공간을 아끼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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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a. 3,000만원

b. 300만원

c. 19평

d. 31평

e. 4,000만원(그 집의 전세가는 자그마치 7,000만원이었다. 하긴 이렇게 쓰니까 좀 이상하긴 하다. 내가 살아온 서울에 비하면 엄청 저렴한 가격이다)

f. 34평(이 평수는 우리 시댁보다도, 우리 아주버님댁보다도 더 큰 평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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