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여행이 책이 되도록 [2009.11.06 제784호]
[레드 기획] 여행을 좋아하는 것과 여행작가는 다르다… 절실함으로 써라
▣ 김미영
“여행책을 내고 싶습니다.”

출판사 ‘시공사’ 여행팀 에디터인 권희대 차장은 이런 제목의 전자우편을 자주 받는다. ‘어디를 다녀왔다’ ‘이런 여행정보는 서점에 없는 것 같던데…’ 등으로 시작하는 여행후기를 담은 전자우편이다. 내용은 달라도 구애의 목적은 같다. 자신의 책을 내고 여행작가가 되고 싶다는 것. 권 차장은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여행을 직업으로 삼는 여행작가를 꿈꾸는 이도 많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 볼리비아의 한 호숫가에서 플라밍고의 사진을 찍고 있는 여행작가 이홍석씨. 사진 시공사 제공

연간 출국자 1천만 명 시대

연간 출국자 수 1천만 명 시대. 여행이 붐을 이루면서 여행서적도 다양해졌다. ‘월화수목금금금’을 살던 평범한 직장인들이 사표를 내고 떠나는 일상탈출기부터 연예인·소설가 같은 유명인의 여행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바람의 딸’ 한비야, ‘까탈이’ 김남희 같은 인기 여행작가의 책은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에서도 밀리지 않는다. 콧바람 쐬다 제대로 바람난 이들은 일상 탈출을 꿈꾸는 여행가들의 ‘워너비 스타’다. 오늘도 세상을 떠돌며 멋지게 살기를 꿈꾸는 ‘제2의 한비야·김남희’가 길 위에 오른다. 길 위에서 길을 찾던 여행가들이 길 없는 길에서 길을 찾는 여행작가가 되겠다며 셔터를 누르고 자판을 두드린다.

여행작가들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여행작가 되는 법’이다. 그러나 여행작가가 되는 길은 의외로 간단하다. 각종 블로그와 여행정보 사이트에 열심히 후기를 올리거나 출판사를 직접 찾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가진 책 한 권을 가져야 정식 회원이 될 수 있는 한국여행작가협회에 들 게 아니라면 잡지 연재나 인터넷·방송 활동을 통해 여행작가가 될 수 있다.

파워블로거인 ‘고구마’(31)도 ‘블로그질’을 통해 여행작가를 꿈꾼다.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를 하는 그는 “여행작가가 되고 싶어 연습하는 마음으로 블로그(blog.naver.com/rich4707)에 글과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여행 웹진처럼 꾸며진 블로그엔 빡빡한 여행정보보다 말랑말랑한 느낌의 사진과 글이 가득하다. 국내외 여행기뿐 아니라 맛집 정보도 담아 관심을 끈다. 파워블로거가 되면서 잡지와 온라인 매체에서 기고 요청도 받았다. 꿈인 여행작가에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 “내 이름으로 낸 여행책을 갖는 것”이 그의 다음 목표다.


» 숙소에서 갠지스강을 바라보고 있는 여행작가 이지상씨(왼쪽). 광고회사 카피라이터였던 조현숙씨도 본업을 접고 여행 기록자가 됐다. 사진 시공사 제공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인 장은숙(39)씨도 블로그를 통해 여행작가가 됐다. 스스로는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인 ‘프로추어 여행작가’라고 생각한다. 몸이 근질거려 집에 있지 못하는 방랑병은 그를 투잡족으로 만들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잡지 기고와 한국관광공사의 여행코스 모니터링을 한다. 출판사의 제의로 가족이 함께하는 전국여행 책도 준비하고 있다. 같은 국내 여행지도 다르게 보여주는 그의 블로그(blog.naver.com/capzzang70)엔 데이트나 가족여행 코스를 짜달라는 문의가 많다. 앞서간 여행자들이 그랬듯, 장씨도 또 다른 누군가의 여행을 자신의 여행 경험으로 채워주는 중이다. “취미로 돈도 버니 투잡 생활은 지겨울 때까지 할 생각”이다.

일기처럼 쓴 여행후기가 책으로

기회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도 찾아온다. 일기 쓰듯 꾸준히 여행후기를 남기다 보면 여행작가의 길이 저절로 열리기도 한다. 5살 쌍둥이 아기를 둔 주부 이현정(35)씨는 유료 회원제로 운영되는 여행정보 사이트 아쿠아(aq.co.kr)에 올렸던 여행후기가 뽑혀 작가가 됐다. 쌍둥이 아이와 노모를 모시고 떠났던 앙코르와트 여행기는 그를 <2010 트렌드세터 10인의 아주 특별한 여행기>(시드페이퍼 펴냄)의 공동저자로 만들어줬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 서점에 책이 꽂혀 있는 것을 봤을 때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어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첫 책은 감격스러웠다.

간호사인 강윤아(37)씨도 이현정씨와 같은 공동저자 10인 중 한 명이다. 남편과 함께 한 이란 여행 후기가 뽑혔다. 한 번 이상 가본 국가만 58개국이 넘는 그는 지독한 여행중독자. 3년6개월간의 세계일주를 떠났던 2000년부터 여행을 기억하기 위해 여행후기를 썼다. “매너리즘에 젖은 일상을 멈추고 잠시 자신을 뒤돌아볼 기회를 갖게 된다는 점이 여행의 매력”이라고 말하는 그는 언젠가 장기여행을 한다면 아메리카 대륙 종단을 할 생각이다.

» 각종 여행 기록 자료들.

<2010 트렌드세터…>를 엮은 시드페이퍼의 김두리 에디터는 “사표 내고 떠난 여행기, 스무 살에 여자 혼자 떠난 여행기 같은 식상한 테마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특별한 여행기를 책으로 묶기 위해 아쿠아에 2년간 쌓인 후기들을 모조리 읽어 저자들을 골랐다”고 말했다.

열정만 있다면 누구나 여행작가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여행작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흡입력 있는 글솜씨와 사진촬영 솜씨를 기본 소양으로 갖춰야 한다. 아쿠아 콘텐츠 개발 매니저 이경아씨는 좋은 여행기의 조건으로 “글쓴이의 가치관·경험·취향이 오롯이 녹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픈된 정보가 많다 보니 자기만이 가진 정보, 같은 사물도 다르게 볼 수 있는 독특한 세계관이 필요하다. 시공사 권희대 차장은 “여행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중한 경험이 특별하다고 생각해 출판사에 글과 사진을 보내오지만 편집자가 원하는 수준이 아닐 때가 많다”며 “여행책에서 글을 쓰는 방식이나 통용되는 사진기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지구별 워커홀릭>을 쓴 여행작가 채지형씨도 여행작가란 직업에 대해 질문을 자주 받는다. “여행작가가 되니 내가 작가가 되기 전에 가졌던 궁금증이 그대로 다시 질문으로 돌아오더라”는 그는 최근 여행작가를 위한 안내서를 냈다. 지난해부터 그는 한국여행작가협회와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평생교육원(hallym.ac.kr)이 함께하는 여행작가 양성과정도 맡고 있다. 35명의 정원이 꽉 차 대기자를 받을 만큼 여행작가를 꿈꾸는 이들이 많은 것을 보고 그는 잘 쓴 여행책 만큼이나 좋은 여행작가를 키우는 책도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여행기자였던 김남경씨와 함께 <여행도 하고 돈도 버는 여행작가 한번 해볼까?>(위즈덤하우스 펴냄)를 쓴 이유다.

때마침 10년 가까운 경력을 가진 여행작가 5명이 여행작가의 세계를 소개하는 <슈퍼라이터>(시공사 펴냄)도 출간됐다. 여행작가의 매력을 보여주는 두 책 모두 좋은 여행기 쓰는 법, 인기 블로거 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수준을 넘어 실제로 어떻게 매체에 기고하거나 책을 출간해 여행작가로 살 수 있는지 자세하게 소개한다.

안정된 수입을 갖기는 쉽지 않아

» 〈여행도 하고 돈도…〉〈슈퍼라이터〉

두 책의 저자들은 세상을 떠돌며 멋지게 살라고 부추기는 대신 낭만적 밥벌이로 보이는 여행작가의 냉정한 현실을 들려준다. 출근 오전 9시, 퇴근 저녁 6시의 일상화된 생활을 견디지 못하는 방랑병을 가졌다고 대뜸 여행작가가 되려는 무리수를 경계한다. 시공사 권희대 차장은 “무엇보다 여행을 좋아하는 것과 여행작가가 되는 것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슈퍼라이터>의 이지상 작가는 여행작가가 되려는 이유부터 되물으라고 말한다. 그도 20여 년 전, 오랜 고민 끝에 안정된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즐기고 돌아오는 짧은 여행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사건들이 매일매일 축제처럼 터지는 삶의 모험을 원했다”는 그는 절실함을 갖고 여행작가가 되라고 말한다. 하기 나름이지만 안정적인 수입을 갖기 쉽지 않다는 점을 알려주고, 스스로를 위해 쓰던 글이 평가를 받는 글이 되면 상처받을 수 있다는 점도 충고한다. 그래도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다면 기꺼이 카메라와 펜을 들라고 말한다.

여행칼럼니스트 박동식씨는 “당신의 글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당신의 사진을 보고 미지의 세계를 꿈꾸고 내일을 계획하기도 할 것이다. 여행작가는 글과 사진으로 누군가의 삶에 긍정적인 파장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며 “당신이 이 길을 가지 않으면 나에게는 한 명의 경쟁자가 줄어드니 다행한 일이지만, 당신이 이 길을 가겠다면 멋진 동료를 얻었으니 더 기쁠 것”이라고 말한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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