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아파트 단지 입구의 작은 상가에 최근 속옷 가게가 없어지고 김밥 가게가 생겨 바로 앞의 다른 김밥집을 우울하게 만들더니, 얼마 전 (구)속옷 가게 바로 왼편 비디오 가게가 문을 닫는 듯 하더니 며칠 만에 뚝딱뚝딱 아이스크림 가게가 들어섰다. 오오, 아이스크림 전문점이라니...

 

물론 베스킨어쩌구라거나, 하겐저쩌구 류의 그런 아이스크림 가게는 아니다. 그냥 이런저런 온갖 종류의 'OO콘'이나 'OO바' 등의 아이스크림을 커다란 아이스크림용 냉동고 몇 대에 잔뜩 넣어두고 전품목 모두 40% 할인된 가격으로 제공해 주는, 그런 아이스크림 가게가 생긴 것이다. 간판 하나 제대로 달리지 않은.

 

썩 아이스크림을 밝히진 않는 편이라,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한 두 밤 뒤, 나의 관심을 끄는 사건이 벌어졌다. 본래 (구)속옷 가게의 오른편에는 1층에 편의점, 지하에 미니수퍼가 있었다. 이 두 가게 역시 다른 물건들과 더불어 당연히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이 두 가게에 각각 다음과 같은 핸드메이드 대자보가 붙어있었다.

 

<24시간 아이스크림 전품목 40% 할인>

<지하 1층 아이스크림 전품목 50% 할인>

 

오라, 이젠 아이스크림이 판매가 안 될테니 남아있는 재고는 같은 가격에 다 팔아버리고 아이스크림 부문은 접겠다. 이거지?

 

소비자는 이럴 때 가만히 앉아 님도 보고 뽕도 따는 격이 된다. 나는 그저 이 세 가게의 싸움(?) 아닌 싸움을 삼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바라보고 쓰윽~ 지나쳤다.

 

그리고 또 다음날, 나는 100m 가량 떨어진, 근방 최대(?)의 수퍼마켓에 들렀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수퍼 역시, <아이스크림 전품목 40% 할인>이라는 안내문을 붙이고 있었던 것. 그때서야 나는 이 근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일한 할인 전략에 뭔가가 숨어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아, 나머지 업체들이 일종의 담합을 한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저쪽 건너편 수퍼 역시 가보지 않아도 세일 중이겠구나, 하고 짐작을 한다.

 

그리고 또 어제, 편의점 앞을 지나다가 그 <40>이란 숫자 위에 <50>이란 숫자가 덧붙여진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윗 가게랑 아랫 가게가 주인이 엄연히 다른데도 글씨체가 똑같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즈음에서 슬쩍 새로 생긴 아이스크림 가게 안을 들여다 보니, 개업 첫날, 화려한 풍선 세레모니 속에 아이들이 바글바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두 섯의 아이들만이 이곳저곳 냉동고를 쑤셔대고 있을 뿐이다. 이런 이런...

 

아마도 이 새로 생긴 아이스크림 가게 주인 아저씨가 개업 전에 근방 경쟁업체 주인들에게 미리 인사(?)를 안 드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언질을 미리 줬다 하더라도, 요즘 같은 세상에 제 살 깎아먹기식 출혈 경쟁은 너나할 것 없이 회피하고 싶어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발업체는 도전장을 던진 것이고, 선발업체들은 힘을 모아(?) 이 건방진(겁없는?) 후발업체의 퇴출 방법을 논의했을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뒤의 숨은 사연을 내 어찌 다 알 수 있겠냐만은, 그 가게들 앞을 지나면서 서로 내 건 40, 50% 할인 경쟁 표어를 보는 내 마음은 그다지 편하질 못하다. 어디, 비단 아이스크림에만 국한되어 있을까, 어쩌면 자본주의 세상의 모든 업체들이, (단시간) 독점이 아닌 이상에는 (결국) 경쟁체제에 돌입하게 되어 있는 것을. 나는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이 피 말리는 경쟁을 가까이에서 그저 안타깝게 들여다 보고 있을 뿐이다.  

 

오늘 아침 샤워를 하다 문득, 내가 저 고립된 신설 아이스크림 가게의 주인이라면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나가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 고개 숙이고 타협을? 날 죽이자고 달려드는 사람들과?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상존한 경쟁업체 중 가장 자금력이 딸려 보이는 업체 하나를 고른다.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을 다 동원하여 그 집 아이스크림만 집중적으로 모두 구매한다. 결국 손해를 보다 못한 주인이 이 출혈경쟁에서 빠질 것을 선언한다. 그리고 하나 둘씩 자연 와해를 기다린다.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이길 확률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음, 그럴싸한 전략 같다.

 

그러나 만약 그, 내가 선정한 업체를 돕기 위해 다른 모든 가게들이 팔을 걷는다면??? 하나가 빠져나가더라도 나머지들은 굳건하다면? 음... 그럼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하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또 샤워가 늦어진다. 오늘도 지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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