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수마트라 서부 해저 40 km 지점... 이번에 도무지 믿지못할 비극을 일으킨 지진의 진앙지인 그 곳, 그 곳은 바로 아체의 앞바다이다. 아체...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아체는 원래부터 가슴 아픈 땅이었다. 젠장.

 

아체에 대해 이보다 더 내게 가까이 다가온 글은 없다. 작년 여름, 정문태 전선기자님의 글로, 그 분을 통해 나는 아체를 알게 되었다.   


 

아체, 야만의 소용돌이! <한겨레 21 제466호 중 펌>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 피흘리며 죽어가는 땅, 종군기자 정문태의 아체전쟁 취재일기

<한겨레21>이 파견한 종군기자 정문태씨가 지난 6월14일부터 24일까지 외국기자로서는 마지막으로 아체의 현장을 지켜보고 돌아왔다. 5월19일부터 계엄령이 내려진 아체는 인도네시아 정부군과 분리독립을 외치는 자유아체운동(GAM)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진 상태다. 정문태 기자는 계엄사령부가 있는 반다아체와 작전사령부가 있는 록스마웨를 중심으로 전선을 취재했다.

그동안 계엄사령부는 취재 중인 외신기자의 차량에 실탄 사격을 가하는 등 위협적인 행동을 해오다 아예 외신기자의 아체 취재를 원천봉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천명으로 추산되는 자유아체운동 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중화기로 무장한 해병대, 특전사(코파수스), 전략예비사령부(코스트라다), 경찰기동타격대(브리봅) 등 악명 높은 특수부대원 4만5천명과 각종 전투기·전함을 동원해 최후의 작전을 벌이고 있다. 이 기사는 군 당국의 집요한 방해 속에서도 그 전장에 다가간 사투의 기록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아체 전쟁.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아체는 피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정문태 기자가 외국인·외국기자를 통틀어 마지막으로 아체를 빠져나오자, <자카르타포스트> <템포> <레프부리카> 등 현지 언론들은 일제히 6월24일자로 이 내용을 보도하면서 언론의 자유와 외신에 대한 취재 허용을 촉구했다. -편집자





“와라, 용기를 얻자

어두운 밤을 밝히며 빛나는

동녘별을 향해, 동녘별을 향해

내 조국으로부터

하나 둘씩

사라져가는, 저 별들

그러나, 두려워 말라

우리는 너를 사랑한다

언젠가, 누군가 너를 따르리라.”

힐끗힐끗 뒤를 훔치던 운전기사는 항변이라도 하듯 볼륨을 높였고, 낡은 스피커는 울어댔다.

2001년 전투 중 사망한 압둘라 샤피에(아체자유운동 전 총사령관)에게 바친 노래, ‘유언장’이라는 부제를 붙여 냐오웅 그룹이 노래한 <조국의 꽃>은 애간장을 태웠다.

반다 아체 공항에서 도심지로 접어드는 그 길은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도 어김없이 무거운 침묵을 강요했다. 공항과 도심 사이에 주어진 20여분, 그건 아체 속에 나를 집어넣기 위한 통과의례였다. 6월14일 반다 아체, 그런 대로 평온했다. 지난 5월19일 계엄령이 선포된 뒤로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군 수송차량들이 폭풍처럼 달리는 모습도, 어둠과 함께 시민들이 사라져버리는 일도 모두 아체의 해묵은 전통이었을 뿐. 인도네시아 정부가 아체 전역을 군사작전지역(DOM, 1989년~98년)으로 선포했던 1989년에도, 자유아체운동(GAM)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던 93년에도, 내가 본 반다 아체는 늘 오늘 같았다.

바퀴벌레와 쥐가 기어다니는 암흑 호텔

6월16일 아침, 반다 아체를 떠나 군 작전사령부가 있는 록세우마웨로 향했다. 곳곳에 병영과 초소가 도사리고 있지만 검문·검색은 오히려 예전보다 느슨한 편이었고, ‘프레스’ 쪽지를 붙인 자동차가 확인 경적을 울릴 때마다 군인들은 손 흔들며 친밀감을 표현했다. 반다 아체에서 40여분쯤 달려 세울리메운 운동장 부근을 지날 무렵, 도로를 차단한 중무장 탱크들 뒤로 무리 지은 7천여명 주민들과 마주쳤다. 10시쯤에 열린 육군사령관 랴미잘드 랴쿠두 환영식에 참석하기 위해 주민들은 아침 7시부터 먼 길을 걸어와 따가운 햇빛 아래 몇 시간째 서 있는 중이었다. “몰라. 내가 왜 여기 나왔는지도. 동장이 나오라고 해서 그냥 왔을 뿐이야.” 아침 밭일을 제쳐놓고 나왔다는 마르주키(64)는 혀를 찼다. 그러나 10시15분쯤 랴미잘드 랴쿠두 사령관은 중무장 경호차량 행렬에서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고 스쳐가버렸다. 주민들은 허탈하게 발길을 돌렸다.


사진/ 정부군 작전의 일환으로 마을을 통째로 비운 채 쫓겨난 주민들이 하루하루 늘어나는 만큼 아체 전역에는 텐트 난민촌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6월20일 문을 연 비러운의 페우상안 난민촌은 정부군의 엄격한 통제 아래 놓여 있다(정문태).


“이렇게 아체 사람들에게 분노와 적개심만 키워놓고는 통합하자니, 누군들 따르겠어.” 자카르타에서 달려와 현장을 취재하던 <템포> 기자 차히요가 내뱉는 말을 받아 한 주민이 되물었다. “어이, 템포 기자, 자카르타에서도 군인들이 주민들에게 이렇게 하나?”

오후 2시 무렵 록세우마웨 군 작전사령부를 마주보는 비나비라호텔에 짐을 내렸다. 기자들로 만원인 호텔 카운터에서 하나 남은 방이라며 ‘05’라 적힌 열쇠를 건네주는 순간, 주변에서 환성이 터졌다. “입방 축하! 록세우마웨 감방 05호.” 눈인사로 대신하고 심상찮은 05호 방문을 열었다. 전기가 끊겨 한낮에도 암흑천지인데다, 바퀴벌레와 쥐가 기어다니고, 찜통 같은 기운이 24시간 내내 흐르는 곳, 내게 배당된 05호였다. 그로부터 나는 에어컨이 돌아가는 <템포> 기자의 방과 <자카르타 포스트> 기자의 방을 오가는 철새가 되었다.

저녁 나절, 현지 기자들과 어울려 장터 식당으로 나갔다. 어둠이 내리고도 많은 시민들이 유유히 돌아다니는 풍경 속에서 예전보다 훨씬 나은 치안 상태를 읽고 있던 중, 우연히 작전사령관 밤방 준장과 한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내가 전화로 인터뷰를 요청했던 바로 그 한국 기자라고 소개하자, 밤방 준장은 “내일은 인터뷰 시간을 낼 수 없다”며 시무룩하게 되받았다. 아무튼 제법 쓸 만한 결과였다. 아체 취재 허가건을 놓고 마지막 관문 격인 그를 만난 셈인데, 적어도 나를 잡아 가두거나 쫓아내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으니.

그렇게 전략 요충지 록세우마웨의 밤은 깊어갔고, 커피잔을 놓고 둘러앉은 기자들은 전선의 우정을 쌓아갔다. 현지 기자들은 모두 초면이었지만 ‘사진’ 한장 탓으로 다들 구면처럼 나를 대했다. 2002년 1월 총격을 받아 사망한 자유아체운동 전 최고사령관 압둘라 샤피에 후임으로 무자킬 마나프 현 최고사령관이 취임했을 때, 모든 인도네시아 언론들이 유일하게 무자킬을 인터뷰하면서 내가 찍어두었던 사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사진/ 정부군의 곡사포 공격은 ‘자유아체운동’보다는 오히려 주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정문태). “누구를 위한 기도인가.” 전쟁은 사람과 신 사이에서 요동친다. 수색작전에서 돌아온 정부군 해병 202 대대병들(정문태).

가장 잔인한 살해 현장을 목격하다

6월17일 아침 9시 작전사령부 미디어센터. 신사로 소문난 대변인 야니 바수키 중령은 느닷없이 찾아든 외국기자를 놀라는 기색 없이 정중하게 맞으며 군 작전지역 취재허가증 발급에 필요한 서류들을 요청했다. 사진과 문서들을 던져놓고는 <템포>와 <레프부리카> 기자를 뒤에 태우고 니삼지역으로 나섰다. 니삼은 지난 2000년 1월 자유아체운동 본부를 취재할 당시 무자킬 마나프 사령관을 만났던 곳이라 지형들이 친밀하게 다가왔다. 해병 202대대 400여명이 진친 준산악지대인 바투레성 마을은 들머리에서부터 긴장감이 높았다. 대대장 림보 중령은 몰려든 10여명 기자들을 친절하게 맞았지만, 약 2km를 사이에 두고 자유아체운동 기지를 포박해 들어가고 있는 중이라 취재는 허락할 수 없다며 등을 떠밀었다.

오후 2시, 기자들은 알루가롯마을 인근 도로에서 대형 폭발물이 발견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자유아체운동이 설치했다. 사제지뢰다.” 꼬망 아구스 소위는 열심히 설명했지만, 지뢰가 묻힌 지면에서 걷어냈다는 부품들 속에는 녹슨 자전거 체인과 손잡이까지 섞여 나왔고, 아주 두꺼운 강철로 둘러싼 원통 위에 콘크리트로 상판을 덮어 지뢰로 보기에는 어려운 물체였다. 몇몇 텔레비전 팀들이 호들갑 떨며 곧장 필드 리포팅에 나서는 걸 보면서 <템포> 기자 차이요가 다가와 물었다. “군인들에게 폭파시켜 보라고 해. 이게 터져 기자들이 죽으면 기사고 아니면 만화지.”


사진/ 산속 나무에 묶여 죽은 채로 발견된 무자킬의 주검 앞에서 유족들이 울고 있다. 이 피투성이 현장은 5월19일 계엄령 선포와 군사작전 돌입 이래 가장 잔인한 살해로 기록할 만했다(정문태).


아침부터 하루종일 허탕만 쳤다. 가는 곳마다, 군인들이 작전지역이라며 접근을 금지해서 되는 일이 없었다. 총성 없는 전선 취재, 허탈하게 바툴레성 마을로 되돌아나오는 취재 차량을 주민들이 막았다. “터졌다!” 자동차 문을 열고 날았다. 마을에서 300여m 떨어진 곳에서 주민 살해 현장을 잡았다. 무자킬이라는 20살 먹은 젊은이가 발가벗긴 채로 나무에 묶여 죽어 있었다. 그 피투성이 현장은 5월19일 계엄령 선포와 군사작전 돌입 이래 가장 잔인한 살해로 기록할 만했다. 기자들마저도 주검과 거리를 둘 정도였다. 무자킬 어머니와 누이의 눈물은 1976년부터 시작된 아체 비극, 그 26년 세월 동안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해 당한 통곡의 역사에 또 한 점을 얹었다.

해거름을 따라 숙소로 돌아 온 기자들은 말을 잊었다. 전선 특종을 쫓아 오늘 하루도 남다른 ‘기회’를 갈망했던 기자들이지만, 잔인하게 살해당한 무자킬의 죽음 앞에서는 결국 연약한 인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계엄 군사작전, 시민 개죽음!

6월18일 이른 아침 ‘묵직한’ 정보가 날아들었다. 100여명이 넘는 민간인들을 집단 학살한 현장을 증언하는 이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20여명의 기자들은 7대의 자동차에 나눠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비러운 지역 적십자사 직원은 말을 바꿨다.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기자들은 소문에 오른 촛 메우고마을을 찾아 두어 시간 동안 여기저기 산골을 헤맨 끝에, 3km 떨어진 서너복 록마을 어귀에 이르렀지만 그것으로 취재는 끝나고 말았다. 중무장 탱크를 동원한 해병대들이 진을 친 서너복 록마을 인근은 전선과 밀착한 지역으로 정찰 탱크들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고, 기자들의 진입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가 직접 현장을 조사해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해병 탱크 4대가 뿜어내는 굉음과 뿌연 먼지 속에서 기자들은 서로 부끄러운 직업적 한계를 엿보았다. “제기랄, 전선 취재를 하려면 더 강한 탱크를 몰고 오는 수밖에 없겠구만.” 누군가 내뱉은 넋두리를 이고 무겁게 발길을 돌렸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고 산길을 돌아나오는 동안 함께 갔던 7대 차량들은 모두 힘없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취재 차량이 비러운을 거쳐 록세우마웨로 접어들 무렵 <템포> 현지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군인이 소녀를 성폭행했다는데….” 운전기사를 닦달해서 자동차를 급히 다시 비러운으로 돌렸다. “밟아. 파우즈라병원으로!” 그러나 병원에서는 담당의사뿐 아니라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아직 헌병대에서 조사하고 있는 사건이라며 겁부터 집어먹었다. 피해자 주소를 확인한 뒤 <템포>와 <수아라 펨바하루안신문> 기자 두명의 통역 도움을 받으며 소녀의 집으로 달려갔다. “언니는 지금 헌병대에서 조사받고 있어요.” 기자들을 경찰로 오해해서 겁에 질린 13살짜리 소녀 신타 데위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언니와 함께 끌려갔는데 저는 운 좋게 빠져 나왔어요.” 다시 헌병대로 달려갔다. 그러나 헌병대에서는 피해자 라프카 라흐마얀티(15)의 대면도, 취재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게 기자들의 손발을 묶어놓고 입을 막은 채 계엄 군사작전은 한달째로 접어들었고, 언론은 아체에서 벌어지는 인권유린 실태에 접근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가운데 소녀들이 성폭행을 당했던 사건도, 25건에 이르는 성적학대 사건도 또 이농바리(자유아체운동 여성전사)를 찾는다며 군인들이 여성들 옷을 벗긴 사건도 모두 묻혀버렸다.

또한 512건에 이르는 학교 방화사건도, 13살짜리 소년을 자유아체운동 게릴라라며 사살했던 사건도, 기자들에 대한 공격사건들도 모두 흘러간 얘기가 되고 말았다. 지난 한달 동안 계엄 군사작전으로 희생당한 민간인 희생자 통계도 가관이다. 인도네시아 적십자사는 250구에 이르는 주검을 접수했다고 밝혔고, 군과 경찰은 민간인 사망 숫자를 각각 55명과 108명으로 밝히며 따로 놀았으니. 자유아체운동쪽에서는 민간인 사망을 400명으로 발표했다.

분명한 건, 아무도 감시하는 이 없는 가운데 아체 계엄 군사작전은 그렇게 하루하루 날수를 늘려가고, 그 날수만큼 민간인 희생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민 개죽음.’ 큰 글씨로 취재일지에 휘갈겼다. 무력감만 남은 하루였다.


사진/ ‘아체자유운동’이 인도네시아 정부군 차량을 공격해 7명이 사망했던 마탕쿰방 지역. 그러나 정부군은 취재진의 현장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TEMPO). 군대에 눌린 사람들, 탱크에 밀려난 자전거는 아체의 가장 정직한 모습이다(정문태).

드디어 총성이 울리는 전선에 서다

6월19일 아침 9시30분. 미디어센터에서 브리핑을 듣던 중 나는 자리를 빠져나와 마탕춧마을로 달려갔다. 대변인 야니 중령 말 가운데 “현재 시각 교전 중…”이라는 말이 들려왔던 탓이다. 록세우마웨에서 30여분 떨어진 거리라 전선 취재가 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마탕춧마을 어귀 한길에서부터 벌겋게 달아오른 군인들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기자들을 차단했다.

이미 현장에 도착해 있던 몇몇 텔레비전 팀들과 함께 길을 돌아 논둑 길로 차를 몰았다.

10여명의 기자들이 마탕춧마을로 들어서자 군인들은 시뻘건 얼굴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흥분하고 있었다. 분대장이 기자들에게 상황 종료를 설명하는 사이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고, 기자들은 일제히 고개를 꺾어 나무 둥치 밑으로 몸을 날렸다. 마을 뒤 야산쪽에서 총성이 울렸고 마탕춧마을을 점령한 정부군쪽에서 대응사격을 했다. 겁에 질린 어린 군인들은 이성 잃은 얼굴로 뛰어다녔다. 마을 앞쪽으로 뚫린 논을 제외하고는 전방 시야가 모두 가린 상태여서 전황을 쫓기는 불가능했지만, 아체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총성이 울리는 전선에 섰다. 군인을 쫓아 나서려는 어린 카메라맨을 잡아채서 나무 둥치에 앉혔다. “좀더 숙이고 있는 게 좋겠어.”

사실 마탕춧마을 전선은 교전강도와는 상관없이 매우 위험한 취재 현장이었다. 마무리 전투는 잔존병력들이 빠져나가기 위해 예상할 수 없는 지점에서 상호 저격전을 벌이는 탓에 기자들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현장이고, 실제로 많은 종군기자들이 마무리 전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따라 들어가다 희생당했다. 더구나 마탕춧마을은 시야에서 벗어나는 지형조건을 지녀 이미 종군기자들의 무덤이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이런 마을은 두번 다시 취재하고 싶지 않았다. 총성이 멎자 기자들은 마을 한복판을 가로질러 정부군이 사살했다는 자유아체운동 게릴라 주검 10구가 놓인 지점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기자들은 철수하라며 닦달하는 군인들에 밀려나고 말았다. 기록용 사진을 찍는 데 급급했을 뿐, 사망자들 신원이나 전투 상황은 취재할 겨를도 없었다. 뒷걸음질로 마을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한 귀퉁이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주민들을 취재했다. 정부군 명령에 따라 몸을 숨길 데라곤 없는 빈터에 모여 앉아 교전을 지켜보았던 주민들이었다. 몸을 피할 자유도 없는 이 야만적인 전쟁의 끝은 어디일까? “빨리 빠져 나와.” 논둑으로 철수하던 기자들이 소리쳤다. 고개를 돌리자 너댓명 군인들이 겨누고 있던 총부리를 거뒀다.

전선 취재는 싱겁게 끝났다. 결론을 내렸다. “아체의 계엄 군사작전 취재는 불가능하다.” 그 길로 나는 전선 취재를 포기했다. “군인들이 허락하는 장면만 취재할 바에야 차라리 영화나 보러가자.” 몇몇 기자들을 ‘선동’해서 민병대 취재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정오 무렵, 일행은 차량 두대에 나눠 타고 산악지대에 자리잡은 중부 아체 타켕온으로 이동했다.

록세우마웨에서 꾸불꾸불 산길을 돌아 4시간, 해발 1500m 산악에 자리잡은 타켕온은 타와르호수를 낀 그림 같은 풍경으로 다가왔다. 호숫가 호텔에 짐을 내린 일행은 모두 넋을 잃었다. 밤과 낮이 수면 위에서 선명하게 갈리는 거룩한 아름다움, 모두들 자연으로 돌아갔다. 이런 행운은 때때로 전쟁 취재가 안겨주는 보너스 같은 것이었다. 그날 밤 여섯명의 기자들은 모두 본사와 연락을 끊고 기사 작성을 거부하는 용감한 도발을 감행했다. 일 대신 인생을 이야기했고 사랑 타령을 늘어놓기도 했다. 전쟁지역에서 긴장을 풀고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는 경험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사진/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단 한달만에 400여개가 넘는 학교들이 불태워졌다. 그러나 누구의 소행인지 아는 이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TEMPO). 정부군이 10명의 자유아체운동 게릴라를 사살했다고 발표한 마탕춧 마을 교전현장(정문태).

민병대, 동티모르의 기억이여

6월20일 현지 주재기자의 안내로 타켕온에서 35km 떨어진 폰독 바루의 지역 민병대 사령관 알 모하마드를 만났다. “자유아체운동으로부터 공격받은 2000년에 마을 방위대를 조직했지만, 무기는 없다.” 모하마드는 민병대 조직의 무장과 정부군의 지원을 철저히 부정했다. 여섯명 기자들이 혼이 빠지게 정신 없는 질문을 퍼붓는 사이, 모하마드 입에서는 중요한 말이 흘러나왔다. “메단에 있는 정부군으로부터 무기와 실탄을 받은 적이 있다.” 기자들이 다그치자 흠칫 놀란 그는 “이건 내 친구 이야기야”로 말을 급히 바꿨고, 인터뷰는 끝났다.

폰독 바루에서 만난 청년 민병대원들 태도는 매우 배타적이고 공격적이었다. 마을 사진촬영까지 금지하고 나서는 젊은이들을 구슬러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현장을 목격한 군인들이 제동을 걸고 나왔다. “군과 경찰에 가서 허가부터 받으시오.” 대체 무슨 허가를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일행은 계엄사령부로 가서 인터뷰를 요청하는 것으로 허가 신청을 대신했다. 기자들 질문에 나선 부사령관 암린 중령은 민병대 존재를 철저히 부정했다.

그동안 타켕온은 무장 민병대들이 할거하며 지역분열과 충돌을 불러왔던 대표적인 곳이었다. 지난해 12월 정부군과 자유아체운동이 휴전협정을 맺고 설치했던 안전합동위원회(JSC) 사무실이 올 3월 민병대 공격을 받아 불타고 요원들이 부상을 입었던 곳도 바로 타켕온이었다. 타켕온은 자와섬에서 이주해 온 이들이 주축을 이루는 아체 내의 자와섬과 같은 지역으로 아체 독립투쟁에 매우 큰 반감을 지닌 곳이다. 비록 인구분포로 볼 때는 자와 이주민들이 20%에 지나지 않지만 사회적 영향력 면에서는 타켕온을 주도해왔고, 이들이 바로 민병대를 구축한 실체들이다. 그동안 이 민병대들이 정부군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동티모르 사태에서 보았듯이, 민병대를 동원한 정부군의 지역민 분열정책은 아체문제 해결에서도 추후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는 게 모든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그러나 군 당국의 뒤에 도사린 민병대는 기자들의 취재 영역을 벗어나 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일행은 민병대 내부를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아체는 들여다볼수록 더욱 깊은 어둠만 피어오르는 암흑지대다.

떠나는 날, 합법적 신분증을 얻다


사진/ 전쟁과 아이들의 전통적인 적대관계 속에서 미래의 자유아체운동은 자라나고 있다. 촛 구파 난민촌(정문태).


6월23일 날이 밝을 무렵, 아체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아체에서 취재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지난 밤을 꼬박 새며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도 단 한명의 외국기자는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명분과 충돌했지만, “취재 없이는 기자도 없다”는 단순한 논리로 명분을 뒤엎었다.

아침 9시 미디어센터에서 기자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일부 기자들은 마지막 남아 있던 외국기자가 떠나는 장면을 취재하는 것으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떠나기에 앞서 록세우마웨 작전사령부로부터 작전지역 취재 허가증이 발급되었다. 떠나는 날 완전한 ‘합법’ 신분을 얻은 꼴이 되었다. “떠난다고 선물을 주는 것인가? 이제 속이 후련한지. 그렇게도 외국기자들을 거부해왔으니.” 미디어센터 담당 군인들과도 작별했다. 있든 없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작전취재용 신분증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언론통제의 간지러움을 느꼈다. 미디어센터 대변인 야니 중령은 상황을 이해해달라며 손을 잡고 거듭 미안함을 강조했다.

아체를 남겨놓고 떠나는 발길은 무겁기만 했다. 기자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한 부족함과 아쉬움이 길게 밟혔다. 아체 계엄 군사작전, 지금까지 크고 작은 전쟁과 전선을 취재해오면서도 이런 지독한 언론통제를 겪어본 적은 없었다. ‘짧은 평화를 위한 긴 전쟁.’ 불길한 예감만 안고 아체를 떠났다.

반다아체·록세우마웨= 정문태 |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네트워크 팀장


 

아체는 아직도 계엄령 선포하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에게 더이상의 슬픈 일이 없기를 절실히 바래본다. 그러나저러나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다. 인도네시아, 태국, 인도, 스리랑카, 몰디브, 미얀마, 방글라데시 등 수많은 동남아 국가들과 저멀리 소말리아에 이르기까지, 고귀한 생명을 너무도 허무하게 잃은 분들과 그들의 가족분들 모두에게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 

 

참,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와 <전선기자 정문태 - 전쟁취재 16년의 기록>이란 서적 두 권을 감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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