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늘 밤, 우리는 에티오피아를 떠나게 된다. 치사하게 이 숙소에서 며칠이나 묵었는데도 late check-out은 안 된다고 한다(11시 체크아웃 시간이 지나면 full payment가 원칙이라나). 그래도 눈치를 보면서 12시까지 최대한 숙소에서 개기며 남아있는 망고며 바나나를 모두 먹어치운다. 아, 그 넘의 망고, 이번에 어찌나 먹었는지 한동안은 너 먹을 일 없겠다(망고에 질리다니, 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문장인가). 

 

짐 정리를 하고 리셉션에 일단 짐을 맡긴 뒤 다시 슬슬 동네 마실을 나가본다. 망고가 꺼져야 오늘 다시 한 번 더 방문을 노리고 있는 한식당에서 뽀지게 먹을 수 있을 테니 ^^; 어디로 가볼까… 부활절이 다가온다니 혹시라도 어제 지나쳤던 마스칼 광장에서 무슨 행사를 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우리, 광장에 구경 가보자~

 

 

내 야무진 기대를 뒤로 하고 광장은 여전히 썰렁하다. -_-; 그래도 광장의 언덕 너머쪽에서 뭔 행사를 하고 있는 것 같긴 하다. 그 쪽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입구에서 검색당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흠… 저기서 뭘 하고 있는걸까? 우리도 한 번 가보자. 만약 외국인이라고 또 말도 안 되는 입장료라도 내라고하면 그냥 나오지, 뭐.

 

가까이 가보니 뭔 엑스포란다. 엑스포? 입장료는 단 돈 3비르. 입장료를 받는 곳인데 오직 현지인 가격만 존재한다는 사실로 충분히 만족스러워 ^^; 뭔지도 모르고 들어가본다(우리도 참 ㅎㅎ)

 

들어가보니 그야말로 엑스포스럽다. 에티오피아에서 한 가닥하는 회사들이 총 출동했다고나 할까. 어떤 기준으로 구역을 나누었는지는 모르지만 다소 일관성없어 보이는 배열로 업체마다 각각 부스들을 차려놓고 물건을 전시, 판매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유명한 커피(원료)를 가져다 가공하여 재판매하는 회사인 Mac coffee도 눈에 띄고, 옷이나 구두를 취급하는 수많은 부스들과 제법 근사한 실내 인테리어용 분수를 파는 업체며, 심지어는 공사용 자재들을 판매하는 곳까지. 그야말로 저렴한 먹거리부터 고급 자재들까지 늘어선 야외 백화점되시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뭐 하나 살 게 없는 -_-; (그저 야외에 급조된 간이 카페에서 이름 모를 즉석 빵(?)과 마키야토를 즐겼을 뿐 ^^;)

 

 

 

이후 엑스포 행사장을 떠나(나중에 알고보니 엑스포 입장권에 써 있는 문구가 바로 ‘부활절 엑스포’였다. 그럼 이마저 부활절 기념 엑스포였나?) 광장에서 ‘보레~ 보레~’를 외치는(나는 볼레라 발음하는데 이들은 보레에 가깝게 발음한다) 미니버스를 타고 한국식당에 찾아간다. 그리고 이 곳을 떠나면 당분간 들를 일 없어보이는 한국식당에서의 마지막 정찬을 신나게 즐긴다(비빔냉면 60, 순두부 55, 밥 한 공기 추가 ^^; 15에 택스 20% 더해 총 156비르 지불).

 

 

, 그리고도 공항에 가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는다. 그러자 김원장이 그동안 머리를 자르겠단다. 처음 알아봤던 숙소 근처 이발소에서는 20비르를 불렀었는데, 한국식당 근처의 남성 전용(?) 미용실에서는 헤어컷에 15비르라고 내걸었다. 그럼, 저기서 잘라보자.

 

 

 

우리나라 미용실처럼 문 앞에 아주 다양한 헤어스타일의 남성들 사진이 번호대로 늘어서있다. 김원장이 심사숙고하여 그 중 한 번호를 골라 아주머니에게 똑같이 잘라달라 부탁한다. 뒤에 앉아 거울속에 비친 김원장의 얼굴을 보니 그러고도 내심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다. ㅋㅋ 바리깡같은 것으로 허벌나게 머리카락이 밀어지던 ^^; 김원장이 너무 세게 밀어대서 두피가 아프다고 호소한다. 흑인들 머리가 꼬불꼬불 파고 들어가는 곱슬머리라서 그런지 우리같은 직모를 같은 힘으로 밀어대면 자극이 심한 모양이다(나중에 보니 군데군데 살짝살짝 베어있더라 -_-;).

 

의사소통의 문제인지 결국 김원장이 원하는 스타일보다 훨씬 군바리 입대 스타일로 변신 완료되었다. 뭐 그래도 나름 시원시원해서 좋네. ^^; 어차피 까딸스런 김원장 마음에 100% 들게 자르기는 한국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ㅎㅎㅎ 그러고보니 예전에 인도와 크로아티아에서도 머리를 잘랐던 기억이 난다. 인도에서는 아저씨가 머리를 잘라준 뒤 얼마냐고 묻는 우리에게 알아서내라고 해서 난감했었지(그땐 나도 이발소를 이용했었다 ^^;). 크로아티아의 그 아주머니는 김원장이 난생 처음 맞는 외국인 손님이기라도 했는지 머리를 자르며 손을 부들부들 떨더라 ^^;

 

머리야 이미 잘린 것이고 시간이 나면 또 자라날 것이니 당장 좀 불만족스럽다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내 머리 아니라고 쉽게 말한다 ㅋㅋ), 머리를 자르러 왔다가 이 친절한 아주머니네 가게에서 얼결에 커피 세레모니도 받았는데 이거야말로 특별한 경험이었다. 우리를 위해 숯을 이용해 모락모락 향을 피우고, 생커피를 씻어다 직접 숯불에 커피를 볶는다. 처음엔 녹색을 띄던 커피알들이 적당히 볶아져 짙은 갈색으로 변하면 이번에는 커피를 곱게 갈고 커피가루를 독특한 주전자에 넣어 물과 함께 끓이는 과정을 거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우리 앞에 커피가 놓였을 때, 그리고 그렇게 마악~ 탄생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을 때, 나는 행복했다. 에티오피아를 떠나기 직전, 이렇게 커피 세레모니까지 챙겨 받고 갈 수 있어서. 이렇게 이 땅에서의 소중한 기억을 또 하나 남길 수 있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Cloud 9이라는 (익숙한 이름의) 카페에 또 들러 마지막 비르를 털고 정들었던 숙소 직원들과, 그리고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곤 했던 버거퀸 햄버거 가게 직원들과도 ^^ 모두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그래, 돌이켜보면 모두들 좋은 사람들이었어.

 

여행사 직원의 권유대로 대략 3시간 전에 일찌감치 공항에 도착했지만(입구에서 검색을 하는데 이렇게 묻더라. 너 총 가졌니? -_- 그럼 가진 애가 가졌다고 대답할까...) 우리 항공편 데스크에 벌써 줄이 제법 길다. 이상하게 에티오피아 애들은 줄을 설 때 간격을 두지 않고 다닥다닥 붙어선다. 그러니까 자꾸 우리에게 누군가 몸을 부딪혀댄다는 소리다. 아니, 이게 꼭 이상하다고 볼 수는 없지. 여기 문화가 그런 것을. 누군가 말하길 공원에 벤치가 쭈욱 있으면 유러피안은(그리고 우리도) 아무도 안 앉아있는 벤치에 가서 따로 앉는데 반해, 이와는 달리 이미 사람이 앉아있는 벤치로 찾아가 꼭 옆에 같이 앉는 민족들이 있다고 했다. 아마 에티오피아인들도 후자에 가까운가 보다.

 

데스크에서는 보딩패스를 두 개 내어준다. 하나는 오늘 밤 아디스아바바발 사나행 티켓이고 다른 하나는 내일 아침 사나발 카이로행 티켓이다. 짐은 곧장 카이로까지 간다고 해서 칫솔만 급히 빼내둔다. 출국 수속을 마친 뒤 보딩에 이르기까지의 수속은 다소 요상해서 일단 면세구역에서 대기를 하다가 방송 안내에 따라 게이트 앞 별도의 공간으로 다시 보안 검색을 받고 들어간다. 비행기로 이어지는 통로 앞의 항공사 직원들이 서있는 데스크에서 다시 보딩패스와 여권을 보여주고 출석(?) 체크를 받는데 아마도 전산화가 제대로 안 되어 있어 그런 것 같다. 이후 보딩타임에 맞춰 항공기에 탑승할 때에는 통로 입구가 아니라 통로를 지나 바로 비행기 문 앞에서 티켓을 절취하여 돌려주더라. 여하튼 남들 하는대로 눈치껏 따라따라 별탈없이 무사히 우리 좌석에 앉았다. 역시나 저렴한 예메니아의 인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오늘도 이빠이 만석. 내 옆에는 사우디 제다로 일하러가는 에티오피아인 압둘라 아흐멧이 앉았다(그 역시 나를 부를 때마다 “You!”라 하더라. 다시금 에티오피아의 ‘You!’ 호칭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낀다. 이들의 ‘You’는 ‘야!’ 혹은 말뜻 그대로 ‘너!’가 아니라 ‘여보세요’, ‘여기요~’ 혹은 ‘안녕하세요’, ‘어, 외국인이다!(동아프리카에서의 ‘무중구’처럼)’ 따위의 다양한 뜻으로 쓰이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는 나와의 이런저런 대화 끝에 잘사는 나라, 한국에서도 일하고 싶다며 본인의 휴대폰 전화번호(0504532287)를 불러줬다. 나중에 우리가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꼭 본인이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힘 좀 써 달라나?

 

에티오피아를 떠나면서 시원한 마음보다 섭섭한 마음이 훨씬 컸는데, 막상 예멘 사나에 다시 도착하니 에티오피아에 대한 마음은 순식간에 잊고 ^^; 반가운 마음이 크다. 게다가 예메니아에선 오늘 밤 <호텔>을 제공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짜잔~ 그럼 내일 아침엔 부페가 나오는거얌? 김원장과 다시 기대 부풀리기 모드에 들어간다. ^^;

 

익숙한 공항청사에 들어와 입국심사대로 나가지 않고 바로 오른편의 트랜짓 데스크에 서려는데 어어, 이것봐라? 아까 에티오피아 공항에서부터 우리를 밀치고 다녔던 수많은 처자들이 여기 다 서 있네. 알고보니 이들은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일하러 가는 여성들. 산업연수생 분위기는 아니고 아마도 에티오피아의 어느 용역 전문 업체에서 인솔하여 단체로 베이루트로 가는 듯 하다. 김원장은 이들을 보면서 예전 우리 간호사들과 광부들의 독일행을 오버랩시키며 안타까워하는데, 그래도 걔중엔 이 외국행이 그저 설레기만 하는지 마치 생애 처음 비행기타고 단체로 수학여행이라도 떠나는 듯한 소녀들처럼 재잘재잘 신나하는 모습도 보인다.

 

쓰윽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들의 내일 비행기 시간도 우리랑 비슷한 것이, 어차피 이들과 한 배를 탄 운명이다. 시간이 좀 흐르자 어수선하던 예메니아측은 대다수를 차지하는 레바논행 승객들을 따로 한 부류로 나누고, 나머지 승객들을 다른 그룹으로 나눠 트랜짓 처리를 시작한다. 카타르 도하로 가는 승객이 몇 있고, 사우디 리야드로 가는 승객도 몇, 그리고 인도 뭄바이로 가는 승객이 둘이고(그저 인도행이라는게 반가워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한 명은 네팔리, 다른 한 명은 인디안) 카이로로 가는 승객이 우리 둘이다. 롱트랜짓을 하는 사람이 많은 탓에 공항측에 여권을 제출하고 그들의 안내에 따라 입국심사대 뒤로 빠져나가 다시 공항을 벗어나 공항 앞 주차장에 서있던 호텔 차량(무사피르 호텔? 뭐 그런 비슷한 이름)에 나누어 올라타는데까지 시간이 꽤나 한참 걸렸다(계속 그 베이루트 단체팀이 말썽이었다. 누군가는 여권을 안 내고, 누군가는 공항을 안 빠져나오고, 누군가는 버스에 안 타고… 물론 예멘 밀입국을 위해 일부러 그런 것들은 아니고 -_-; 이런 일련의 절차가 익숙하지 않은 탓에 그랬던 듯).

 

과연 내일 아무 문제없이 여권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누구에게 여권을 받아와야하나를 고민하다가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는 동안 호텔 버스는 깜깜한 밤, 사나의 외곽 도로를 무서운 속도로 한참이나 달려 우리를 제법 커다란 호텔에 내려놓았다. 트랜짓용 호텔을 뭐 이리 공항과 먼 곳에 잡았는지, 원. 마찬가지로 어수선한 베이루트팀의 꽁무니(어차피 에티오피아인들의 시스템이라는 것이 일행중 단 한 명만 내 앞에 서 있었어도 모두들 와르르 내 앞으로 새치기해 서버리는지라)에 졸린 눈으로 서 있는데 유일한 동양인들이라서 눈에 뜨이기라도 했는지 호텔측의 배려로 남들보다 빨리 2인실 키를 받아들었다(이 때 프런트에 내일자 보딩패스를 제출함으로서 우리는 완벽하게 여권도 없고 보딩패스도 없는 자유인 -_-;의 상태가 되었다).

 

사나의 예메니아 트랜짓 호텔은 동남아에서 흔히 트랜짓에 쓰이는 호텔들의 급수와는 꽤나 차이가 있었으나 ^^; 그래도 그간 예멘에서 묵었던 여타 호텔들에 비해서는 규모가 매우 컸다(하긴 오늘 롱트랜짓하는 승객만 자그마치 몇 명이냐). 방 자체도 썰렁하게 느껴질 정도로 크고(아디스아바바 숙소와 비교하자면 방 크기가 3배는 넘는 것 같다). 이 곳에 이르는 과정이 다소 지루하긴 했으나 그래도 공항 의자에서 쪼그리고 앉아 밤을 지새울 필요가 없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얼렁 자야지. 벌써 12시가 넘었다.

 

@ 오늘의 다큐 : <현대문명, 놀라운 이야기/이집트의 신비, 피라미드> 공항에서 보딩을 기다리며. 이집트 가기 직전인데도, 게다가 피라미드가 주된 내용인데도 좀 지루하다. 역시 유적은 우리 취향이 아닌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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