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대로라면 오후 1시 30분 타이페이 발 비행편에 탑승해야 했으므로 시간 넉넉히 잡고 여유있게 숙소를 나섰다.

숙소에서부터 우아하게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까지 갈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공항<->시내간 책정 요금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우리는 숙소 근처 MRT역을 이용, MRT를 타고 타이페이 메인 스테이션까지 간 뒤, 근처의 Taipei West Bus Station Termianal A로 도보 이동하여, 처음 타이페이에 도착했을 때 이용했던 국광버스를 타고 공항까지 가기로(=간단히 말해서 저렴한 방법을 이용하기로) 했다.  

 

<MRT의 Taipei Main Station역에서 하차하여 Z3 출구로 나가면 바로 오른편이 공항행 국광버스를 탈 수 있는 터미널(Taipei West Bus Station Termianal A)이다. MRT역과 지하도로 연결되어 있다>

참, 숙소에서 MRT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던 중, 중산역 바로 못 미쳐 할머님 한 분이 문 앞에 서있던 김원장에게

 

- 여기가 중산역이유?

 

라고 물어왔다고 한다. 김원장 끄덕끄덕. 그리고 할머님 무사히 하차 성공. 오호, 대만을 떠날 때가 되니 이제 중국어가 들리나봐? ㅎㅎ

 

어두운 지하도를 벗어나 터미널 앞에 다다르니 우리를 발견한 택시 아저씨가 공항까지 두 당 150원이었나, 하여간 경쟁력있는 가격을 외치며 열심히 호객을 해오신다. 우리 둘만 탄다면 모를까, 분명 꽉꽉 채울텐데... 언제 그 인원을 다 채울지도 모르고... 라는 생각이 들어 가비얍게 제끼고 터미널 내 카운터로 가 바로 출발하는 국광버스 티켓 구입(역시나 편도 125원/인)했다. 이 곳 직원도 우리 기준으로는 조금 퉁명스러운 편(다른 건 몰라도 여행을 다니다보니 외국인이 처음/마지막으로 접하게 되는 접점에 놓인 사람들만큼은 좀 친절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왼쪽은 시내 들어올 때, 오른쪽은 공항으로 갈 때 구입했던 표>

 

딱히 좌석 구분이 없어 아무데나 자리 잡고 앉으니 내 건너편으로 나홀로 한국 여성 한 분이 앉아계신게 눈에 들어온다. 차가 떠나기 전, 막간을 이용하여 주변 풍경 그림을 그려대시는데... 저주받은 손을 가진 내게는 정녕 놀라운 실력이군. 미대생인가.

 

버스는 열심히 달려 지난번과는 역순으로 공항 터미널 1에 먼저 서고(여기서 내 건너편 한국 여성이 하차한다. 대만 항공을 이용하는걸까) 다음에 우리가 이용할 터미널 2에 선다. 보통 공항 버스를 타면 출국장에 내려주지 않나? 여기는 입국장(?) 한 구석에다 차를 세우고 승객들을 내리게 하네. 본토미 물씬 풍기는 -_-; 세련되지 않은 서비스에 대해 잠시 김원장과 이야기를 나눠본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출국장으로 이동, 해당 카운터를 찾아가니 한국인으로 보이는 직원 한 분이 정신없는 얼굴로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계신다. 뭔 일 났나? 심드렁하게 비즈니스 카운터로 고개를 돌리는데 거기에 덩그러니 붙어있는 A4 용지 한 장! 항공기 maintenance 문제로 우리가 이용할 항공편이 3시간 연기된다는 청천벽력같은 문구가 씌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어머나 세상에 럴수럴수이럴수가.

수속을 담당하는 언니가 라운지 이용권을(http://www.taoyuan-airport.com/english/facilityDetail_e.jsp?cnid=1224&facid=88) 주면서 일단 여기서 식사하시고 뭐 어쩌구 저쩌구 죄송하고 또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아, 이거 와방 짜증이다. 아시다시피 내가 너무나 일정을 꽉 채워왔기 때문에 -_-; 이렇게 되면 서울역에서 대전 내려가는 KTX도 과연 제대로 탈 수 있을지 의문이고...(김원장은 거기에 더해 몇 시간 연기가 더 되도 좋으니 오늘 안에만 어떻게든 뜨라고, 만에 하나 언급했던 3시간 뒤에 또 다시 미뤄지기라도 하면, 그래서 오늘 아예 비행편이 취소라도 되면, 내일 근무가 빵구가 나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까봐 더욱 전전긍긍이었다) 

물론 비행기를 타다보면 이런 일이야 가끔 겪는 일이긴 한데(김원장의 걱정처럼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다 겨우 탑승했는데 탑승하고 나서도 30분 넘게 대기시키다가 끝내 못 뜬다며 다시 내리라고 하질 않나, 결국 하룻밤 자고 다음날 출발 ㅎㅎ 한 적도 있고) 오늘처럼 이 비행기가 다름 아닌 "귀국행" 비행기로, 현재 일 봐주시는 선생님은 내일 하루 더 시간이 절대 안 되시고, 김원장이 당장 내일 오전 8시부터 근무를 해야하는 상황일 때는 특히 김원장에게만 ㅋ(나는야 직원이라네)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이다.

 

하여간 항공편 딜레이의 충격에서 채 못 벗어나고 있는데 그 때, 로밍해 온 휴대폰에서 띠리링, 문자가 왔다.

아시아나 6/21 타이페이->인천 항공기 연결로 13:30->16:30 출발 변경되었습니다.

아니 항공기 연결 드립은 또 뭔가. 이 항공편은 인천<->타이페이 왕복편 아니던가. 어디서 오는 항공편과 연결한다는거야 대체. 시간상으로 볼 때 지금 한국에서 대만을 향해 떠야하는데, 그래서 여기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태우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줘야 하는건데, 처음 안내문대로 기체 이상이 생겨 못 뜬 건 아닌가, 아니, 뭐 이유야 다 좋아, 문자를 보내려면 좀 빨리 보내주던지 공항에서 수속까지 다 했구만 이제야 보내면 뭐해, 숙소에서 나오기 전에 보내줘야지. 아니야, 막 뜨려다 기체 이상이 이제서야 발견되었으니 지금 보낼 수 밖에 없었겠지, 대만이 아닌 유럽 왕복 노선이었다면 비행 시간이 길테니 이 시간에 보내는 문자도 나름 유용했겠네, 등등 이런 저런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마구 오가는데, 김원장은 김원장대로 이럴 경우 항공기 결항으로까지 이어질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검색부터 해보고 싶다네. 그래서 일단 라운지로 들어가 인터넷부터 해보기로.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게 검색될리가 ㅎ (그런데 은근 아시아나가 이런 일 생겼을 때 제대로 된 대처를 못하는지 불평불만글이 많더라고)

 

대만의 라운지답게 군고구마가 넘쳐나는 라운지에서 잠시 뒹굴뒹굴하다가 문득, 아, 아시아나에 다른 항공편이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아, 싶어 얼른 뛰어나가 안내 데스크를 찾아가 혹 그 항공편 좌석에 여유가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비수기 평일인데 정말 우리 둘을 위한 고 두 좌석이 없을까 다소 의심스러웠지만... 기다리고 기다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만석이라니 별 수 있나(어쩌면 우리가 이번에 마일리지를 이용한 승객으로 이미 태국에서 한 번 일정을 바꾼 적이 있으니 좌석이 있어도 안 되는 걸런지도...)

 

여하튼 시간은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이미 라운지 밖으로 나선 뒤이므로, 혹시나 가져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쓰게 될지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비장의 PP카드를 이용할 순간이 왔다. 두번째 라운지 입장(http://www.taoyuan-airport.com/english/facilityDetail_e.jsp?cnid=1224&facid=184). 이 곳에서 시간을 확인해가며 인터넷으로 인천 공항 사이트에 들어가 우리가 타고 가야할 비행기가 과연 한국을 떠났는지 조회해 보니 늦어서 그렇지 다행히도 이제 뜨긴 떴구나. 이대로라면 처음 언급했던 3시간 딜레이로 충분할 듯 싶다. 안절부절하던 김원장에게 그 소식을 전하니 김원장도 한시름 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에 맞춰 서울역에서 잠깐 만나야 하는 엄마와도 약속을 재조정하고.

여기는 전 라운지와 달리 일본제 메이지 아이스크림이 몇 종류 구비되어 있길래 녹차 아이스크림을 골라 들었는데, 엇, 이 녹차 아이스크림은 한국에서 내가 즐겨먹는 배스킨라빈스 녹차맛과 딴판일세. 아이써라. 뭐 하여간 이래서 의도하지 않은 3시간 동안 두 곳의 라운지를 방문하고 나름 열심히 이것저것 먹어주고 공항 면세구역도 끝에서 끝까지 샅샅이 돌아다니게 되었다(여보, 다리 아프니 제발 그만 좀 싸돌아다녀요).   

 

공항내 서점 베스트셀러들을 훑어보다 깜짝. 씨앤블루, 빅뱅, 슈퍼주니어, 성균관스캔들, 이 모델들 다 한국인 맞는거지?

 

그렇게 지겨운 시간을 보낸 뒤 드디어 겨우 인천행 항공편 탑승.

이번 여정이 비즈니스 클래스를 총 5번 이용하는 스케줄이었고 이번이 그 마지막이었는데(게다가 국적기), 그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하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타고 나니 드디어 이번 여행도 끝이구나, 곧 한국에 도착하는구나, 지나온 하루하루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려는데... 네? 기내식 메뉴부터 고르라굽쇼?

 

블로그에 연연하지 않고 쿨하게 쇠고기찜으로 같은 것을 고르고

 

와인도 한 잔

 

 

기내식이 나오기 전, 담당 승무원과 그보다 살짝 높아보이는 승무원 둘이 세트로 나타나서 비즈니스 승객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항공편 연기에 대해 정중히 사과하는 일이 있었는데, 음, 기분이 살짝 묘했다. 왜냐하면, 앞서 밝혔지만, 비행기를 타다보면 이런 일은 가끔 겪는데, 그 때마다 이코노미석은 그냥 기내 사과(?) 방송 한 번 때리고 마는 경우가 태반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비즈니스를 타니, 이렇게 직접 승무원들이 찾아와 고개 숙여 사과를 하니 하늘 위 세상마저 자본주의의 비정한 논리가 지배되나 싶어 좀 우울해졌다고나 할까. 항공편 연기가 저 승무원들 잘못도 아닐텐데... 단지 돈 좀 더 냈다고...("오래 기다리시느라 힘드셨죠?" 친절히 맞아주는 승무원한테 "왜 늦게 오셨어요?" 탑승시 투덜거리기도 하고 이후 정중히 사과를 받아도 지랄인 나는 참으로 몹쓸 승객 ㅋㅋ)

 

예정보다 3시간 가량 늦게 대만을 출발한 비행기는 당연히

예정보다 3시간 가량 늦게 한국에 도착했고(그러니까 그 때가 대략 오후 7시 30분이 막 넘어가던)

오후 9시 서울역발 대전행 KTX를 꼭 타고 싶었던 우리는(9시가 넘어가면 배차 간격이 30분 벌어지기 때문에 ^^;) 

나 먼저 나가 KTX표를 예매하고 그동안 김원장이 두 개의 배낭을 찾아 뒤따라 나와 시간을 세이브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나 혼자 맨 몸으로 뛰어나가려니 세관 언니가 순간 의심쩍은 눈초리로 짐은요? 를 외쳤지만, 내 행색이 워낙 초라하니 -_-; 위아래 한 번 훑어보는 것으로 이후 별 제재를 가하지 않았고, 나는 그 길로 공항내 KTX 매표소에서 해당 표를 구입하는데 성공했으며, 이후로도 김원장을 조금 기다리다(생각보다 짐이 늦게 나왔다고. 그나마 비즈니스라 다행) 만나 공항철도 인천국제공항역까지 서둘러 뛰어갔다. 역 앞에 도착하니 7시 53분 일반열차와 8시 정각에 출발하는 직통열차 둘 중에 하나를 서둘러 선택해야 했는데, 서울역까지 전자는 53분, 후자는 43분이 소요된다니 3분 차이로 돈을 3배나 더 지불하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김원장에게 이번엔 일반열차를 타자고 했다. 일반열차 승강장으로 들어가자 곧 열차가 도착했고, 텅빈 열차에 우아하게 들어서는 순간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이제 예정대로라면 8시 46분에 공항철도 서울역에 도착할테니 부지런히 가면(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꽤 되는 거리다) KTX도 무사히 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잘 달리던 열차가 어느 순간, 8시에 뒤따라 출발했다는 직통열차가 우리보다 앞서 가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관계로 은근 오래 정차를 하면서, 그리고 말 그대로 그 놈의 뒤따르던 직통열차가 우리를 쌩~하니 스쳐지나가 버리고 난 뒤 다시 천천히 시동을 거는 이 놈의 일반열차를 보고 있노라니, 이게 아무리 계산에 계산을 거듭해봐도 우사인볼트가 되지 않는 이상 예매해 둔 KTX를 타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 것이었다. 게다가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한 엄마가 과연 제 시간에 도착을 해줄 것인지도 의문이었기에(전화해 보니 엄마의 위치도 썩 여유로워 보이지 않았던지라) 이거야말로 첩첩산중. 처음 일반열차에 올라 출발할 때만 해도 이제 무사히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겨우 편안함을 되찾은 듯 보이던 김원장은, 직통열차가 우리를 지나쳐 가버린 순간부터 기분이 급전직하 다운되어 신경질 게이지가 순식간에 만땅을 가르키고 있었고, 때문에 좀 전 직통열차 대신 일반열차를 타자고 주장했던 내 입장은 그야말로 똥줄이 시속 100Km의 속도로 타오르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아 된장.

 

날이 설대로 선 김원장과 그 눈치 보느라 심란했던 내가 공항철도 서울역에 도착한 시각은 8시 52분. 다행히 하차 직전 엄마가 막 도착했음을 알려왔는데 평소 우리의 도킹 지점은 KTX 승강장과 약간의 거리가 있는지라 일단 전화로 엄마에게 승강장 바로 앞으로 이동해 줄 것을 부탁해 놓고(과연 이 아줌마가 제대로 찾아가 있을지 살짝 도박삘이 났지만 별 수 있나) 나는 붉으락푸르락하는 김원장을 뒤로 하고 김원장이 만남의 장소로 오기 전에 엄마에게 맡겨놓은 물건/대만 면세점에서 급조한 -_-; 선물을 무사히 받고/주는 절차를 모두 마무리해두기 위해(아 진짜 차 키까지 왜 또 맡겨가지고 -_-; 이 물건 지금 못 받으면 내일 출근때 또 전쟁인데...하면서) 배낭을 맨 채로 에스컬레이터 위를 뛰는데...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때의 그 절박했던 심정이 잊혀지질 않네. ㅋㅋ

 

하여간 이러다 심장 터져 죽을지도 몰라 헐떡이면서 엄마+아빠까지 만나 몇 마디 말도 없이 물건 상호 거래 끝내기가 무섭게 김원장이 마찬가지로 헐떡이며 도착하고 김원장은 안녕하세요/안녕히계세요만 연이어 인사 하다시피하고 우리 둘은 서둘러 KTX 승강장으로. 그렇게 KTX 올라타 좌석 찾고 나니 출발이야 ㅎㅎㅎ 내 다시는 이렇게 촉박하게, 꽉 차게 일정 짜지 않으리(고슴도치 가족 대표 표본인 울 엄마는 이런 사연도 모르고 어머 어쩜 너는 야무지게 공항에서 KTX 표까지 이렇게 시간 딱 맞게 잘 끊어왔니, 하는데 ㅎㅎㅎ). 어째 이번 여행은 시작 요이땅부터 서울행 열차 연착하면서 본의 아니게 공항까지 공항철도 직통열차를 타게 되질 않나, 끝날 때까지 비행기 연착하면서 귀가길 내내 이게 뭔 생쇼란 말인가. 끝이 좋아야 모두 좋은 법인데... 이번 여행이 이렇게 끝나다니. 이렇게 끝내버리다니. 아욧, 서운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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